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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딜러, 미술사를 바꾸다] 시드니 재니스 : 거장 사이에 신예 끼워 넣기

시드니 재니스 Sidney Janis 1896-1989
화랑 : 뉴욕, 시드니 재니스 갤러리 Sidney Janis Gallery, New York
      15 E. 57th Street(베티 파슨스와 같은 건물)에서 개관.
      1980년대에 이전 110 West 57th St. New York, NY
      1948년 창업, 1998년 폐업

대표업적 : 윌렘 드쿠닝, 잭슨 폴록, 마크 로스코를 ‘모던’ 거장인 마티스, 피카소와 같은 대열에 올려 놓음.


주요 전시 :
<재니스의 5년 5 Years of Janis> 1953년 9월 29일 ~ 10월 29일
참여작가 : 윌렘 드 쿠닝Willem de Kooning, 알베르토 쟈코메티Alberto Giacometti, 아쉴 고르키Arshile Gorky, 잭슨 폴록Jackson Pollock
폴록, 드 쿠닝, 고르키와 같은 새로 등장한 추상표현주의 화가들을 뒤뷔페, 아르프, 피카소, 마티스, 칸딘스키 등 당시에 유럽 ‘모던’ 거장으로 인정받던 작가들과 함께 보여줌으로써 미술사 내에 추상표현주의가 확실히 주요 운동으로 자리잡도록 해 주는 역할을 했다. 
 
<신사실주의자들 The New Realists> 1962년 10월 31일 ~ 12월 31일
참여작가 : 로이 리히텐슈타인Roy Lichtenstein, 앤디 워홀Andy Warhol, 클래즈 올덴버그Claes Oldenburg, 제임스 로젠퀴스트James Rosenquist, 조지 시걸George Segal
유럽 그림과 미국 작품을 함께 배치한 최초의 대규모 팝아트 전시였다. 미국의 팝아트의 짧은 역사를 소개하면서 장 팅겔리와 이브 클랭을 포함한 유럽 누보 레알리스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방식으로 보여주었다. 시드니는 이들을 주변의 현실을 기반으로 한다는 의미에서 “팩츄얼 아티스트factual artists”라고 부르며 그들이 새로운 문화적 맥락의 일부임을 시사했다. 작품 중에는 리히텐슈타인의 냉장고, 티보의 샐러드, 샌드위치, 디저트, 워홀의 200개의 캠벨수프 캔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타임지는 수퍼마켓 문화에 매혹된 그들을 가리켜 “케이크 스쿨(Slice of Cake School)”이라고 지칭하기도 했다. 이 전시로 인해 로스코, 고틀립, 거스튼, 마더웰 등은 재니스 갤러리를 그만두었다. 



Andy Warhol, Seven Decades of Janis, 1967, Synthetic polymer paint and silkscreen ink on eight canvases, 20.6 x 20.6 cm(each), MoMA



시드니 재니스는 1896년 뉴욕 버팔로에서 영업사원의 다섯 자녀 중 하나로 태어났다. 공립고등학교를 다니다가 고3 때 자퇴, 볼룸 댄서로 살며 동부로 여행하는 등 자유롭게 살다가 1917년 해군에 입대, 제대한 후에 형과 신발 체인점을 운영했다. 뉴욕을 오가다가 1925년 음악과 미술에 열정적이던 작가 해리엇 그로스먼과 결혼했는데, 시드니와 해리엇은 함께 많은 전시를 관람했다. 

 “1924년 결혼 후 뉴욕으로 이주. 57번가에서 좋은 시간들을 보냈다. 거기에는 노들러Knoedler, 밸런타인 두덴싱Valentine Dudensing 등 열 개 남짓의 갤러리가 있었다. 입장료 없이 화랑에 들어가서 원하는 만큼 좋아하는 그림들을 보고 하는 것이 내게는 선물같은 일이었다.”

1920년대 중반에 창업한 셔츠 회사  M;Lord가 번창하면서 미술품 수집 열망이 커졌다. 부부는 매년 파리로 여행을 가서 몬드리안, 피카소, 레제, 브랑쿠지 등의 거장을 만났다. 1930년대 초반까지 그들은 피카소, 마티스, 데 키리코, 달리, 몬드리안, 앙리 루소 등의 주요 작품을 조금씩 사들였다. 뉴욕에서 시드니와 해리엇은 아실 고르키, 프레데릭 키슬러, 마르셀 뒤샹과 친하게 지냈고 이들은 부부의 아파트도 자주 방문했다. 

“아내 해리엇과 나는 1926년 수집을 시작했다. 우리가 산 첫 그림은 마티스였다. 우리는 많은 시간을 들여 몇 번이나 보고 또 보았다. 그 그림은 뭔가 호기심을 자극하는 데가 있었다. 그림을 소유하는 것은 우리 식은 아니었지만 그 그림은 우리 근처에 두고 싶다는 데 부부의 마음이 통했다.”

“1939년 파리 함락 이후 많은 유럽 아티스트들이 뉴욕으로 온 것이 뉴욕의 회화에 큰 영향을 주었다. 망명한 예술가는 최고였다. 레제, 몬드리안, 브르통, 뒤샹, 에른스트.... 그들은 사교적이고 미국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관심이 많았으며, 마더웰, 폴록, 클라인, 고르키, 드쿠닝 등 젊은 미국 작가들을 자극했다.”

