미술칼럼 > 회화

[스크랩] 아버지의 초상화를 위하여

조세걸 <서계 박세당 초상> 박태보 <간찰>

조선시대 인물 중 초상화가 가장 많이 제작된 사람은 누구일까? 아마도 양란 후 조선시대에서 가장 영향력이 컸던 송시열이 수위에 들 것임에 틀림없다. 잘 알려진 김창업이 초를 잡은 송시열상 뿐만 아니라 많은 초상화가 그려져 그의 영정을 받들던 서원만 16개에 이르렀다. 갈등의 시기 송시열의 반대편에 선 쪽에서도 존경받는 인물을 초상으로 남기고자 하는 노력이 다양하게 이뤄졌을 텐데, 서계(西溪) 박세당(朴世堂, 1629-1703)의 초상이 그 노력의 결과물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박세당은 서로 탄핵하고 죽음에 몰아넣기 바빴던 악명 높은 숙종대의 학자로, 송시열과 주자학이 주름잡고 있던 꽉 막힌 시대에 색다른 경전해석과 송시열 비판으로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려다 탄압받은 소론파의 중요인물이다. 그는 꾸준히 개혁적 논의를 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40세에 수락산 석천동에 칩거했다. 


서계종택 기탁 장서각 소장 박세당 초상. 정면상 95x54.3cm


서계종택 기탁 장서각 소장 박세당 초상. 반측면상 85x58.6cm


반신상에 복건을 쓴 학창의 박세당 초상. 이 초상화는 임금의 명에 의한 공신상이 아닌, 사적으로 제작된 것이다. 이 초상화가 특별한 이유는 박세당의 아들 박태보(1654~1689)가 남긴 몇 통의 편지로 인해 그가 아버지의 초상화를 만들고자 했던 일들, 작자로 물망에 올랐던 사람들, 당시 초상화 제작의 사정 같은 여러 주변 상황이 알려졌다는 것 때문이다. 편지가 쓰여진 다음 해에 제작된 초상화이므로 간찰과 이 초상화는 관련이 클 것이다. 


박태보가 1688(숙종 14)년 6월 21일 박태보가 이진사에게 쓴 편지 2면

“(화상 그리는 일을 계획세운지 오래됐으나 착수하지 못해 근심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형님께서 주관하여 이 일을 거의 이룰 수 있게 되었으니 참으로 다행입니다. 당초 세 폭만으로는 구차스럽다는 것을 알지만, 온 폭을 구하려면 중국 연경의 시장에서 사들여야 합니다… 지금 구할 수 있다면 온 폭을 구해오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물건 값은 물건이 들어오는 대로 구해보겠습니다. 반신상으로 하면 초라하니 전신상으로 해야겠습니다. 다만 관복상은 적당하지 않으니 평상복으로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말씀하신 물감은 관복의 채색용인 것으로 보입니다. 일전에 조씨 화사(조세걸)를 만나 화상 제작에 들어가는 것들을 두루 물었더니 그가 손수 적어 보여주었는데 여기 그 종이를 동봉합니다. 다만 이 역시 관복 채색용이라 다시 화사에게 물어야 하겠습니다." 


박태보가 1688(숙종 14)년 6월 21일 박태보가 이진사에게 쓴 편지. 3면

"응당 소요될 수효를 다시 마련하여 보여주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금박과 은박은 당연히 사용해야 할 겁니다. 아교는…필히 솜씨 좋은 장인을 구해야 정제할 수 있을 것입니다만 시골에서 구하기 어려우니 걱정입니다. 혹시 이번 도감에서 진상하고 남은 것이 있을 것이니, 탐문하여 주시겠습니까? … 화공을 구하는 일이 가장 어렵습니다. 조씨 화사가 정말 눈이 침침하다면 그의 솜씨가 좋아도 그리게 할 수 없겠습니다. 한씨(한시각)와 윤씨(윤상익) 두 화사가 각자의 장기를 발휘하면 좋겠지만, 그들이 합심하여 이견을 보이지 않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니 이것이 걱정거리입니다."

편지를 보면 영정 제작에 들어가는 비용과 재료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과 함께 영정을 그릴 화사를 당시 명성이 있던 평양화가 조세걸(曺世傑, 1635~?)로 결정하려는 과정이 담겨있다. 편지를 받은 이진사라는 사람이 조씨 화사, 즉 조세걸을 연결시켜 준 것으로 생각된다. 간찰의 내용과 완전히 같은 전신상에 옥색포를 입은 모습의 초상화는 전하지 않는다. 장서각에 기탁된 1689년 조세걸이 그렸다고 하는 박세당의 초상화는 분홍색 심의에 복건을 쓴 모습이다. 같은 차림 좌안칠분면 반신상도 있다. 

