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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도기행첩은 누가 그렸을까 - 이태호 『조선회화의 새로운 마스터피스』

이태호 『조선회화의 새로운 마스터피스』마로니에 북스, 2026.2

이태호의 『조선회화의 새로운 마스터피스』의 2장의 제목은 “송도기행첩은 강세황이 그리지 않았다”이다. 조선 후기 회화에서 독보적 개성을 보이는 이 화첩의 그림들을 ‘작자미상’으로 하자고 하는 주장에 많은 이들이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지 않을까. 해당 꼭지의 글은 『월간민화』에 먼저 게재된 바 있고 당시 조용한 고미술계에 진동을 일으켰으나 그 이후에 반론이 있다거나 중요 의제가 되었다든가 차후의 연구가 진행되었다든가 하는 소식을 듣지는 못했다. 


1971년 『고고미술』에 실린 혜곡 최순우(1916-1984) 관장의 짧은 글 「강표암」에 표암 강세황(1713-1791)의 《송도기행첩》이 언급되었는데, 이때 《송도기행첩》이 처음 공개적으로 알려졌다. 
“근래 강표암에 관한 새 자료들이 발견되어서 주의를 끌게 된 것을 계기로….”, “그 새 자료의 하나가 송도기행첩이라 이름붙일 수 있는 화첩이다. 이것은 서울 이홍근씨 소장으로서 그 존재는 벌써부터 알려져 있었지만 이 화첩에 남겨진 사실풍경화에 나타난 참신하고도 독보적인 표현양식과 묘사기법에 적지 않은 감명을 받게 되었다.”라고 적혀 있다. 즉 이홍근 소장품 《송도기행첩》이 그 전부터 표암 강세황의 작품으로 전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등장으로 인해 《송도기행첩》의 출신성분에 의심을 가한 사람은 없었다.


《송도기행첩》은 송도의 명승지를 그린 기행사경도가 들어 있는 화첩이다. 교과서에도 실린 유명한 그림 <영통동구>를 비롯해 16점의 그림이 포함되어 있다. 화첩 양쪽으로 펼쳐진 것이 12점, 한 페이지짜리 그림 4점이고, 그림 외에 발문 등 세 편의 글이 있다. 


이 화첩의 제작 배경을 밝히려는 노력은 2001년에야 결실이 있어서, 김건리의 석사논문에서 개성유수였던 오수채(吳遂采, 1692-1759)가 강세황을 개성으로 초청해 제작한 것임을 밝혔다. 

오수채는 1757년 개성유수를 지냈는데, 강세황 절친인 허필의 <묘길상도> 발문에 “강세황이 개성에 가서 無暑冊 2권을 만들었다”고 이것이 정축년(1757년)의 일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오수채의 자는 士受, 호는 체천으로 송도기행첩의 인장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오수채 자작시가 오수채의 글씨로 적혀 있고, 인장도 찍혀 있고, 총 7점의 그림 위 지명(대흥사, 청심당, 산성남초, 대승당, 마담, 태종대, 박연)을 자기 손으로 써 넣었다. 화첩의 제작 주체는 오수채임이 확실해 보인다. 


중요한 부분은 세 쪽에 걸쳐 적혀 있는 조선 초기 문인 박은(1479-1504)의 <관음사에서 묵다>라는 칠언시이다. 이 글은 강세황의 글씨체인 데다 ’읍취헌(박은)의 크게 흥겨운 시를 광지가 쓰다’라고 끝맺고 있으며 ‘표암’ 음각 인장이 찍혀 있어 강세황 자필인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나머지 《송도기행첩》의 각 그림에는 강세황의 낙관이 들어있지 않고 그림에 화제시로 씌어 있는 경우에도 그 시문 내용을 강세황 문집 등 기록에서 찾을 수 없어 강세황의 글로 특정짓기 어렵다.


요약하자면 확인 가능한 세 쪽의 발문시 때문에 화첩의 그림 전체를 강세황의 것이라 여겨 온 셈인데, 그림의 화풍이 강세황의 것이라 확신할 수 없는 마당에 이것은 강세황의 그림이라는 근거가 되기에는 당연히 부족하다. 