1934년 MoMA의 자문위원으로 위촉되고 다음 해 1935년에는 그의 소장품 중 19점이 MoMA에서, 1936년에는 브루클린뮤지엄에서 전시됐다. 재니스는 1939년 MoMA 예술위원회 의장으로서 스페인 난민 구호를 위해 피카소의 게르니카가 뉴욕에 대여되어 올 수 있도록 돕기도 했다. 그는 1939년 의류 사업을 접고 예술에 관해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는 아내 해리엇과 함께 미국 추상미술, 초현실주의 등에 대한 책을 썼다. 조지아 오키프, 아서 B. 칼스, 만 레이, 레온 켈리, 마크 로스코, 레이 임즈와 같은 다양한 화가들을 소개했다. 
 
“나의 저서 <추상미술과 초현실주의 미술>이 1944년 드디어 출간됐다. 아직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지 못한 많은 화가의 이미지들이 포함되어 있다. 폴록 이전의 폴록, 로스코 이전의 로스코라고 부를 수 있는 작품 등이다. 1943년 로스코의 작업실에 방문했을 때 나는 책에 실을 그림 하나를 골랐는데 그의 최신 작품들과는 전혀 다른 스타일이었다. 그는 내게 ‘저를 어떤 섹션에 넣으실 건가요? 저는 초현실주의 섹션에 들어가고 싶은데요.’라고 말하기도 했다. 뒤늦게 깨달았지만 내가 고른 많은 화가들이 전성기에 도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미술에 대한 책을 쓰는 것은 수익성이 별로 없었다. 40대 후반 나는 은퇴해서 내가 정말 좋아하는 일을 하기로 결심했다. 명상과 글쓰기를 하며 10년을 보낸 후, 나는 갤러리를 열기로 결심했다.”
 
1948년, 재니스가 52세이던 해 부부가 공동으로 맨해튼에 시드니 재니스 갤러리를 설립했다(처음에는 베티 파슨스 갤러리와 건물 4층을 같이 쓰게 된다). 여기서 레제, 몬드리안, 야수주의, 미래주의, 드 스틸 등의 학구적이고 큐레이팅이 잘된 전시를 열어 명성을 얻게 된다. 1950년대 재니스 갤러리는 동시대 전위 예술의 화수분이 됐다. 1952년부터 잭슨 폴록에게 세 차례 개인전을 열어주었다. 10년 동안 갤러리는 아실 고르키, 윌렘 드 쿠닝, 프란츠 클라인, 마크 로스코, 로버트 마더웰, 필립 거스튼, 아돌프 고틀립, 윌리엄 바지오테스, 요셉 알버스를 대표하게 된다. 재니스는 추상표현주의 홍보도 했지만 팝아트를 전시한 최초의 블루칩 갤러리가 됐다. 



Willem de Kooning(1904-1997), Gotham News, 1955, oil, enamel, charcoal, and newspaper transfer on canvas, 175.26 x 200.66 cm



시드니 재니스 갤러리에서의 프란츠 클라인과 윌렘 드 쿠닝(1959년)



1962년 가을 그는 동시대 팝아트와 누보 레알레즘 운동에 대한  <신사실주의 국제전 International Exhibition of the New Realists>을 꾸몄다. 갤러리에 소속되어 있던 마더웰, 로스코, 거스튼, 고틀립은 팝아트에 자리를 내준 갤러리에 항의하며 재니스 갤러리를 떠났다. 시드니 재니스 갤러리는 곧 클래즈 올덴버그, 짐 다인, 톰 웨슬만, 조지 시걸, 오이뷘드 팔스트롬Öyvind Fahlström 등을 대표하는 팝아트의 주요 딜러가 됐다.
 


시드니 재니스갤러리 팝아트 전시 카탈로그(1974)의 톰 웨슬만 작품



재니스의 가장 큰 장점은 인정받는 거장들의 작품을 신진 화가들과 함께 전시하는 것에 있었다. 시드니 재니스는 ‘위대한 모던아트의 컨텍스트’ 안에 새로운 작가, 작품들을 배치함으로써 현대 미술에 대한 비판적 시선을 색다르게, 훌륭하고 차별적인 방식으로 집중시켰다. 그는 계속해서 자코메티, 몬드리안, 아르프, 마그리트, 뒤뷔페, 뒤샹, 레제, 피카소 등을 전시했으며 이러한 전시회 사이에 트렌드를 주도하는 동시대 화가의 개인전과 그룹전을 흩어놓았다. 
 


1980년 몬드리안 전시 포스터



수집가로서 재니스는 안목이 훌륭했다. 1967년 그는 후기 몬드리안 유화 6점, 보치오니 축구선수 다이나미즘, 피카소의 화가 및 모델 작품을 포함 103점을 MoMA에 기증했다. MoMA의 초대 이사장인 알프레드 바Alfred Barr는 이 기부가 박물관이 받은 ‘훌륭한 선물들 중에서도 비교불가의’ 것이라고 선언했다. 
 


MoMA에서의 컬렉션 전시 (1968년 1월 17일~3월 4일)



86세였던 1982년 시드니 재니스는 몬드리안+브랑쿠지라는 독특한 전시를 열었다. 1989년 말 93세의 나이로 뉴욕에서 사망했다. 화랑은 재니스의 아들 캐롤과 손자 데이빗 재니스가 이어갔다. 20세기 마지막 10년 동안 재니스 갤러리는 <몬드리안:꽃> 등 중요한 전시를 계속해서 개최했다. 
 
재니스는 미니멀리스트들에 대해서는 그들이 시대를 초월한 비전을 가졌으며 예술에서 중요한 운동의 일부라고 말하기도 했다. 일생 동안 새로운 예술과 창의성을 전폭지지하고 대중에게 소외된 당대의 예술가들을 소개할 수 있도록 노력했던 것이다. 

업데이트 2023.11.08 2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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