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청사기에는 새기거나 반복해 찍거나 긁어내거나 면을 채우거나 그림을 그려넣거나 하는 다양한 방법을 이용해 장식 무늬를 넣었는데, 이러한 기법에 따라 생김새나 분위기도 전혀 달라지고 그 발생 연원과 시기, 제작한 지역 등을 가늠해 보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다음의 분청사기들은 회흑색 태토 위에 귀얄로 백토를 바른 뒤에 철사안료로 무늬를 그리고 유약을 입혀 구운 철화기법의 작품들로 한 지역의 가마에서 나온 것이다.
산(山) 이름을 따서 “〇〇산 분청사기”라고도 부르는 이들의 출신지는?
1) 충남 공주 2) 전북 고창 3) 광주 충효동
4) 전남 고흥 5) 경남 밀양
----
자유로움, 추상성과 현대성, 해학미 등 독특한 미감으로 여전히 많은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는 분청사기.
청자에서 백자로 이행되는 15세기에 주로 제작된 이들은 한 시대를 장식했다고 말할 수 있다. 전체적으로 세종연간에 크게 발달하고, 세조에서 세련된 모습을 보이며 성종 때부터 퇴보했다고 보면 될 듯하다. 그 이후 백자 선호 풍조로 인해 점차 쇠퇴했다.
분청사기를 공물로 바치지 않게 되자 전국의 분청사기 가마는 백자 제작으로 전환하거나 축소되었다. 이때에 제작되는 분청사기는 자유분방하고 개성적이다. 이런 특징을 잘 나타내주는 것이 공주 학봉리, 계룡산 자락의 가마에서 나온 분청사기, 특히 백토분장 위에 철화안료로 물고기를 그린 분청사기 철화어문 병이 대표적이다.
계룡산 분청사기, 즉 1) 충남 공주가 정담.
20세기 전반기, 조선에는 분청사기 개념이 희박했다. 일본사람들이 좋아하던 ‘미시마’ 도자가 있었고, 도굴꾼들의 보물찾기 대상이었을 뿐이다. 일제는 1920년대부터 조선 땅에 있는 유물들을 조사하는 대대적인 작업을 벌여나갔고, 가마터도 그 대상 중 하나였다.
1927년 조선총독부 주관하에 계룡산 학봉리 도요지가 처음 조사되기 시작했다. 이전부터 도굴꾼들이 도자 조각들을 가져다 일본으로 내다 팔고있던 상황. 가마 유적은 도굴로 심각하게 훼손되었으나 동학사 계곡, 학봉천 중심으로 비교적 온전하게 남아있던 곳을 중심으로 해서 조사를 벌여나갔다.
1927년 학봉리 5호가마에서 출토된 분청사기 철화어문접시 조각
고유섭 선생에 의해 ‘분청사기’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도 1930년대의 일. 이후 분청사기 붐이 다시 일어난 것은 1980년대에 국립중앙박물관을 비롯한 여러 기관에서 분청사기 특별전을 열면서다. 이때 공주지역 도요지 조사를 본격적으로 하게 되면서 계룡산 분청사기의 실제가 조금씩 드러났다. 개발이 한창이던 때 보호를 위해 계룡산 학봉리 도요지가 1990년 사적으로 지정되기도 하고, 1992년 동학사 진입로 공사 때문에 서둘러 국립 박물관과 호암미술관이 공동으로 정밀 발굴 조사를 실시했다. 이때는 가마의 구조, 철화 분청사기의 제작 수법, 시기, 수요공급 파악 등을 목적으로 했다.
계룡산에서 철화기법만 많이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학봉리 유적에서는 조선초기의 회청사기, 상감분청, 인화분청, 역박지분청, 조화분청, 철화분청, 백자, 흑유기물 등 여러 종류가 출토됐다. 계룡산 학봉리의 가마들은 15세기 초반의 양식으로부터 16세기 전반기 양식까지 조선전기 분청사기의 변천과정을 모두 포함하고 있고, 철화분청은 출토품 전체 분량에서 13% 정도라 학봉리 도자기 전체로 볼 때 주류를 이루는 것은 아니지만 다른 지역에 비해서는 매우 큰 비중이고(다른 곳은 거의 예가 없고), 철화분청이 다른 분청사기에 비하여 사랑을 많이 받기 때문에 계룡산 분청사기, 하면 산화철로 멋지게 그림을 그린 분청이 대명사처럼 받아들여지게 됐다.
계룡산에서는 1487년, 1490년, 1536년 등의 제작연도를 포함한 철화기법의 묘지편이 나와서 철화기법이 자잘한 무늬 도장을 가득 찍는 인화기법이나 상감기법보다는 다소 늦은 15세기 후반경에 발전하여 16세기 전반경까지 계속되었다는 편년의 기준을 만들어주기도 했다.
상감, 인화, 조화, 박지 기법의 분청사기들
무등산 분청사기 전시 포스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