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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딜러, 미술사를 바꾸다] 티보 드 나기 : 화가와 시인들의 아지트, 드 나기 갤러리

티보 드 나기Tibor de Nagy(1908-1993)
헝가리 출생


 
* 티보 드 나기 갤러리 개요 
1950년, 티보 드 나기와 존 버나드 마이어스John Bernard Myers가 이스트 50번지에 설립
칼 안드레Carl Andre, 미국의 2세대 추상표현주의 작가들이라고 묶여지는 헬렌 프랑켄탈러Helen Frankenthaler, 케네스 놀런드Kenneth Noland, 래리 리버스Larry Rivers 등을 알리는 역할을 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추상표현주의가 여러 분파로 나뉘면서 미국 내의 사실주의 성향을 띤 작가들이 부활하는 데 힘을 실었다. 드 나기 갤러리가 중요한 점은 시각예술가들과 시인들을 한 자리에 모으는 장소로 수 년에 걸쳐 유명했다는 것이다. 1950년에 설립된 티보 드 나기 갤러리는 1993년 티보 드 나기가 세상을 떠난 후 갤러리에서 일하던 앤드류 아르노Andrew Arnot가 인수해 현재도 영업 중이다. 

* 드 나기 갤러리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던 작가들
Carl Andre, Helen Frankenthaler, Jane Freilicher, Red Grooms, Grace Hartigan, Alfred Leslie, Fairfield Porter, Larry Rivers
시인과 예술가 간의 협력을 육성, 뉴욕 스쿨 시인인 John Ashbery, Frank O'Hara, Kenneth Koch, James Schuyler의 시를 최초로 간행

티보 드 나기는 2차대전 이후 미국으로 망명한 헝가리 은행가였다. 그 때의 나이가 40 전후. 
헝가리에서 그의 아버지는 모던아트를 좋아하는 컬렉터여서 어린 티보를 부다페스트의 갤러리에 종종 데려가 자신이 사려고 하는 그림을 맞혀보게 한다든가 하여 어린 아들의 그림에 대한 눈을 틔워주었다. 

경제학을 전공했던 티보는 22살 때 부다페스트에 있는 헝가리 국립은행에서 일하면서 처음 미술품 수집을 시작하게 된다. 동시대 미술을 모으던 아버지와 달리 당시의 그는 네덜란드 거장, 17, 18세기 이탈리아 올드마스터 등의 작품을 사기 시작한다. 그가 모은 수집품들은 2차 세계대전 중 공습으로 모두 파괴됐다고 한다. 

1946년 전쟁이 끝난 후 헝가리에서 은행 시스템 재건 일을 하던 그는 소련 비밀경찰에 체포됐다. 풀려난 후 그는 헝가리를 떠나 보석을 판 돈을 움켜쥐고 탈출해 먼저 미국으로 건너가 있던 아내와 딸과 만나 뉴욕에 정착했다. 그것이 1948년의 일이다. 

갤러리의 동업자 존 버나드 마이어스를 처음 만났을 때, 티보는 뉴욕 월드뱅크에서 일하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마이어스는 한 인형극(마리오네트) 회사에 투자하라고 동안 드 나기를 설득했다. 그 마리오네트 회사는 보통 회사가 아니었고, 잭슨 폴록, 윌렘 드쿠닝, 프란츠 클라인이 연관되어 있었고, 유명 작곡가와 인형제작자가 참여했다. 폴록이 깎은 나무 인형도 있었는데 그것은 없어졌다고 한다. 

마이어스와 드 나기는 함께 “티보 드 나기 마리오넷 컴퍼니”를 시작했다(미국에 합법적으로 남아있기 위해 드 나기는 그의 이름을 딴 사업이 필요했다). 뉴욕 주변의 학교 등에서 공연하다가 회사는 곧 문을 닫았지만 둘은 협력을 계속하기로 한다. 


존 마이어스는 유명한 잡지 “View”의 아트 에디터로 발이 넓었다. 아티스트들이 마이어스와 드 나기에게 갤러리를 열라고 종용하자 두 사람은 약간의 투자를 받아 3번가에 공간을 빌리게 된다. 

