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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년에 걸쳐 펼쳐진 부채 그림의 흐름 『선면화의 세계』

이인숙, 『선면화의 세계 (우리 부채그림의 역사와 미학)』 눌와, 2024.04.

서양 마법사에게 지팡이가 있다면 한국의 도사에겐 접이식 부채-접선 혹은 접첩선이 있었다. ‘도사란 무엇이냐’ 말만 하기보다 촤라락 펼치고 접는 데서 생기는 권위가 있었던 것. 

도사 말고도 양반들의 필수품이던 이 부채는 접이식 구조로 휴대의 용이성이 높고, 손목의 가벼운 스냅만으로 시원한 바람을 불러일으키는 효율성, 거기에 격조 높은 그림으로 꾸며져 예술성이 제고된다. 실용과 치레를 겸한 부채이지만 여기 그려진 그림이 겸재 정선이나 단원 김홍도라면 거기서 나오는 바람은 단순한 바람은 아닐 것이다. 우리 선면화(扇面畵, 사실 접선화)를 전격적으로 다룬 이 책은 지금 단오 무렵에 읽기 적절한 시원함을 가져다준다.

선면화는 ‘부채꼴’의 화면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 장르가 생성되는 독특한 그림이다(부채그림이 부채꼴의 화면을 가진다는 말은 ‘영미는 영미 엄마 딸’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느낌이다). 바닥에 펼쳤을 때 눈앞에서 방사상으로 펼쳐지는 시야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이 캔버스는 직사각형 천지인 시각예술의 세계 안에서 자신만의 영역을 확보했다. 


이징 <금니산수>, 청색 종이에 금니, 은니, 17.1x47.8cm, 국립중앙박물관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우리 부채그림. 


조선후기의 접선화 유행은 사실 작품 사례가 많이 수록된 중국의 화보가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일찍이 고려 때 접이식 부채의 명성을 가지고 있었고 조선이 그 명성을 이었다는 것으로 조금의 자부심을 가질 수 있다. 우리나라 부채그림은 상대적으로 크기가 큰 편이며 목살이 짧고 펼쳐지는 각도가 커서 면적이 넓어 바람도 잘 일어나지만 회화적 공간이 충분하다는 장점이 있다. 부채그림의 둥근 화폭은 제화를 쓸 때 더욱 효과적이다. 부채살 방향을 따라 방사상으로 쓸 때도, 세로로 쓸 때도 운동감이 살아난다.  


최북 <설중귀려> 종이에 먹, 21.5x62.5cm, 고려대학교박물관


산수, 특히 설경의 스산함을 잘 표현했던 최북의 그림. 눈이 내린 산 아래로 나귀 탄 인물이 외딴 집을 향해 가고 있는 장면. 유백법으로 먹을 올리지 않은 부분이 자연스레 눈으로 표현되도록 했다. 흰 호분도 살짝 이용했다. 이 부채에서는 서늘함이 절로 느껴졌을 것이다.


책의 저자는 정조 시서화로 박사 학위를 받고 주목할 만한 논문을 꾸준히 발표한 연구자로서, 그리고 오랜 시간 신문에 미술사 칼럼을 연재하고 있는 칼럼니스트로서 이 신간을 통해 다양한 우리나라 부채그림을 깊이 있게 살피고 그 화려하거나 담백한 스펙트럼 면면을 재미있게 서술했다. 조선시대 기록에 부채 생산지에 부임한 수령이 백성을 수탈해 사적으로 많이 만들게 한 일, 부채를 뇌물용으로 활용한 사건들, 부채의 사치스러움을 경계해 크기, 부채살 수, 칠, 값비싼 부속 등을 제한-금지하는 조치를 취한 일 등 부채가 그 시대에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는지도 알려준다. 