박태보 간찰의 행초 글씨에는 유려한 아름다움이 있어 눈길을 끈다. 아버지 박세당의 행초에 비해 둥글고 유연하게 흘러가는 모습인데, 윤순거의 호방한 필치가 섞여 외가의 영향으로도 본다. 원래 외삼촌은 남구만이며, 서계의 셋째 형에게 입양가서 자신을 아꼈던 명재 윤증을 외삼촌으로 삼게 되었다. 박태유, 박태보 형제는 안진경체를 잘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박세당의 아들 둘 태유와 태보는 재주가 뛰어나 젊어서 과거에 급제, 관직에 나섰으나 그들의 강직한 성격을 걱정한 아버지는 전전긍긍하며 아들들이 조심 또 조심하며 관직생활을 이어가라고 끊임없이 잔소리했다(많은 양의 잔소리 편지가 남아 있다). 그중 둘째 아들 박태보는 호남에 암행어사로 다녀온 뒤에 중앙에 보고한 과감한 비리 지적으로 칭송받은 바도 있지만 불의를 참지 못하고 여기저기 부딪혔던 듯하다. 

박태보는 초상화 관련 편지를 쓴 이듬해(1689년, 숙종15년) 기사환국에서 서인을 대변해 인현왕후의 폐위를 반대하다 고문을 받고 진도로 유배가던 중 노량진에서 죽었다. 

“박태보가 길을 떠나 과천에 이르러 병이 위중해져 드디어 죽었다. 박태보의 자는 사원(士元)이니, 박세당의 아들이다. 사람됨이 청개 경직(淸介勁直)하였는데, 일찍이 괴과(魁科)로 발탁되어 문학(文學)으로 이름이 있었고, 또 정사에 재능이 있었다....다만 그 성품이 평소에 편협하고, 또 윤선거의 외손으로 사론(士論)이 둘로 나뉘었을 때 힘껏 송시열을 헐뜯었고, 윤선거의 강도(江都)의 일은 ‘죽을 만한 의(義)가 없다.’고까지 하였다. 또 송시열의 아버지 송갑조를 무함하여 그 외증조 윤황을 추장(推奬)하는 뜻에 어긋남을 돌아보지 아니하였으므로, 사람들이 환혹(抅惑)됨을 병통으로 여겼다. 그러나 이에 이르러 송시열은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위해 눈물을 흘리고 소식(素食)을 하였고, 이어 자손에게 박태보의 이름을 부르지 말라고 경계하였다. 죽을 때 나이가 39세인데, 뒤에 증직(贈職)·정려(旌閭)하고 시호(諡號)를 문열(文烈)이라 하였다.” (숙종실록)


박세당 간찰. 아들 박태보가 세상을 떠난 1689(숙종15)년 6월에 이 진사에게 쓴 것이다. 
"...억장이 무너지고 간장이 찢어지며 원통하고 억울하지만 하소연할 곳도 없네. 죽고 싶지만 죽지도 못하고 있으니, 어이하겠는가..."


기사환국 이후 1690년 조세걸은 석천동으로 박세당을 방문했고, 여기서 박세당에게 산수화 여섯 폭을 그려 증정해 박세당이 이를 명품으로 아끼며 애장했다. 박세당이 남긴 화제에 조세걸이 그려준 자신의 모습에 대한 표현이 있는데, "죽장에 기댄 창안백발"이라고 되어 있어 위 두 점의 영정과는 또다른 초상화-죽장에 기댄 모습-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세걸이 양주에 방문해 초상화를 그린 것은 분명해 보이고 서계 집안에서 전해 내려오는 말로는 1960년대까지 넉 점의 영정이 있었다고 한다. 같은 시기 그려진 이 두 점의 초상화를 조세걸이 그렸을 가능성이 가장 커 보인다. 

조세걸은 평양 출신으로 그곳에서 활동하다가 중년 이후에 상경, 어진 제작에 참여하는 등 궁중에서 활발한 도사활동을 펼쳤다. 70세인 1705년(숙종 31)까지 작품을 남긴 것으로 확인된다. 하위 관직을 하던 집안으로 잘 살아 많은 중국 그림을 소장하고 있었던 것이 그의 화풍에 밑거름이 됐다. 김수증의 산거지를 그린 『곡운구곡도첩(谷雲九曲圖帖)』(1682년, 국립춘천박물관)이 유명하다. 

서계 박세당 초상은 반남 박씨 서계종택에 보관되어 오다가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기탁되어, 장서각 특별전 《보존과학으로 다시 태어난 조선의 기록유산》(2023년) 등에서 일반에 공개됐다. 
업데이트 2025.04.15 00:47

  

최근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