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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딜러, 미술사를 바꾸다] 베티 파슨스 : 뉴욕 스쿨을 이끌어낸 선구자

2차 세계대전 이후 현대미술의 중심이 미국으로 넘어오면서 모더니즘을 중심으로 한 미술사의 흐름이 펼쳐졌는데, 이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은 화가를 발굴하여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그림을 팔았던 화상畵商, 아트딜러들이다. 그들의 활동을 들여다보면 그 아트딜러들이 없었다면 현대미술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화가들이 사람들의 환호를 받을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게 된다. 그렇게 보면 현대미술의 역사를 그 아트딜러들이 이끌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세기 후반, 그 아트딜러들이 어떤 화가들을 발굴하고 어떻게 활동했는지 그들의 활동을 인물 중심으로 살펴본다.

베티 파슨스Betty Parsons 1900~1982
화랑 : 뉴욕, 게티 파슨스 갤러리Betty Parsons Gallery, New York
       15 E. 57th St. 나중에 이전한 위치는 24 W. 57th St.
       




대표 업적 : 잭슨 폴록을 비롯한 수많은 추상표현주의 화가들 소개. 
주요 경력 :
1940-44 웨이크필드 북샵 갤러리, 관장
1944-46 모티머 브랜트 갤러리, 컨템퍼러리 섹션 관장
1946년  57번가에 베티 파슨스 갤러리 오픈. 
* 1983년 갤러리 폐관.



베티 파슨스는 1946년 자신의 이름으로 갤러리를 오픈하고서 애드 라인하르트, 아돌프 고틀립 등 한 사람씩 젊은 작가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어느날 저녁 식사 자리에서 그녀는 바넷 뉴먼을 소개 받았고 이어서 뉴먼의 소개로 잭슨 폴록을 만나게 된다. 

잭슨 폴록은 당시 페기 구겐하임이 유럽으로 가게 되어 자신을 뒷받침해 줄 새로운 갤러리를 찾고 있었다. 베티의 말에 의하면 페기 구겐하임은 “작품을 수집하는 데는 많은 관심이 있었지만 작품 판매 비즈니스에는 재능이 없었다.” 작가들은 자신의 작품을 널리 알리고 판매해 줄 딜러를 필요로 하기에 잭슨 폴록은 페기에게서 지원금을 받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가 없었다. 



베티파슨스 갤러리에 앉아 있는 바넷 뉴먼, 잭슨 폴록, 토니 스미스(1951). 사진 Hans Namuth


 
베티 파슨스는 폴록을 맡은 첫해 그의 작품을 팔지 못했다. 자신의 책임이 되었으니 폴록에게 지원금을 준 페기 구겐하임쪽에 돈을 지불해야 했다. 1947년 폴록에게 첫 개인전을 열어 준 이후 고객들이 생기게 되고, 이어서 로스코, 스틸, 라인하르트 등의 개인전을 열면서 고객을 넓혀갔다. 당시 뉴욕에는 15개 정도의 화랑이 있었다. (2019년 말의 자료에 따르면 뉴욕시에 1,500여 개의 갤러리가 있다.) 그중 컨템퍼러리 화가를 다루는 곳이 서너 곳에 불과했다는 사실은 그녀가 추상표현주의 화가들의 약진에 얼마나 중요한 발판이 되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그 당시 컨템퍼러리를 소개하던 뉴욕의 아트 딜러로는 매리언 윌러드Marian Willard가 있었고, 드쿠닝de Kooning과 프란츠 클라인Franz Kline을 소개한 아트 딜러 찰리 이건Charlie Egan 정도가 있었다. 드쿠닝과 클라인을 제외한 나머지 대부분의 추상 화가들은 파슨스가 소개했다. 베티 파슨스 이전에 구겐하임은 자신의 갤러리에서 폴록, 로스코, 스틸 등의 화가를 그룹전으로 보여주었으나 그 이후는 대부분 파슨스의 갤러리를 거쳤다. 이 외에 화상을 겸했던 스티글리츠가 오키프O’Keeffe 등을 소개했다. 



베티 파슨스 갤러리




바넷 뉴먼과 베티 파슨스




“갤러리의 벽을 희게 칠한 것은 내가 최초다.”
이전의 갤러리들은 빅토리아 시대의 인테리어에 벽은 벨벳 소재의 벽지로 도배해 고급스럽게 보이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갤러리 벽을 아무 무늬 없이 희게 칠하여 작품을 돋보이게 한 것은 파슨스가 최초이고 그것으로 유명하다. 그것은 파슨스가 주로 다루던 그림들이 추상표현주의 회화였다는 점 때문이기도 했다. 잭슨 폴록 그림을 자잘한 무늬가 있거나 윤기있는 천을 배경으로 걸어놓는다면 절대 돋보일 수가 없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파슨스 갤러리는 벽 뿐만 아니라 최소한의 의자만 빼놓고는 어떤 가구도 전시장 안에 들여놓지 않았다. 가능한한 심플한 배경을 만들어주고자 한 그녀의 아이디어는 대 성공을 거두게 된다. 


새로운 것, 다양한 것, 그 중에서 좋은 것을 고르는 안목
베티 파슨스는 1900년 1월 31일, 뉴욕시에서 베티 비어니 피어슨Betty Bierne Pierson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부유한 어린 시절을 보냈고 10살부터 5년간만 공교육을 받았는데, 상류층 학생들이 다니던 Chapin School이었다. 이때의 동문들이 평생 그녀의 후원자가 된다. 1920년 봄 뉴욕의 명문가 파슨스와 결혼하여 파리여행을 갔다가 이혼하고 파리에 눌러 앉아 회화와 조각을 공부하게 된다. 평생 파슨스라는 남편의 성을 유지했다.

