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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딜러, 미술사를 바꾸다] 소호 화랑 씬의 주역, 일리나 소나벤드

일리나 소나벤드(Ileana Sonnabend, 1914~2007)
첫남편 레오 카스텔리와 함께 70~80년대 강력했던 현대미술 딜러로 활동.
소호를 글로벌 현대미술의 중심가로 만들었다. 브로드웨이 420번가 소호에 소나벤드 갤러리 운영.
팝, 미니멀 등 전후 미국미술을 유럽에 소개하고 미국 현대미술 발전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됐다. 5개 국어로 자신의 생각을 말할 수 있었던 그녀는 고상하고 거만한 유럽식 태도와 보헤미안적인 태도를 동시에 보여 '아이언 마시멜로'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앤디 워홀 <일리나 소나벤드> 1973, 캔버스에 아크릴릭, 실크 스크린 잉크, 101.6x203.2cm, 소나벤드 컬렉션


주요 화가들
60~70년대에는 앤디 워홀, 로이 리히텐슈타인, 짐 다인, 제임스 로젠퀴스트, 클레즈 올덴버그, 도널드 저드, 로버트 모리스 등을 유럽에 소개하는 역할을 했다. 
80년대에는 A.R. 펭크, 조르주 바젤리츠를 뉴욕에 데뷔. 네오지오 그룹, 제프 쿤스 등을 발굴했다. 


일리나는 1914년 루마니아 부쿠레슈티에서 유태인 사업가 미하일 샤피라의 딸로 태어나 부유한 환경에서 자랐다. 열일곱 살에 카스텔리를 만나 1년 후에 결혼, 약혼반지 대신 마티스의 그림을 달라고 해서 받았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파리에서 초현실주의 그룹들과 친하게 지내다가 아버지의 도움으로 카스텔리와 함께 갤러리를 열었고, 이후 2차대전 때 남편과 딸과 함께 미국으로 피신해 맨해튼에 살면서 프라이빗 딜링을 시작했다. 

1959년 레오 카스텔리와 이혼한 이후에 폴란드 출신의 마이클 소나벤드와 결혼했다. 로마와 파리 등지에서 살았는데, 부부는 1962년 그랑 오귀스탱 강변에 작은 갤러리를 시작하게 된다. 

“파리에 갤러리를 열기 딱 좋은 시기였다. 유럽 사람들은 에꼴 드 파리의 마지막 흐름의 지루함을 물리쳐 줄 그 무언가 새로운 것을 찾고 있었다. 아무도 방향을 찾지 못하고 있었는데 유럽 딜러들은 미국에서 온 작품들을 보여줄 위험을 감수하려 하지 않았다.”

파리에서 소나벤드 부부는 현지의 미국미술에 대한 인식을 변화시키는 일을 해낸다. 재스퍼 존스를 시작으로 해서 워홀, 리히텐슈타인, 올덴버그, 저드, 로버트 모리스 등을 소개했다. 반응은 아주 좋았지만 그만큼 큰 저항도 있었다. 그녀의 회고에는 한 프랑스 저널리스트는 화가 나서 작품 앞에서 우산을 흔들기도 했고, 앤디 워홀의 마릴린 그림을 설치하는 것을 본 건물주가 “이것은 예술이 아니라 시체성애증”이라며 전시를 하지 말라고 우기기도 했다고 쓰여 있다. 

파리의 갤러리에는 당시 문화부 장관이었던 앙드레 말로, 시인 앙드레 브르통과 초현실주의자들이 많이 들렀다. 말로는 그렇지 않았지만 브르통은 그녀가 소개하는 작품들을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유럽의 화가들은 새로운 미국미술에 강하게 끌렸고, 아르망, 레이스, 팅겔리 등은 그들의 새로운 리얼리티의 미국적 전형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1971년에 뉴욕에서 소나벤드 갤러리를 열고, 점차 무게중심이 이동하기 시작한다. 첫 번째 뉴욕 전시인 “길버트 & 조지”를 시작으로 그녀는 제프 쿤스, 비토 아콘치 등의 미국 작가를 전시했다. 크리스토, 조르주 바젤리츠 등 유럽 미술가들을 미국에 소개하는 일도 겸했다. 유럽과 미국,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을 섞어 소개한 셈. 그녀의 파리 갤러리는 80년대까지 운영했다. 

