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마다 피는 아름다운 꽃, 상쾌한 아침을 열어주는 청명한 새소리. 그들이 스스로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이들은 옛날 옛적 산골 사람들로부터 도시 한가운데에 사는 지친 이에게까지 위안을 주는 존재들이다. 당연히 이들은 그림의 대상이 된다. 조상들은 학, 백로 같은 크고 멋진 새들을 장식으로 써서 고아한 정신을 기렸고, 메추리 같은 못난 새, 닭, 참새처럼 흔한 새, 봉황이나 공작 같은 화려한 새와 박새, 물총새 같은 귀여운 새에도 관심을 기울였으며, 매처럼 무서운 새에도 의미를 담아 그림을 그렸다. 모란 같이 크고 멋진 꽃, 연꽃, 매화, 국화처럼 의미가 분명한 꽃, 목련, 배꽃, 금낭화처럼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꽃까지 다양한 꽃들이 제재가 됐다.
작년에 이어 국립진주박물관과 진주시에서 공동주최하는 《채색화의 흐름》전 두 번째 챕터인 이번 전시에서는 "전통을 이어간 채색 회화에서 꽃과 새를 제재로 한 그림"들을 모아 야심찬 특별전을 열었다.
작년처럼 고미술은 박물관에서, 근현대미술은 진주시립이성자미술관에서 전시하는 페어 전. 꽃과 새이니만큼 채색화의 장점을 드러내는 다채로운 86점의 작품이 전시된다. 이 중에는 진주 연고인 작가와 진주 출신 작가의 작품도 포함시켰다.
박물관 전시 '꽃과 새, 곁에 두고 즐기다'는 1937년 수덕사 대웅전 공사를 할 때 임천(林泉)이 모사한 고려시대 벽화의 모사도로 시작한다. 실물은 소실됐고 모사도만 남아 있으며, 묵서를 통해 1308(충렬왕 34)년에 그려진 것을 알 수 있다. 남아 있는 고려시대 그림 자체가 극히 드문 지금, 그 당시의 기법이나 미감을 추정할 수 있는 귀한 모사도이다. 연꽃, 맨드라미, 나리 등이 꽃꽂이 된 아름답고 당당한 그림으로 모사도 자체도 85살이 넘었다. 옆에는 고려시대 묘법연화경 표지에 장식된 금분 연꽃의 섬세함도 함께 볼 수 있다.
미상 <수덕사 벽화에 그려진 연꽃> 모사도, 고려시대(14세기), (1937년 모사), 117.5×204.5cm, 국립중앙박물관
미상 <호응도(매)> 17세기, 비단에 채색, 25.1x23.3cm, 국립중앙박물관
작자미상 화조도(17세기) 부분
전시는 이어서 17세기 작자미상, 전칭작 화조도로 전개된다. 국립박물관의 수장고에서 나온 이들 화조도는 소박한 필치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선명한 색채에 세월의 더께의 힘을 빌어 오히려 우아한 분위기를 얻었다. 화면의 여백, 크고 작은 새와 다양한 꽃들, 배경이 되는 초목과 바위의 표현에서 왕실 그림에서 유래한 채색 화조화의 스타일의 특징을 가늠할 수 있다.
미상 <꽃과 새(교태전 부벽화 화조)> 19세기, 종이에 채색, 132x256cm, 국립중앙박물관
미상 <화조도> 부분, 19세기, 종이에 채색, 160.3x78.2cm, 국립중앙박물관
박물관 고미술 파트 전시의 미덕은 화려한 교태전 부벽화를 보는 귀한 기회와 함께 궁중회화에서 영향 받았음이 분명한 19세기의 큼직한 화조도들을 한 곳에 모아 놓은 공간에 있다. 교태전 화조도 부벽화는 큰 종이들을 이어붙인 대형 화면에 목련, 목서, 매화를 그리고 그 위에 금계, 앵무와 같은 각종 새들을 그렸다. 왕실의 번영을 축원하는 의미를 담으면서 오채 안료와 홍동분 금색 안료를 사용해 화려함을 더해 19세기 후반 궁중 회화의 수준을 보여준다. 유사한 스타일을 보여주는 19세기의 작자미상 화조도들은 장식화의 형식성, 정형성을 보여주지만 현실 자연과는 조금 다른 회화적 세계를 섬세하게 그린 (이름을 알 수 없는) 화가의 캐릭터가 묻어난다. 궁중화의 균열 같은 그러한 그림은 이후 민화 생성을 연구하는 데도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이 화조도를 그렸던 그는 화원이었을까. 주문을 받고 그려진 그 병풍은 어느 양반의 공간을 아름답게 채워주고 있었을 것이다.
