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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 발길을 따라서 그들의 그림을 만나다

-화가들의 눈을 통해 펼쳐진 금강산

이태호, 이영수, 『금강산을 그리다』, 마로니에북스, 2023.11.

마음만 먹으면(그리고 경제적 뒷받침만 있다면) 알프스든 사하라든 어떤 스펙터클도 내 눈에 담을 수 있는 세상이 되었지만, 아름답고 신비하다는 ‘금강산 일만이천봉’만은 한국인에게는 특히 가장 먼 곳이다. 우리에겐 겸재 정선이나 단원 김홍도의 그림이 더 익숙할 따름으로 그 정도의 시각 정보와 빈약한 상상력만으로는 금강산의 본 모습을 재구성해 파악하기가 어렵다. 수많은 칭송의 기록과 운 좋게 본 몇몇 그림으로 금강산을 상상하던 옛날 사람들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상태의 독자들. 저자는 등산로를 따라 이들을 명승지로 이끌면서 조선시대 화가들의 이 경관을 어떻게 그렸는지 설명해 주려한다.

내금강, 외금강, 해금강 세 곳의 영역은 곧 챕터가 되고 장안사, 삼불암, 표훈사, 정양사, 만폭동, 만물초, 삼선암, 옥류동, 구룡폭포 등의 이름난 장소들이 하나씩 꼭지를 구성하고 있다. 각 꼭지는 명승으로 가는 길목과 인간의 흔적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며 여기에는 낯선 봉우리와 연못 이름들, 스님 이름이 연속으로 등장해 따라가기가 벅차다. 장면과 관련된 그림과 맥락, 화가에 대한 이야기들이 뒤를 따른다.


"만폭동의 금강대 앞에서 내팔담 쪽으로 가지 않고 왼쪽으로 갈라진 가섭동 쪽 계곡을 따라 들어서면 원통동과 수미동이 나온다. 이전에는 개방되지 않은 만폭동과 정양사의 북쪽 사잇길이다. 원통동에는 청호연, 용곡담 등의 명소가 있고 수미동에는 칠곡암, 수미암 터와 수미탑 등이 있다. 수미동은 백탑동과 마찬가지로 기암괴석과 자연 돌탑으로 가득 차 있다. 그중에서 가장 큰 것이 수미탑이다." (책 164쪽)


傳 김홍도 <문탑>《해산첩》 60폭, 19세기, 견본담채, 30.4x43.7cm, 개인


정선, 김윤겸, 최북, 김홍도, 이인문, 김하종, 정수영, 조정규, 안중식, 이도영, 고희동, 이상범, 변관식, 이응노 등 조선 후기부터 근대까지 여러 화가들이 먹과 붓으로 그려낸 각 포스트의 그림들이 제시된다. 거기에다 다섯 번이나 금강산에 갔다 올 기회를 가졌던 이태호 교수가 직접 찍은 사진이 이해를 돕기 위해 들어가 있어 풍부한 시각자료가 된다. 잘 알려진 그림도 많지만 소개된 바가 적은 개인 소장 그림들도 꽤 많은 수 소개됐다. 도판목록이 없다는 점이 못내 아쉽다.


김하종 <명경대> 《해산도첩》 1816년, 견본담채, 29.3x43.2cm, 국립중앙박물관


김하종 <명경대> 부분


안중식 <명경대> 1918, 지본담채, 128.5x30.5cm, 개인       


이렇게 많은 화가들이 이처럼 금강산에 몰두하도록 만든 것은 산 자체의 위대함이기도 하겠지만 금강산을 그렸던 화가가 그들에게 위대했었기 때문이었다. 같은 구도로 또 조금은 다른 구도로, 조금은 다르게 또는 똑같이, 반복해서 그려낸 그들에게 금강산 그림은 서화의 도에서의 목적지 또는 넘어서야 할 중요한 과제였을 것이다. 전형이 만들어지고 공고해 지고 계속해서 모작의 모작들이 생성되고, 변형되고, 나중에 금강산 그림은 민화로도 제작된다. 민화에서 발견하는 정선의 향기도 재미가 있다.

금강산 그림들을 모아 계보로 이어지게 배치해 본다면 그 시작점에는 정선과 김홍도가 있었을 것이다. 그 맵에서 김홍도 바로 아래에 그려질 만한 화가들은 여럿이 떠오르는데, 이 책을 통해서는 한 금강산 화첩을 그린 밝혀지지 않은 한 화가의 존재가 돋보인다. 김홍도 전칭작 60폭 <해산첩>이 그것으로, 여러 꼭지에서 연이어 소개되고 있다. 모든 그림이 시원하거나 세심하거나 완성도가 있어서 볼 만하다.

