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렌스 루빈(Lawrence Rubin, 1933-2018)
20년간 뉴욕 노들러 앤 컴퍼니Knoedler & Company의 사장 역임
평생 프랭크 스텔라Frank Stella와 친하게 지내며 초기에 그를 발굴해 낸 것으로 유명
대표했던 주요 화가들
프랭크 스텔라, 로버트 라우셴버그Robert Rauschenberg, 리처드 디벤콘Richard Diebenkorn, 낸시 그레이브스Nancy Graves, 로버트 마더웰Robert Motherwell, 헬렌 프랑켄탈러Helen Frankenthaler 등
Frank Stella(b.1936), Them Apples, 1958, oil and nails on cardboard and wood, 127 x 53.3 cm
루빈이 워싱턴 DC 내셔널갤러리오브아트에 기증
화가와 컬렉터를 연결한, 안목을 가진 프로 갤러리스트
로렌스 루빈은 1933년 브루클린 출생, 브라운 대학교, 소르본 대학교, 콜롬비아 대학교에서 미술사 등을 공부해 기본을 닦았다. 1959년 로마의 한 갤러리에 취직하면서 갤러리 경력을 시작했다. 이후 빠르게 승진하여 파리의 초현실주의 등을 다루던 Galerie du Dragond의 파트너가 된 것을 시작으로 파리와 뉴욕 등지에서 평생 갤러리 운영자의 삶을 살게 된다.
1961년, 사업가이자 미술 수집가였던 그의 형 리처드의 후원으로 루빈은 파리에 갤러리 로렌스(Galerie Lawrence)라는 자신의 갤러리를 열었다. 같은 해에 그는 프랭크 스텔라의 첫 번째 유럽 개인전을 선보였다. 그는 1958년부터 1965년까지 스텔라의 카탈로그 레조네를 편찬하는 일에 참여하기도 했다.
파리 화랑에서 미국 미술을 소개하면서 그는 많은 한계에 부딪혔던 듯하다.
“일년에 두 번 뉴욕으로 가서 미국미술을 따라잡으려 한 달간 머무르곤 했다. (파리는)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달랐다. 1950년대 후반 사람들은 로스코, 뉴먼, 클라인을 알아볼 만큼 현명하진 않았다. 나는 1959년 클레멘트 그린버그와 만났고 그 그림들의 중요성을 알아봤다. 그린버그는 그림 크기를 키우도록 했고 내가 아는 그 누구보다 그 화가들의 작품을 드라마틱하게 분석했으며 나는 그의 방식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오늘날 그린버그에 견줄 만한 사람을 알지 못한다.”
“나는 1959년 파리에 Galerie Neufville이라는 내 자신의 갤러리를 열고 미국 화가들을 전시했다. 작은 갤러리 공간에 마더웰, 로스코, 클라인, 고틀립의 큰 캔버스들을 넣는 것은 쉽지 않았다.그해 가을 그린버그를 통해 내 관심을 끌기 시작한. 스텔라, 모리스 루이스, 놀런드, 엘스워스 켈리 등 더 젊은 미국 화가들의 작품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파리 사람들은 이 미국 화가들을 완전한 무관심으로 대했다.”
1960년대 중반, 그는 파리 화랑을 정리하고 뉴욕 이스트 91번가에 개인 갤러리를 열어 스텔라와 그의 큰형 윌리엄을 통해 만난 예술가들의 작품을 다뤘다. 큰형 윌리엄 루빈(1927-2006)은 학자, 비평가이자 큐레이터로 1970~80년대에 뉴욕 현대미술관(MoMA)의 회화 및 조각 디렉터를 지낸 바 있다. 1969년 로렌스 루빈 갤러리를 57번가에 열고 줄스 올리츠키Jules Olitski와 프리델 주바스Friedel Dzubas 등의 작가를 추가했다.
한편 1971년 유명 갤러리 노들러Knoedler를 사들인 석유재벌 아먼드 해머Armand Hammer는 재정 상황이 계속 어려워지면서 새로운 운영자를 찾고 있었다. 그는 1973년 로렌스 루빈을 설득해 노들러에서 일하도록 했다. 루빈은 이번에도 곧 갤러리 대표가 되었고 수익성이 있을 만한 1950년대 및 컨템퍼러리 미술을 발굴해 많은 작품을 전시해 갤러리의 재정 상태를 호전시켰다.