자신이 추상 화가-조각가이기도 했던 베티는 1933년 재정 상황이 나빠져 미국으로 돌아왔다. 서부 여행에 갔다가 돌아와 자신의 수채화를 한 갤러리에서 전시하며 뉴욕의 미술계와 첫발을 딛게 됐다. 생계를 걱정하는 베티에게 일자리를 제안, 작품을 전시하고 커미션 주문을 받기도 하며 갤러리에서 일하게 된다. 30대 중반의 나이에 아트딜러로 첫 경력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1940년 웨이크필드Wakefield 서점 지하창고에 갤러리를 운영해 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이 들어와 그곳을 운영하며 베티는 화가의 재능을 알아보는 자신의 재능을 깨닫게 된다. 이 때 애드 라인하르트 등을 소개했고 생계로 이 일을 해야겠다는, 화상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2~3년 간 일하고 나서 거장을 주로 다루는 모티머 브랜트Mortimer Brandt에 전후 컨템퍼러리 섹션을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고 공간 전체를 넘겨 받는다. 베티가 반을 사용하여 떠오르는 작가들을 소개하고 나며지는 피카소와 유럽 모던 작가들을 담당한 샘 쿠츠가 담당했다. 

베티 파슨스는 1946년 자신의 이름을 건 베티 파슨스 갤러리를 열었다. 이때 바넷 뉴먼과 잭슨 폴록을 만나고 1947년 베티 파슨스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여는 등 로스코, 스틸, 라인하르트, 톰린 등 많은 미국 작가들의 등용문이 돼 주었다. 

당시 많은 컬렉터들은 19세기 프랑스 미술에 관심 많은 사람들이 지배적이었고, 미국 미술을 소개하던 갤러리들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미국 현대미술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었고 어차피 19세기 프랑스 화가 시장은 포화상태였기 때문에 시장을 움직일 필요를 주장했다. 


(위) 웨이크필드 갤러리(1944). 베티파슨스 갤러리 엽서(1946), 애드 라인하르트, 바넷 뉴먼, 윌리엄 콘돈, 베티 파슨스 등(1960경)
(아래) 베티 파슨스 갤러리의 Northwest Coast Indian Painting 전(1946) 카탈로그 표지, 파슨스와 Agnes Martin, <잭슨 폴록: 최신 회화> 전(1948) 포스터



그녀는 회고록에서 미술평론가나 미술사학자, 작품을 구매하지 않는 미술관 등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그들은 사학자들이다. 미술사를 알고 있고 모두 아름다운 글을 쓴다. 그러나 새로운 것을 보면 바로 그것을 역사 맥락 안에 집어넣으려고만 한다. 그러나 어떤 것들은 단순히 역사 속으로 넣을 수 없다. 새로운 작가의 새로운 작품은 역사가 아니라 현재다. 적어도 당분간 그대로 놔두고 카테고리에 넣기 전에 충분히 삶 속에 들어오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MoMA 관장 알프레드 바Alfred H. Barr, Jr.(1902-1981)는 베티 파슨스가 하는 일들을 좋아해 주었다. 알프레드 바가 그녀에게 로스코 작품을 한 점 구입해 미술관에 들여오도록 한 일도 있다. 베티는 당시 이사회의 승인이 어려워 4년간 전시를 하지 못하다 후에야 벽에 걸 수 있게 되었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베티는 알프레드 바나 도로시 밀러 같은 사람들이 로스코에 집착하지 않았다면 자신이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당시에도 투자의 관점에서 미술품을 보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베티는 미술을 부동산처럼 투자처로 보는 수집가들이 늘어나는 현상에 대해 간파하고 있었다. 화상의 입장에서 미술품을 사는 사람들이 좋기야 하겠지만 그녀는 “사랑해서 작품을 사는 고객들”을 가장 좋아한다고 단언했다. 그가 생각했을 때 가장 멋진 컬렉터로 워싱턴 필립스 갤러리의 던컨 필립스를 꼽았다. 그의 미술에 대한 호기심과 공부 열정을 높이 평가했다. 

“다양함 만세 Vive la différence”
그녀는 유행, 이즘, 유사성, 용어를 극도로 싫어하고 유행하던 팝아트 옵아트 같은 것들은 거들떠 보지 않았다. 클리셰나 반복적 이미지를 피하고 창조적인 것, 새로운 것, 사람들이 쉽게 카테고리화 할 수 없는 것에 매력을 느꼈다. 

아무도 찾지 않아 어렵게 작업을 하던 작가들을 데려와 큰 성공을 거두곤 하던 그녀에게 사람들은 “어떻게 작품을 알아보느냐”는 질문을 했다. 그녀는 “나는 어릴 때부터 친숙하지 않은 것들을 사랑했다. 이 ‘눈’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본능은 모든 사람에게 있지만 일을 할 때는 그에 대한 신념이 중요하다.” “나는 이들 아티스트와 사랑에 빠졌다. 나는 그들이 단지 엄청나게 훌륭하다고 생각했고 그들이 훌륭하다는 것에 작은 의심도 하지 않았다.”고 말하며 “좋은 눈, 안목이란 미스테리한 것이다. 아무도 당신에게 그것을 가르쳐줄 수는 없다.”고 답했다.  





업데이트 2023.11.08 2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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