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빛의 도자. 지름이 15cm에 가까운 꽤 큰 합으로, 뚜껑과 몸체에 원기둥을 세운 것 같은 굴곡이 생기도록 틀로 찍어 전체 형태를 만들었다(뚜껑 뒷면에 틀을 찍은 자국이 남아 있다).
<백자양각 쌍봉문 유개합> 높이 6.4cm, 지름 14.8cm,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뚜껑 윗부분은 판판한데, 이 판판한 면에 얕은 양각으로 목을 서로 얽고 있는 봉황무늬를 새겼다. 봉황은 부부의 사랑을 뜻하기도 하므로 규방에서 사용하던 것으로 추정한다. 양각 문양은 얕고, 그 위에 투명하지만 두텁게 유약을 입힌 탓에 전체적으로 미세한 균열, 빙열이 생겨 그 문양을 잘 알아보기 힘들 정도가 됐다. 아주 옅은 고른 청록색의 유색이 아름답고, 기형과 문양은 완성도가 높다.
여러 가지 사항을 종합해 봤을 때, 이 백자합은 어느 시대의 것일까?
(1) 고려시대
(2) 조선 전기
(3) 조선 중기
(4) 조선 후기
(5) 조선 말~근대기
----
중국에서 도자의 유행이 14세기를 경계로 청자 중심에서 백자 중심으로 변화했는데, 이 변화의 가장 중요한 원인은 1,300℃의 고온에 견딜 수 있는 단단한 자토인 ‘고령토’의 발견과 활용에 있었다. 14세기를 기점으로 징더전(景德鎭)에서는 고령토를 사용한 경질 백자를 생산하기 시작했고, 우리나라에서도 15세기 이후 중국의 영향 등으로 조선 백자가 발전한다. 조선의 통치 이데올로기, 사대부의 이상과도 맞아 떨어진 미학으로 조선은 백자의 시대를 맞게 되며, 이 때의 백자는 희고 깨끗하고 단단하여 옛 고려 백자와는 이질적인 것이다.
(2) 조선 전기
(3) 조선 중기
(4) 조선 후기
(5) 조선 말~근대기
----
머나먼 옛날, 흙으로 그릇 모양을 빚어 불에 구워서 토기를 만들어 쓰던 와중에, 불에서 나온 재먼지가 고온의 그릇 위에 앉아 뭔가 반응을 일으켜 자연스레 표면처리가 됐음을 발견한다(태토 속에 포함된 규사질과 반응). 사람들은 일부러 잿물을 만들어 토기 표면에 바르고 고온으로 구워 광택나는, 품질 좋은 그릇을 만든다. 이것이 청자의 조상격인 회유토기로, 기원전 은나라 때 처음 등장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후 점점더 높은 화력을 이용하고 좋은 흙을 찾아 세련된 기형으로 단단하고 아름다운 자기를 만드는 기술이 발전하게 된다.
자기는 태토와 유약에 포함된 금속산화물 때문에 이러저러한 색깔을 띄게 되는데, 사람들은 흙(금속산화물 함량)의 종류, 양이나 가마의 온도나 산소유입 등 번조 조건을 달리하면 자기의 색상이 달라지는 것을 알게 됐다. 유약보다도 어떤 흙을 태토로 사용하는지와 번조 조건이 더 중요했다. 중국에서는 당송시대, 우리나라는 고려시대까지 아름다운 푸른 빛을 띤 청자를 만드는 기술을 발전시켰다. 그런데 고려시대에 청자와 비교해서는 미미하지만 백자도 만들어졌다. 순청자 전성기에 고려 백자도 상대적으로 많이 만들어졌고, 청자가 퇴보하는 13~14세기에는 백자도 퇴보하고 수량도 줄어든다. 위의 백자합은 순청자 전성기인 12세기 전반에 만들어진 고려시대 백자이다. 정답은 (1)번.
중국에서 도자의 유행이 14세기를 경계로 청자 중심에서 백자 중심으로 변화했는데, 이 변화의 가장 중요한 원인은 1,300℃의 고온에 견딜 수 있는 단단한 자토인 ‘고령토’의 발견과 활용에 있었다. 14세기를 기점으로 징더전(景德鎭)에서는 고령토를 사용한 경질 백자를 생산하기 시작했고, 우리나라에서도 15세기 이후 중국의 영향 등으로 조선 백자가 발전한다. 조선의 통치 이데올로기, 사대부의 이상과도 맞아 떨어진 미학으로 조선은 백자의 시대를 맞게 되며, 이 때의 백자는 희고 깨끗하고 단단하여 옛 고려 백자와는 이질적인 것이다.
백자를 만들기 위해서는 태토가 되는 백토의 철산화물 함량이 낮아야 소성 후 깨끗한 흰색을 만들어낼 수 있고, 유약도 백자에 맞는 유약을 입혀야 한다. 굽는 온도도 백자가 조금 더 높다. 고려 백자에는 균열이 많지만 조선시대의 발전된 백자에서는 균열이 보이지 않는다.
조선은 스스로 백자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 세조 연간 전국의 백토를 조사, 양질의 백토를 찾아내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 했고, 좋은 백토를 찾으면 그 지역의 백토를 왕실 및 관청의 그릇을 만드는 데만 사용하도록 하기도 했다. 전국을 뒤져 발견해낸 백토는 광주로 보내 양질의 백자를 제작하는 데 사용했다.
고려청자와 기원, 발달 상황이 거의 같은 고려백자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발전했는가에 대해서는 밝혀진 바가 많지 않다. 완성된 형태로 전해지는 도자는 많지 않지만 유천리 가마 출토 도편 자료가 많은데, 이 유물들은 일제강점기 정읍에 살던 일본인이 도굴해 가지고 있던 것으로 1958년 이대 박물관이 그 일부를 구입, 복원, 전시함으로써 학계에 알려졌다. 학술 발굴이 아니어서 불완전하지만 12~13세기 백자 기형, 무늬 제작기법 등 파악에서 중요한 자료가 된다.
고려의 백자 미학과 기술이 조선백자로 계승되었는가의 여부에 대해서는 현재로서는 근거가 거의 없는 듯하다. 15세기 조선에서는 연질 계통의 사기그릇과 경질 계통의 백자 두 종류 모두 있었고, 상감 백자 등 연질계통을 고려 백자의 전통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있다. 연질백자는 15세기 후반 거의 사라지게 된다.
또다른 12세기 고려백자 합을 보면, 푸른 기운이 약간 도는 유약이 두텁게 발라져 빙열이 있으며, 청자 스타일의 기형을 알아볼 수 있다.
<백자상감보상당초문합> 고려 12세기, 높이 2.5cm, 지름 7.3cm, 국립중앙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