김홍도가 남겼던 금강산 그림이 적지 않지만 화첩으로 남겼던 해산첩 하나가 화재로 소실된 바가 있다고 전해지고 있고, 아들 김양기를 비롯한 많은 화가들이 그 화첩을 따라 그렸다고 하니, 바로 그 소실된 김홍도 해산첩을 모방해 그린 화첩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어쩌면 아들이 그렸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김홍도가 그렸을 원래의 그림과 그것을 펼쳐 놓고 따라 그리고 있는 수많은 후배 화가들을 상상하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다음 명승지의 그림들로 넘어갈 때마다 그 화첩의 그림이 나오길 기대하고 있는 나자신을 발견할 지경이 됐다. 정수영, 김하종의 금강산 그림, 그리고 김홍도 전칭 금강산 연작들은 모아서 그 공통점과 차이점을 눈으로 확인하고 싶다. 


傳 김홍도 <만물초>《해산첩》 60폭, 19세기, 견본담채, 30.4x43.7cm, 개인



작가미상 <만물초>《금강산도권》 19~20세기, 지본담채, 26.7x43.8cm, 국립중앙박물관 


금강산이 다양한 형태와 질감과 산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각 지형을 표현하기 위해 화가가 선택한 표현기법에만 집중하더라도 할 말이 많을 것이다.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정형화된 그림만을 상투적으로 그렸구나 싶은 것도 있는데 그런 그림들은 현재의 기준으로 본다면 예술로서 자랑스러운 성과라고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그림조차도 어떤 맥락으로 진경산수나 금강산 그림이 이어져 왔는지 말해주고 있다. 


정선 <삼일포> 《해악팔경》 18세기, 지본담채, 56x42.8cm, 간송미술관


근대의 화가들이 새로운 구도를 통해 발전적 계승을 꾀했을 때도 그들의 토대는 중요했다. 청전 이상범의 <금강산사계12폭 병풍>은 그의 대표적 화풍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그다지 인기 없을 만한 1930~40년대의 작풍이다. 사진을 이용해 전사하듯 그려낸 청전의 금강산 그림은 서화 전통을 이어받은 사람의 손과 사생하는 근대인의 눈이 만들어낸 결과물처럼 보이기도 한다. 청전 이상범은 1934년 금강산 사생 여행을 했는데, 이 경험은 일본식 산수화풍을 벗어나는 계기가 되었을 수 있다. 

근대 금강산 그림에서 소정 변관식을 빼놓을 수 없다. 의견은 다양할 수 있지만 그의 대표작으로 <외금강 삼선암 추색>을 꼽는다고 뭐라 할 사람은 없을 것 같다. 프레임 잘라내기, 적묵과 파선 등의 방법으로 20세기 금강산 그림의 새로운 길을 보여줬다. 

책에서는 예전부터 사람들 입에 오르내린 곳과 일제강점기 엽서 등에 의해 인기 제재로 부상한 곳(삼선암, 귀면암, 망군대, 옥녀봉)을 비교하여 보여주기도 하고, 정양사 부근이 가장 많은 시가 남겨진 이유에 대해서 설명하기도 한다(표지 그림으로 정선의 정양사 부채그림을 넣었다)

금강산을 실제 눈과 사진에 담아 오셨던 교수님과, 금강산 그림을 주제로 박사 논문을 비롯, 여러 금강산도 연구를 진행했던 제자가 공저로 낸 책이라서 금강산을 구경해 보지 못한 이들을 코스별로 이끌 만한 사진과 그림이 그들만의 기준으로 선별되어 대량 실려 있다는 것이 이 책의 특장점이다. 그림을 중심으로 매 꼭지 어, 여기가 끝인가, 싶을 정도로 길지 않게 최대한 간략한 설명을 덧붙인 셈이라 많은 독자들이 부담 없이 읽도록 했다. 1997년 박사논문 결과물을 엮은 <금강산도 연구> 같은 단행본에 비하면 조선-근대 화가들에 대한 지식이 적은 이들이라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방향 설정을 명확히 하고 있다. 

각 꼭지도 그러하지만 책 자체도 결론이 따로 없이 간결하게 끝난다. 마지막 꼭지 ‘총석정’에서 배운성의 유화에 대해 설명하면서 책 전체가 쿨하게 마무리된다. 

“바다, 하늘과 어울린 총석정 언덕 풍광을 약간 두껍게 바른 유화의 질감을 살려 보이는 그대로 그려냈다. 거친 붓 터치와 다채로운 색감을 지닌 인상주의 화풍이다.” 

배운성의 그림은 책에 실리지 않았다. 찾아보러 가야겠다. 

업데이트 2024.02.27 2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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