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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 조선인 도공이 시조를 새겨 넣은 하기야키 찻사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으로 한글이 문양으로 새겨진 찻사발 한 점이 있다. 붓으로 써 넣은 능숙하고 좋은 필치. 


한글묵서 다완, 에도 시대. 높이 10.6cm, 입지름 13cm, 받침지름 6.4cm, 국립중앙박물관.


이 찻사발은 일본 땅에서 만들어졌다. 일본에서 지역 전통 문화재로서 전해지던 다완으로 교토의 고미술 수집가 후지이 다카아키(藤井孝昭)가 소장하고 있던 것을 그의 유족들이 2008년 7월 17일 한국의 국립박물관에 기증한 것이다. 전통적 명칭은 <추철회시문다완(萩鐵繪詩文茶碗)>이다. 

이름에 있는 ‘추(萩)’는 일본 야마구치현(山口県) 하기(萩)시(市)를 뜻하며, 하기시에서 만들어진 도자기들은 하기야키(萩焼)라고 부르는데, 대개 임진왜란 때 납치된 조선인들과 그 후손의 작품을 가리킨다.

16세기 말 조선에 출병했던 하기번(萩藩)의 번주(藩主)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는 도공 형제 이작광(李勺光), 이경(李敬)을 붙잡아 왔다. 모리는 와비차를 집대성한 센리큐(千利休)의 제자인 차 전문가이기도 했다. 그는 이작광, 이경 형제를 시켜 어용요를 만들어 도자를 제작하도록 했고, 이것이 400여 년간 이어진 것이다. 이경의 후손이 사카고라이자에몬(坂高麗佐衛門)이라는 명적으로 현재도 가업을 물려받고 있다. 당대는 14대.


초대 사카고라이자에몬(이경)의 다완(古萩粉引茶碗)



다완에 쓰여진 글을 읽어보자. 

개야 즈치 말라 밤 살ᄋᆞᆷ 다 도듯가 
ᄌᆞ목지 호고려 님 지슘 ᄃᆡᆼ겨ᄉᆞ라 
그 개도 호고려 개로다 듯고 ᄌᆞᆷ즘ᄒᆞ노라


자연스럽게 시조의 운율이 느껴지는 글인데, 조선에서 유행하던 시조 중 하나를 변형, 가사바꾸기 한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개야 즛지 마라 밤 ᄉᆞ람이 다 도적가
두목지 호걸이 님 츄심 단니노라
그 개도 호걸의 집 갠지 듯고 ᄌᆞᆷᄌᆞᆷᄒᆞ더라
-《고금명작가(古今名作歌)》 중

개야 짖지 마라, 밤 사람이 다 도적이냐
두목지 호걸이 님 찾아 다니노라
그 개도 호걸의 집 개인지 듣고 잠잠하더라

두목지는 당나라 후기의 시인이자 명사였던 두목(杜牧, 803~853)을 가리킨다. 자가 목지(牧之). 이상은과 짝을 지어 ‘이두’라고 불리는 천재 시인으로 작품이 두보와 비슷해서 소두(小杜)로 칭해지기도 했다. 시 잘 짓고 풍류를 즐기는 한량의 표상으로 자리를 차지해 왔지만 무엇보다 용모가 준수해 수많은 여인과 염문을 뿌린 것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가 양주(楊州)에서 벼슬아치로 있을 때, 저자거리를 지나면 그를 유혹하려는 여인들이 모두 나와 귤을 던졌다는 일화(醉過楊州橘滿車)가 있을 정도. 
조선에서도 ‘두목지’는 훤칠하고 잘 생긴 남자의 표상으로 많이 사용됐다. 춘향가 중 방자가 춘향에게 이몽룡을 소개(?)하는 장면에 "우리 사또 자제 도령님은 얼골이 관옥이요, 풍채는 두목지(杜牧之)요, 문장은 이태백, 필법은 왕희지라..." 라는 대목이 있고, 황진이의 시에도 두목지가 등장한다. 

楊州芳約吾無負  楊州의 꽃다운 인연 내 아니 저버릴 것이나
恐子還如杜牧之  두려운 건 그대가 두목지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원래의 시조 의미는, 두목지 같은 쾌남호걸이 밤에 여인을 만나러 나가는 와중에 개가 시끄럽게 짖어 꾸짖었는데 조용해지는 것으로 보아 호걸의 사정을 잘 아는 호걸 집 개인가보다, 하는 내용이고, 도공은 ‘호걸’ 대신 ‘호고려’라고 바꿔 적은 것이다. 

호고려(胡高麗)는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납치된 조선인을 현지 일본인들이 부르던 호칭으로 말하자면 오랑캐 고려사람이라는 의미다. 

그러니 찻사발에 써 있는 시를 현대어로 바꾸면 다음처럼 된다. 

개야 짖지 마라 밤 사람이 다 도둑이냐
두목지같은 조선 사람이 님 찾아 다녀오려는 게다
그 개도 조선 개인가, 듣고 잠잠하구나

이국 땅에 사는 조선 사람들끼리 동류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자연스럽게 드러났으려나 싶기도 하다. 
17세기 언간의 서체와 비슷해 그 무렵이거나 이후의 것으로 여겨진다. 
업데이트 2024.04.11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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