  
발문시 외에 관지가 없는 후기가 제17면에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오씨 아우(吳弟)는 그림을 많이 좋아하여 집안에 소장 화첩이 천정에 닿을 정도이다. 산수 유람 다니기 어려움을 알고 그림은 대부분 물과 바위이다. 집 뜰 나서지 않고도 와유를 즐기니, 옛날 금경과 상장은 고생만 실컷 한 셈이다. 무미(無味)한 것에 참 맛이 있으니, 화공의 그림도 반드시 오씨 아우의 앎에 못 미친다. 오씨 아우는 도시에 지내며 소란함을 싫어해, 화첩을 싸 들고 깊은 골짜기로 들어갔다. 나를 좋아해 남촌인으로 보아주고, 기이한 문장과 의심스러운 뜻을 아침저녁으로 구한다. 이 화첩은 세상 사람들이 한 번도 보지 못한 것이다.”
※ 김건리는 ‘오씨 동생’을 오수채의 손자 오언사인 것으로 보았다. 그가 당시 조부 오수채를 모시고 있었고, 강세황이 오언사를 ‘오씨 동생’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맨 끝 낙관을 썼을 자리는 의심스럽게도 제거되어 네모난 흔적이 남아 있다. 흰색 바탕의 화첩 그림과 달리 누런 색조의 그림인데다, 강세황의 일반적인 서체에 비해 필획이 느슨하고 가늘다.
 
저자는 이 제17면의 글이 강세황의 것이 아니라 19세기 말쯤 씌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오씨 아우란 오수채의 후손 누군가일 테고, 계속 이 화첩을 소장하고 있었는데 누군가에게 부탁해 감상평을 담았다는 것이다. 이 후기는 그림이 그려진 시기, 그린 사람, 제작한 사람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는 주장이다.

1757년 오수채가 강세황을 초대해 송도를 유람했고 이 화첩의 그림들이 그때 그려진 것이 맞고 화첩으로 묶이며 오수채와 강세황이 한 마디 시를 더한 것까지는 사실이라면, 그림을 그린 작자의 가능성은 세 가지 정도로 축약된다. 

1. 강세황이 그렸다. 
2. 당시 지방 화원 등 화가가 그렸다. 
3. 오수채가 직접 그렸다. 

저자는 2번에 무게를 둔다. 비슷한 시기의 <해동지도>(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보물 1591호)의 송도 지도가 회화적인 분위기를 낸다고 하면서, 이 해동지도를 그린 화가가 송도기행첩을 그린 동일인일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만약 강세황이 1757년 무렵 개성 곳곳을 깊이 있게 관찰하며 명소마다의 그림을 남기고 화첩으로 묶을 기회가 있었다면. 남은 자료로 추정할 수 있는 표암의 성정으로는 아무 곳에서 그에 대한 기록을 남기지(자랑하지) 않았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긴 하다. 개성의 명소를 이렇게 구석구석 다니면서 남긴 구체적인 시문 하나도 남기지 않았을까? 

동원 이홍근(1900-1980) 선생의 기증품으로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이 화첩에 대해 박물관 소장품 설명에는 아직 강세황의 작품으로 명시되어 있다. 

누가 그렸든 《송도기행첩》은 중요한 자료이고 조선 후기 미술사 측면으로도 가치 있는 작품으로 영원히 남을 것이다. 서양화법을 과감히 구사하고 어느 부분에서는 미숙한 부분을 드러내기도 한다. 중앙의 테크니컬한 화원이 남긴 그림이 아니었기에 가능했던 개성이 보인다. 문기로 해석해 버렸던 성급함을 반성하고 다시 한번 그림을 돌이켜보아야 한다. 혹시 어떤 결정적인 증거가 발견되어서 결국 표암의 그림이더라~ 할지도 모르지만. 검증이 필요한 순간이다. 

이 책에는 이밖에도 2024년 화제가 되었던 표암의 두운지정화첩, 겸재 정선, 단원 김홍도 등 조선시대 거장들의 중요한 작품 발견의 순간 또는 잘못 해석된 작품을 재해석해 소개하고 있다. 미술사학자로서 발표해 온 연구 가운데 결정적이라고 할 수 있는 자료 열 건에 대한 연구 결과물이며 이로 인해 조선 회화사의 알려진 내용들을 조금씩 다시 설정해야 하는 중요한 내용이다. 

다양한 사료와 전시, 경매기록을 교차검토하고 50여 년에 걸친 현장 답사의 경험을 살려 실증적으로 검토하는 과정이 그대로 적혀 있다. 
아직 공백이 많은 한국미술사를 공부하는 연구자들 뿐만 아니라 관심을 가진 대중들에게 흥미있게 다가갈 수 있는 책이다.   
업데이트 2026.08.05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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