앞뒤에 부채의 기본 지식과 문화에 대한 설명이 있지만, 주된 내용은 2부의 80점의 부채그림 명작이다. 시대는 조선후기에서 근현대까지(그보다 이른 시기의 귀한 부채그림들은 1부에서 따로 조금 다룬다). 수많은 부채그림들 중에서 300년을 대표하는 80점을 선택하기란 얼마나 힘든 일이었을지. 이 명예의 전당에 오른 80점은 금강산/실경산수, 설경/정형산수/시의산수, 인물, 화조, 사군자, 합작도, 기타 색다른 그림, 이렇게 일곱 개의 카테고리로 나뉘어 소개된다. 

정선의 부채 그림은 금강산 그림도 멋지지만 푸른 담채로 화면을 가득 채운 <창범도해>도 인상적이다. 정선은 두 자루의 붓을 함께 쥐고 한꺼번에 빠르게 긋는 양필법으로 물결을 그렸다고 한다. 당대에 그림으로 이름이 높았던 심사정은 부채그림도 인기가 높았을 것 같은데 현전하는 심사정의 부채는 두세 점에 불과하다. 저자는 그 이유에 대해 역모죄로 사형당한 조부 때문에 몰락한 집안의 심사정 그림 부채를 들기를 사대부들이 꺼렸을 것이라 설명한다. 두보의 유명한 시 ‘백제’의 두 구를 부챗살 방향을 따라 쓴 <백제 시의도>는 거친 물결의 급류 옆에 머무른 화자의 느낌이 그대로 전달된다.


정선 <창범도해> 종이에 담채, 23x64cm, 국립중앙박물관



심사정 <백제 시의도> 종이에 담채, 22.7x63.6cm, 국립중앙박물관
높은 강 급한 협곡 우레와 천둥이 다투고/오래된 나무 울창한 덩굴 해와 달이 어둡네/현재


이인상의 부채그림은 하나같이 다 좋지만, 이 그림은 특히 더 눈길을 끈다. 담담하고 거친 듯한 그림과 글씨가 또 그 의미가 어우러지면서 강한 개성도 드러난다. 바위 사이로 자라나와 가로로 꺾어진 소나무 뒤로 중앙에 수직으로 떨어지는 물줄기가 있다. 갑자사화에 요절한 박은의 시에, 병중인 지인을 위해 그렸다는 관지를 남겼다. ’소나무 옆에서 폭포 소리를 듣는다’는 의미에서 송변청폭도로 명명됐다.

이인상 <송변청폭도> 종이에 담채, 가로 63.3cm, 국립중앙박물관



윤두서 <견마도> 종이에 먹, 23x63.4cm, 해남 윤씨 종가
하루 종일 말을 지켜봤다는 마벽이 있는 윤두서 집안. 말그림 선면.


김홍도 <죽리탄금도> 종이에 담채, 22.4x54.5cm, 고려대학교박물관

당나라 왕유의 죽리관을 주제로 한 시의도로 시 전문을 그림 속에 써넣었다. 당시화보를 참조로 하고 자신의 창작을 더했다. 악기를 좋아했던 김홍도가 그 풍정을 잘 살려서 그린 명품이다. 


오세창 <묵란> 1937년, 종이에 먹, 가로 45cm, 개인
74세 때 그린 그림으로 둥근 테두리를 따라 16자의 시를 썼는데, 부챗살이 접히는 칸에 맞추어 한 글자씩 아래쪽에 많은 여백을 두고 간결하게 난초를 그려 넣었다. 관지도 그림도 빈틈없는 계획에 따랐다.


특이한 구성을 가진 작품들도 있다. 마음으로 통했던 친친 강세황과 허필은 가운데를 완전히 수직으로 나누어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고 양쪽에 아담한 화보풍 산수화 쌍폭을 부채에 담았다. 필치는 유사한 면이 있지만 표암은 기와집을, 연객은 죽림과 초가를 그렸다. 스승과 제자 관계라 할 수 있는 강세황 글씨, 김홍도 그림의 합작 선면 <서원아집도>도 유명한 작품이다. 맨 오른쪽 바위에 글씨를 쓰는 미불 장면에 바위 위 글씨마냥 쓴 김홍도의 관지도 재미있고, 서원아집도기 글자 수를 계산해 방사향을 접힌 칸에 치밀하게 오르락 내리락 운동감을 준 강세황의 글씨도 멋지다. 