마이어스는 클레멘트 그린버그, 잭슨 폴록과 리 크래스너 등 뉴욕의 많은 미술상, 비평가, 화가들과도 친했다. 몇 년 후 마이어스와 드 나기는 약간의 후원으로 1950년 티보 드 나기 갤러리를 열었다. 마이어스는 갤러리의 관장, 드 나기는 영업담당이었다. 어떤 화가의 작품들을 전시할지 처음에는 확신이 없었으나, 그린버그와 폴록이 마이어스를 부추겨 그들 세대의 아티스트를 찾으라고 촉구했다. 헬렌 프랑켄탈러, 그레이스 하티건, 알프레드 레슬리, 바넷 뉴먼, 케네스 놀런드, 그리고 래리 리버스를 발굴한다. 
1950년대는 만만한 시기가 아니어서 갤러리는 곧 어려움에 직면했지만, 시인 겸 아티스트이자 컬렉터였던 드와이트 리플리라는 후원자가 나타나 6년간 임대료를 내 주기도 했다.  

주요 전시
-1951년 래리 리버스 전
래리 리버스의 11회의 연례 개인전의 시작. 리버스의 독특한 재능을 알아본 첫 갤러리이다. 의사-추상 작품(pseudo-abstractions)이라 불리는, 잘 드러나지 않는 아이러니와 1세대 추상표현주의 작가들이 혐오했던 팝 컬처 레퍼런스의 미묘한 혼합으로 잘 알려진 리버스는 나중에 네오다다와 팝아트의 멤버가 된다.
보나르 같은 분위기도 있었지만 미국적인 느낌을 더하게 되면서 Washington Crossing the Delaware 같은 야심찬 주제로 눈길을 끌었다. 그의 작품들이 잘 팔리기 시작하며 갤러리에 돈을 가져다주는 첫 번째 작가가 됐다. 


Larry Rivers, Washington Crossing the Delaware, 1953, Oil, graphite, and charcoal on linen, 212.4 x 283.5 cm, MoMA



-1952년 페어필드 포터 개인전.
마이어스와 드쿠닝, 래리 리버스의 우정 때문에 열게 되었다. 포터 전시 이전에는 보다 추상적인 작품을 전시하는 장소로 알려졌었으나 이후 갤러리는 결국 뉴욕 아트씬에서 아메리칸 리얼리즘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 일으키는 장소로 변모했다. 


Fairfield Porter, Frank O' Hara, 1957, 162.3x116.5cm, Oil on canvas, Toledo Museum of Art


Fairfield Porter, Flowers by the Sea, 1965, Oil on board, 50.6x49.5cm, MoMA




시인과 아티스트의 놀이터
마이어스와 드 나기는 갤러리 사업으로 젊은 미국 시인들의 글을 출간하기 시작했다.  마이어스는 화가 뿐 아니라 작가, 시인들과도 친분이 있었다. 프랭크 오하라Frank O’Hara, 존 애쉬버리John Ashvery의 투란도트 등을 처음 출판했다. 화가와 시인이 함께 작업한 석판화 팜플렛 등은 오늘날 매우 귀한 자료가 된다.

1953-56년, 갤러리는 짧은 시와 산문들을 소개하는 Semi-Colon이라는 뉴스레터를 발행한다(편집: 마이어스). 마이어스는 Artist’s Theatre라고 명명한 새로운 협력 벤처를 만들고 일련의 희곡을 집필하기도 했다. 마이어스는 티보 드 나기를 단순한 갤러리 이상으로 만들어 출판사이자 무대 프로덕션 등의 프로듀서 역할을 하도록 했다. 1959년에는 시인과 화가의 작품을 모은 일종의 팜플렛인 Gallery Edition을 출간한다.


래리 리버스, Pyrography: Poem and Portrait of John Ashbery II, 1977, c Tibor de Nagy Gallery






Larry Rivers Stones 1957–60, 1960년 출판. 13점의 석판화, 1점의 종이 위 유채, 드로잉이 포함된 일러스트레이션 북. 47 x 60 cm(페이지), 56.8 x 68.5 cm(포트폴리오)



작가들과 컬렉터
티보는 1950년대 가난하지만 진심어린 분위기를 회고하면서, 1960년대 레오 카스텔리와 팝아트의 등장으로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다고 말했다. 대중성을 염두에 두고 가격을 홍보하는 미디어 팡파르 같은 것들을 싫어했던 그는 그러한 유행을 따라가지 않았다. 

