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진의 청화백자 항아리는 1941년 도쿄에서 열렸던 대규모 조선미술품 전시에 등장했던 수많은 조선 고미술품 중 하나였다. 조선 공예품 연구자/덕후 아사카와 형제 중 동생, 아사카와 다쿠미(淺川巧, 1891~1931)가 가지고 있던 소장품이었다. 둥근 몸체에 살짝 각을 주어 8개의 부드러운 곡면이 만들어졌는데, 두 면 마다 창 무늬 속에 꽃과 풀을 그려 넣은 이 항아리를 보고, 당시 어디서도 볼 수 없던 ‘이조도자’의 매력에 빠져 있던 일본인 수집가들은 너도나도 이를 탐냈다. 지금 이 항아리는 몇몇 주인을 거쳐 일본 오사카에 귀하게 모셔져 있다.
조선 백자의 소박한 아름다움을 제대로 보여주는 이 <백자청화초화문면각호>는 조선 미술품에 대한 연구나 사랑에 있어서 가장 중심이 되었던 인물 중 하나인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1889-1961)가 ‘조선시대 청화의 초화문 항아리로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한다’며 특별히 언급하기도 했다(야나기 무네요시는 아사카와 형제와 친밀하게 지냈다).
조선 땅에서 한국의 도자와 공예품에 몰두하는 삶을 살다가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던 아사카와 다쿠미의 구장품 백자청화 초화문 항아리는 정력적으로 활동하던 한 한국인 골동상에 의해 일본에 건너가게 된 여러 고미술품 중 하나다. 1930년대 후반부터 1940년대 초반까지 활발하게 활동한, '문명상회(文明商會)'의 주인인 이 한국인 골동상은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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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조선고미술 전시회를 열고 판매해 큰 돈을 번 문명상회 주인의 이름은 이희섭(李禧燮).
일본인 미술상 마유야마 준키치(繭山順吉, 1913-1999)의 기록에 의하면 이 항아리가 1941년 이희섭의 전시판매회에 등장했었다고 한다(마유야마 준키치는 유명 골동상점인 마유야마류센도繭山龍泉堂 설립자 마유야마 마츠타로의 아들로, 몽유도원도를 일본 덴리대학에 넘긴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이희섭은 1934년경에 경성부청, 그러니까 지금의 서울시청 뒤쪽에 문명상회라는 골동가게를 시작했다. 그는 현재는 국보로 지정된 오리모양 청자 연적을 들고 온 사람에게 당시 기와집 한 채 값인 1,600원을 주고 연적을 가로채듯 산 다음 일본인에게 2만원에 판 것으로도 유명하다.
국보 제 74호 청자 오리모양 연적(靑磁鴨形硯滴)
이희섭은 일본에서의 한국 고미술 판매에서 독보적인 인물이다. 1934년부터 1941년까지 이희섭의 문명상회가 도쿄와 오사카에서 조선 고미술과 공예품 전시 판매회를 연 것만 해도 7차례나 된다. 이희섭에 의해 반출된 문화재가 얼마나 많은지 정확한 수는 알 수 없지만 일본에서의 전람회 출품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만 14,407점에 달한다. 수많은 옛 공예품과 미술품이 그를 통해 일본으로 건너간 것. 1941년 전시는 도쿄 번화가에 있는 다카시마야(高島屋) 백화점에서 고대부터 조선시대까지의 고미술품 3천여 점을 모아 연 것이었다. 전시는 대성황을 이루었고, 전시품들은 고가에 팔려 이희섭은 큰 재산을 불리게 됐다. 이는 조선총독부의 든든한 뒷배가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이희섭의 조선 골동 판매전 도록 <조선공예전람회도록> 소화16년(1941년) 조선공예연구회편, 문명상회 출간.
도쿄도고서적상업협동조합
1930년대 중반 이전만 해도 조선 땅의 도자기라고 하면 청자나 좀 알아줬지 조선시대의 미술품이라는 것은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다. 고적 조사 사업, 계룡산 사건, 몇몇 경매에서의 기록적인 낙찰가, 도자사 연구의 발달 등 몇몇 중요한 배경이 있었겠지만 조선의 도자기와 공예품 등이 1930년대 후반부터 큰 인기를 끌게 된 것은 야나기 무네요시와 아사카와 형제의 덕이 큰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인기가 얼마나 급등했던지 1942년 야나기 무네요시는 ‘최근에 이조의 것이 오히려 병적이라고 말할 정도로 비싼 값을 부르는 것을 보면 예전과는 완전히 달라져버렸다’고 할 만큼 붐을 이뤘다. 일본 쪽으로의 문화재 유출은 국내에 있는 자산가나 애호가들을 자극하기도 해서, 여러 조선인 컬렉터가 생겨나고 전형필 등이 활약하는 시대를 만들어 낸다.
일본인 중심이었던 한국내 미술상 업계도 판도가 달라진다. 1935년에서 1940년 동안 경성부에서 조사한 경성의 물품 판매업 조사(物品販賣業調査)에 따르면 골동 관련해 개인이 운영하는 점포가 1935년에는 일본인 73개, 조선인 107개에서 1940년에는 일본인 83개, 조선인 296개로 일본인에 비해 조선인이 더 많아짐을 알 수 있다. 1년간의 매상고별 조사에서도 1935년과 1937년은 비슷하다가 1940년이 되면 3,000원 미만은 일본인 25개, 조선인 134개, 1만 원 미만이거나 이상인 경우는 일본인 49개, 조선인 119개로 조선인 측이 많다.
고종이 고려의 청자를 알아보지 못하고 이토 히로부미에게 ‘우리나라에는 이런 게 없다’고 했다거나, 저자거리에서 고양이 밥그롯으로 사용되던 자기 대접을 알아본 상인이 고양이를 5원에 산다고 하면서 밥그릇을 달라고 해 그 대접을 150원에 팔았다는 일화도 전해지는 것을 생각하면, 당시 우리 것을 알아보고 사랑하고 귀하게 여겨 준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문제의 백자청화 초화문면각 항아리는 1945년 아타카(安宅) 컬렉션이 되어 현재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희섭은 그후 어떻게 되었을까? 광산에 투자했다가 실패하여 그 많던 재산을 거의 다 날리고, 한국전쟁 때 인민군에게 총살되었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