카스텔리 갤러리 건너편에 있던 소나벤드 갤러리가 웨스트 브로드웨이 같은 건물에서 각각 갤러리를 운영하게 되면서 소호 갤러리 씬의 도래를 알리게 됐다. 일리나와 레오 카스텔리는 자주 식사도 하고 의견도 나누고, 때로는 전시를 공동 주최하기도 했다. 카스텔리-소나벤드 필름 앤 테이프라는 회사를 만들기도 했다. 

그녀의 장점은 ‘대담함’. 그 점에서는 일리나가 레오를 넘어선다는 평가를 받는다. 미국의 포스트 미니멀리스트들에게 많은 기회를 준 딜러였다. 대담함으로 악명높은 전시로는 아콘치의 “Seedbed”가 있다. 여기서 비토 아콘치는 2주간 자위행위를 했다. 작가가 이렇게 해야 한다고 했을 때 소나벤드는 “당신은 해야 하는 일들을 하세요.(You do what you have to do.)”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비토 아콘치, Seedbed



80년대의 일리나는 독일 화가인 A.R. 펭크, 외그르 이멘도르프, 조르주 바젤리츠를 뉴욕에 데뷔시켰고, 애쉴리 비커튼, 피터 헤일리, 제프 쿤스 같은 아티스트를 담당하기도 했다. 

그녀는 트렌드를 믿지 않으며, 팝, 미니멀, 개념미술 같은 라벨로 작가들을 묶는 것은 학문이거나 작가를 열거하지 않기 위한 편한 길일 뿐이라고 말했다. 그녀는 신진 작가의 커리어를 도우려고 할 때 어떤 전시에 그를 포함시킬지 주의를 기울였다. 쉽게 전속 화랑을 만들지 말라고 충고하며, 빨리 무언가에 도달하려고 조바심내는 것이 위험하다고 강조한다. 자기 작품 세계의 본질에 도달하기 전에 화랑의 압력을 받게 되어 진실된 성장을 하는 것을 방해받는다는 것이다. 

그녀는 딜러가 한 때 기획자였으니 지금은 화랑이 화가의 상업적 전초기지에 지나지 않게 되었음을 아쉬워했다. 70년대에 자신들이 화가를 프로모션하러 다녔다면 80년대에는 작품을 팔러 다녔고, 근래에는 작가가 자기 자신을 팔게 되었다는 것이다. 

90년대 많은 작가들이 소호를 떠나고 카스텔리의 갤러리도 명성을 잃어갔으나, 소나벤드는 도전을 계속했다. 그녀와 양자인 호멤은 2000년 봄 소호를 떠나 첼시로 이동해 갤러리를 열었다. 

2007년 92세의 나이로 사망했을 때 그녀의 자산가치는 8억 7,600만 달러였다. 전후예술 컬렉션 중 일부를 6억 달러에 매각해 청구된 4억 7,100만 달러를 해결했다. 당시 역사상 가장 컸던 개인 판매 기록이다. 

방대했던 그녀의 컬렉션 중에는 제프 쿤스의 Rabbit(1986),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Eddie Diptych(1962), 사이 톰블리의 Blue Room(1957), 앤디 워홀의 Silver Disaster(전기 의자,  1963), 워홀의 Four Marilyns(1962)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제프 쿤스Jeff Koons, Rabbit (1986)



2011년 구겐하임에서 《일리나 소나벤드: 이탈리아인의 초상》이라는 제목으로 그녀의 컬렉션을 전시했고, 2014년 뉴욕 MoMA에서 《일리나 소나벤드: 새로움을 위한 앰배서더》 전시를 열어 그녀가 남긴 것들에 대해 경의를 표하기도 했다. 로버트 라우셴버그, 재스퍼 존스, 앤디 워홀 등 40여 명의 유명 작가들 작품이 포함됐다. 


업데이트 2023.03.06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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