“노들러에서 일한다는 생각이 나의 흥미를 이끌었다. 나는 해머를 좋아했고, 그곳에서 일해도 자유로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많은 돈을 쓸 수 있게 된 것이 좋았다. 레제, 미로, 피카소 같은 20세기 초기 작품들을 다룰 수 있게 된 것이다. 나는 그 작가들을 미국 전후 작가들과 동시에 보여주고 싶었다....노들러는 더 많은 융합의 기회를 가져왔다. 나와 거래하던 컬렉터 대부분이 나를 따라 노들러로 옮겨왔다.”
스텔라, 디벤콘 및 라우셴버그 등 이전에 그가 대행했던 추상 표현주의자들을 주로 다뤘고, 20년 동안 일한 후 1994년 은퇴해 남은 여생을 유럽에서 보냈다. 어쩌다 그의 아들 제임스가 운영하는 밀라노의 갤러리를 상담해 주기도 했다.
그는 딜러로서 어떻게 예술과 작가를 대해야 할지에 대한 확실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딜러는 판단이 중요하다. 나는 컬렉터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데 어떤 이들은 나에게 의존하며 또 어떤 이들은 확실한 방향을 제시하기도 한다. 나는 항상 새로운 화가들을 찾아다니긴 했으나 그것을 최우선으로 여기지는 않았다. 젊은 아티스트들이 성공을 거뒀다가 일 년 후 작업이 마음에 안 들게 되는 일을 가장 싫어한다. 나는 작가 선택에 좀더 까다롭고 느리다. 내 아티스트들과 몇 년이고 함께 하고 싶기 때문이다. 가능한 한 컬렉터들에게 길게 소개해 줄 수 있었으면 했던 것이다.
재능있는 젊은 작가를 만났을 때 처음 해야할 질문은 ‘나와 계속 함께 할 수 있을까’이다. 그는 계속 나아가고 발전할까. 대개의 경우 답은 No이다. 나는 물러나 앉아 몇 년간 그 작가의 작업을 지켜본다. 여러 작가들에게 갤러리에 오라고 제안하는 대신 몇 년이 걸리든 내가 원하는 한 사람에게 달라붙는다.
나는 1962년 처음 리차드 디벤콘Richard Diebenkorn의 전시를 보고 나서 5년 후 여행에서 만났을 때에야 갤러리에 합류하자고 요청했다. 그는 대답을 하지 않았고 몇 달 후 말보로 갤러리로 갔다. 5년 전에야(1970년 말) 디벤콘은 자유로워졌고 나는 다시 제안했다. 나는 그 이후 그의 작품을 소개해 왔다.”
그는 미술품 컬렉터들에게 의미있는 조언들을 남겼다.
“새내기 컬렉터들은 미술관의 작품들을 열심히 보고 지식을 얻는 것으로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나서 갤러리들을 돌며 그림들을 둘러보고, 작품 하나를 사기 전에 되도록 모든 그림들을 봐야 한다. 회화 작품에 관심있는 컬렉터라면 판화로 시작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본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어떤 작품을 사기 전에 1년은, 솔직하게 말해 3년 정도 기다리고 지켜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불행하게도 사람들이 미술품에 몰린다는 생각이 들면 조바심이 나서 대개 기다리지를 못한다.”
“나는 안목을 기르는 데 미술관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학생이든 컬렉터든 미술관에 감으로써만 좋은 회화가 무엇인지를 배울 수 있다. 운좋게도 뉴욕에 있는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가르침을 얻을 수 있다. MoMA 등에서.”
“아트딜러들의 일은 경매시장의 영향을 받긴 하나 경매에서는 현장감 있는 작품들을 다루기는 어렵기 때문에 생존 화가들을 다룰 때는 별 위협이 되지 않는다. 경매 회사들은 딜러의 영역에 있던 작품들을 열정적으로 가져간다. 딜러에게도 리세일은 중요한 부분이지만 경매회사들의 비즈니스로 그 부분은 점차 줄어들어 왔다. 내가 커리어를 시작했을 때만 해도 오래된 작품들을 다루면서 살아남았지만 요즘 같이 옥션에 집중되어 있다면 그 작품들이 내 손에 들어오게 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컬렉터들은 옥션의 안목에 좀더 믿음을 가진다. 그러나 옥션에서는 프리뷰 며칠 동안만 작품을 볼 수 있는 반면 대부분의 딜러들은 컬렉터가 가져가서 볼 수 있도록 해주기도 한다. 그런 방식을 통해 작품 구매에 더 많은 지식을 쌓을 기회를 준다. 새내기 컬렉터에게는 경매에서 작품을 사는 방식이 더 무모한 것이다.”
노들러 갤러리에서 1979년 펴낸 리처드 디벤콘 도록. 로렌스 루빈 저.