작가들이 영원히 갤러리에 충성을 맹세하지는 않는다. 티보는 작가들이 갤러리를 떠나는 아픔에 대해 얘기하곤 했다. 헬렌 프랑켄탈러 또한 드 나기 갤러리의 주요 멤버였으나, 처음으로 갤러리를 떠난 아티스트가 됐다. 그녀의 남편 로버트 마더웰이 존 마이어스와 사이가 좋지 못했던 탓도 있다고 전해진다. 


헬렌 프랑켄탈러 (1956)



케네스 놀런드 또한 창립 멤버이지만 클레멘트 그린버그가 프렌치앤코 갤러리를 맡게 되었을 때 자연스럽게 자신의 친구인 클레멘트에게로 갔다. 처음부터 그린버그를 통해 놀런드를 소개 받았던 터라 이해 가능한 것이었다. 그린버그는 드 나기 갤러리의 활기를 좋아했다. 


케네스 놀런드



모마MoMA의 알프레드 바와 도로시 밀러가 한 달에 한번 드 나기 갤러리에 방문하던 시기가 있었다. 그들은 새로운 것이면 무엇이든 관심이 있었고, 록펠러 같은 거물 컬렉터에게 조언을 해주어 작품을 사도록 하기도 했다. 티보의 회고에 따르면 데이빗 록펠러가 어느 날 페어필드 포터 작품을 석 점 사서 두 점은 자신이 갖고, 하나는 쿠웨이트 통치자에게 선물로 주겠다고 했었는데, 다음날 신문에서 쿠웨이트 통치자의 사망 기사를 보게 됐다. 거래가 무산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록펠러는 평소처럼 방문해 둘러보고 석 점 모두 사서 자신이 가지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1970년, 마이어스는 갤러리 에디션 출간을 중단하고 티보 드 나기 갤러리를 떠나 웨스트 57번가에 자신의 공간을 오픈했다. 티보 드 나기는 자신의 갤러리에 1993년 사망할 때까지 남아 있었다.

티보 드 나기는 작품을 사는 고객이 개인에서 점차 기업이 되어 가는 것에 대해 우려를 남기기도 했다. 예전에는 훌륭한 컬렉션은 한 사람의 훌륭한 안목에서 나온 것들이 많다. 회사의 미술품 어드바이저들이 온전히 자기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결국 인테리어 데코레이터로 활동하게 마련이어서 윗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해, 벽에 걸 괜찮을 작품을 찾다 보면 훌륭한 컬렉션을 구축하기는 어렵다고 본 것이다. 

딜러로서 티보 드 나기는 아티스트의 성장을 보는 것에서 가장 큰 만족감을 느꼈다고 한다. 젊었을 때 작품을 살 때는 그것을 소유하고 비싼 물건들로 주변을 채울 욕망에 가득찬 모자란 사람이었으나 삶은 그 가치가 틀렸다는 것을 그에게 알려줬다. 작가의 작업 목표 공유 없이 단순히 작품을 소유한다는 것은 공허하다. 소유의 욕망은 제거되었고, 본다는 것 자체가 그에게 충분한 보상이었다. 

티보 드 나기 갤러리의 역할
1940년대~1950년대 초반 뉴욕 업타운에 문을 열었던 아트갤러리들은 대개 먼저 유럽 회화를 소개한 다음 미국 작가들을 소개하면서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티보 드 나기는 시작부터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미국 화가들과 함께함으로써 보다 새롭고 야심차게 접근한 셈이다. 추상회화로 시작해서 더 실험적인 회화로 모험을 거듭해 아메리칸 리얼리즘의 부활, 그리고 Artists’ Theatre의 본거지로서의 티보 드 나기로 자리잡았다. 모순처럼 보일지 모르나 전위예술가에게 다양한 공예적인 실험을 할 수 있도록 장소 제공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업데이트 2023.11.08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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