강세황, 허필 <산수> 종이에 담채, 22.5x55.5cm, 고려대학교박물관



김홍도, 강세황 <서원아집도> 1778년, 종이에 담채, 26,9x81.2cm, 국립중앙박물관


각 작품들을 자세하게 소개하는 외에도 누구보다 접선화 화면 자체에 대한 고찰을 깊게 하여 그 전통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접선화의 매력은 사각형을 벗어난 그림이라는 데 있다. 그 특징은 자연물이든 인공물이든 비슷한 모양이 없어 ‘부채꼴’로 부를 수밖에 없는 특이한 형태라는 점, 반원형 곡면을 위주로 하면서 좌우에 직면이 있는 둥근 화면인 점, 중심축의 좌우가 방사 대칭을 이루는 점, 가로의 가장 긴 길이가 세로 폭의 2~3배 이상 차이나는 점, 차곡차곡 접어 손에 쥘 수 있는 작은 크기인 점 등이다. 가로가 길고 좌우가 대칭이기 때문에 작고 특이한 화폭임에도 접선화는 확고한 안정감이 있다.” (본문 45쪽)

사람들에게 사랑받았던 당대의 작가들은 한 번쯤은 부채 그림을 그렸다. 근현대에 이르러서도 화가들에게 선면 자체가 또 하나의 탐구 대상이었다. 천경자 같은 이는 맑은 색채의 금붕어나 개구리부터 농도 짙은 세네갈의 여인들도 부채에 얹었다.

박래현 <화조> 종이에 채색, 가로 45cm, 개인



천경자 <금붕어> <개구리> 종이에 담채, 14.3x50cm, 개인



손동현 <건스타> 2012년, 종이에 담채, 가로 44cm, 개인

김창열 <물방울> 1987년, 종이에 채색, 영인문학관


이렇게 많은 화가들의 작품을 훑다보니 이 선면화 책은 조선후기부터 근현대에 이르는 한국 회화의 흐름을 짚게 됐다. 각 그림 꼭지마다의 해설에서 필요한 내용만을 간결히 다루고, 마지막 부분에 전반적인 내용도 종합했다.  

부채그림은 감상자와의 거리가 가까운 축에 속한다. 책에서는 모두 비슷한 크기로 전체 모습을 담아 5:1 정도로 축소된 크기. 작은 화면 내에 섬세하게 표현된 것을 보고 싶을 때가 있어서 몇몇 작품은 확대해서 실었어도 좋았을 것 같다. 한번에 후루룩 읽을 80점 중의 하나로 가볍게 넘어가기 아까운 그림들이 많다. 

화면의 크기가 거의 정해진 작은 그림, 소품이지만 주제나 필묵의 완성도에 있어서 대작 못지않은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시계를 시간 보려고 차는 게 아닌 것처럼 부채의 그림 또한 바람이 더 잘 일어나라고 그린 것은 아니다. 더 이상 그 기능은 떠올리지 않게 된, 형상만 남은 선면화라도 그 안에서 자신들의 규칙을 가지고 생생히 전해내려온 전통이 있다. 

부채는 더위가 시작되는 단오 무렵이면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내려준 물건이었다. 이를 단오선이라 했는데 궁과 관청에서 부채를 내려주는 것은 단오사선, 부채를 서로 선물하는 풍속은 단오증선이라고 한다. 이번 여름 ‘단오증선’을 대신하여 부채그림 책을 선물하는 것도 좋은 센스일 터이다. 
업데이트 2024.06.12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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