노들러 갤러리
노들러 갤러리의 모태는 프랑스 딜러 Goupil이 1846년 뉴욕에 설립했던 지사다. 프랑스 본사에서 일하던 미셸 뇌들러Michel Knoedler(1823–1878)가 1852년 뉴욕 지사를 맡았고 1857년 직접 이를 사들여 노들러 갤러리를 설립했다. 미셸 사후 아들 롤런드가 이어받았고, 1928년에 Carmen Mesmore 등이, 1956년 E. Coe Kerr와 Roland Balay(뇌들러의 손자)가 이어받았다. 1971년 기업가이자 수집가인 아먼드 해머Armand Hammer에게 250만 달러에 매각되었다. 1990년 해머가 사망하고 위작 스캔들 이후 2011년 폐업할 때까지 아먼드 해머의 손자가 회장인 Hammer 재단의 소유였다.
노들러 갤러리는 뉴욕에 설립된 이후 갤러리 이상의 역할을 해냈다. 뉴욕의 주요 미술관보다도 먼저 예술 현장의 전방에서 역할을 했던 것(메트로폴리탄은 1872년 오픈). 당시 노들러 갤러리의 탁월함은 드가, 마네부터 동시대 미술까지 다 다뤘다는 것이다.
해머는 노들러의 운영자로 로렌스 루빈이라는 안목을 가진, 미술계와 연결고리가 많은 인물을 고용함으로써 다시금 황금기를 이끌어냈다. 루빈은 작가나 컬렉터와 좋은 관계를 맺고 있었지만 작품 판매에 있어서는 앤 프리드먼(Ann Freedman, 1949-)이라는 젊고 야심찬 조수에게 맡기는 경향이 있었다.
앤 프리드먼은 부동산회사 중역의 딸로, 세인트루이스의 워싱턴 대학에서 회화를 전공, 노들러의 라이벌인 안드레 에머리히 갤러리에서 접수처 직원으로 일하다가 1977년 노들러에 입사했다. 루빈만큼 전문성이 있지는 않았으나 판매를 잘했다. 1980년대에 그녀와 함께 일했던 Will Ameringer는 “그녀라면 눈을 에스키모에게 팔 수 있었다. 전시장에 들어온 손님은 그림을 사지 않고는 나갈 수가 없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상한 조합이었지만 루빈과 프리드먼은 1994년까지는 함께 잘해냈다. 루빈이 떠나기로 하고. 갤러리를 프리드먼과 도널드 새프Donald Saff(로버트 라우셴버그,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저자) 두 명이 공동 운영하는 것으로 정해두었다. 프리드먼이 영업을 담당할 것으로 생각한 것. 이 소식을 들은 프리드먼은 분노했다. 1991년 할아버지에 이어 노들러를 이어받은 마이클 해머와 면담하고 담판을 지으면서 프리드먼 단독 디렉터로 임명받아 혼자 운영할 수 있게 됐다.
루빈이 떠나고 나서 얼마 후, 잘 차려입은 40세의 글라피라 로잘레스Glafira Rosales라는 여인이 노들러를 방문했고, 익명의 소장가가 가지고 있다는 로스코의 작품을 가져 왔고, 이를 진짜로 여긴 프리드먼은 1994년부터 20년간 60여 점의 위작을 판매하는 희대의 사건 주인공이 되었으며 결국 165년 역사의 관록있는 갤러리를 폐업하게 만든다. (자세한 내용은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당신의 눈을 속이다 : 세기의 미술품 위조 사건 Made You Look: A True Story About Fake Art>(2020) 참조.)
노들러갤러리 스캔들 다큐멘터리에 등장하는 앤 프리드먼
딜러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던 로렌스 루빈. 그가 떠난 후 프리드먼이 저지른 일을 알았다면 어떤 마음이었을까 생각하게 된다.
“나는 언제나 초기 프랑스 딜러들, 즉 피카소, 브라크, 레제 위대한 예술가들을 발굴하고 후원한 볼라르, 칸바일러 같은 사람들처럼 되고자 하는 꿈을 꾼다. 그러나 나의 개인적 이미지를 세우는 데에 대한 관심은 없다. 결국 중요한 것은 작가이지 딜러가 아니다. 명성을 가지고 아티스트와 경쟁하느니 갤러리에 빠져 죽는 게 낫다....오늘날 노들러 갤러리를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보다는 20년 후에 어떻게 생각할지에 관심이 있다. 돌아보았을 때 이 갤러리가 최고였다고 말할 수 있는. 그리고 어떤 질을 담보하는. 수작업의 의미가 축소되어 거의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서도 그것만이 의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