그밖에 화보를 근거로 그려진 작은 화첩 그림, 혜원 신윤복의 싸움닭 그림, 다양한 기후 지역의 나비를 스캔한 듯한 남계우, 박물관 굿즈의 인기 작가 신명연의 맑고 아름다운 화조도 병풍, 정형성의 끝을 보여주는 짝수폭 푸른 괴석 궁중모란도 등 서울에서도 흔히는 볼 수 없는 귀한 그림들이 박물관 전시실을 채웠다.
신명연(1808-1886) <화조도 6폭 병풍> 부분, 19세기, 비단에 채색, 국립중앙박물관
미상 <모란도 8폭 병풍> 국립중앙박물관
마지막 전시 공간은 역시 그 테크닉에서 감탄을 하게 만드는 장승업의 화조도 병풍, 안중식이 이어받은 전통, 채용신의 화조도 병풍으로 구성되어 있다. 거기에 이건희 기증품이 중심이 된, 꽃과 새가 그려진 도자 작품도 볼 만한 리스트업이다. 채색화는 아니지만 주루룩 쇼케이스에 놓여 전시되기는 아깝다 할 정도로 빼어난 분청사기, 청화백자들이 한시를 배경으로 전시의 마무리 디저트가 되어 준다.
20세기를 맞으며 척박한 환경에서 맥을 이어간 전통 채색 회화에서 꽃과 새는 어떻게 다루어졌는지는 시립이성자미술관의 세 전시실에서 전통 채색 한국화 작가들의 작품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훨씬 더 밝고 화려한 분위기의 근현대 작품들과 고미술과의 불연속성을 상쇄시켜 주는 것은 초입에 있는 김은호, 이도영의 화조도이다.
김은호(1892-1979) <벚나무와 새> 부분, 1937년, 123.4x20.2cm, 국립중앙박물관
천경자(1924-2015) <아열대 II> 1978, 72x90cm, 종이에 유채, 가나문화재단
박생광(1904-1985) <십장생 부채> 1983, 62x20cm, 이영미술관
안동숙(1922-2016) <월광> 69x102cm, 유족
오낭자(b.1943) <生2004-II> 2004, 116.7x91cm, 동아대학교 석당박물관
‘낙이망우(樂以忘憂) 꽃향기, 새소리’를 주제로 김기창의 ‘모란’, 정진철의 ‘호접도’, 그의 아들 정은영이 그린 ‘양귀비’와 ‘맨드라미’가 소개된다. 정찬영의 소품 두 점, 천경자, 박생광의 아우라가 넘치는 채색화를 중심으로 안동숙, 김흥종, 유지원, 이숙자, 오낭자, 이화자, 원문자 등 근대 다양한 시각 이미지의 수입으로 변화를 겪은, 국전 시대와 채색화의 평가절하 시대를 살아남은 후배의 그림들이 이어진다. 소재와 형식의 틀을 깨고 창조하는 존재로서의 자신을 자각한 황창배의 대형 작품으로 미술관 전시는 마무리된다.
황창배(1947-2001) <무제> 1991, 장지에 아크릴릭,120x182cm, 황창배미술관
여기에서 ‘화조도’라는 카테고리의 경계는 모호해지고 장식성, 형식의 굴레, 제재의 상징성도 변화됐다. 당대에 권위로 여겨졌던 이미지도 이제 과거에 묻혔다가 나옴으로써 참신함을 얻었다고나 할까, 새로운 세대의 눈에는 어떻게 비춰질지 그것이 궁금하다.
지역의 접근성 때문에 더 많은 사람들이 보기 어려운 점은 있겠지만 진주의 지역성과 채색화 담론의 문제제기가 적절히 섞인 흥미로운 전시다. 많은 여성작가들의 작품을 볼 수 있다는 것, 흔하게 볼 수 없는 그림들을 채색화와 화조라는 씨줄과 날줄로 엮어 선보인 점 등 다양한 시점에서 해석의 여지가 있는 관람의 경험이어서 좋다. 고미술 파트에서 신사임당의 초충도를 모셔오려 했지만 얼마 전 공개된 바 있어 오지 못했다고 한다. 볼거리도 더 제공하고 시대나 성의 안배에도 더 플러스가 되었을 텐데 아쉽게 됐다.
색을 칠한 전통 그림을 ‘채색화’라는 이름으로 다 묶는 것이 정당한가, 색칠한 그림을 다루어야 한다니, 수묵의 전통이라해도 너무 넓은 거 아닌가. 불화, 민화 등은 어떤 식으로 분류되는 것이 좋은가. 현대의 한국화 작가를 사용하는 미디어로 묶는 것이 타당한가. 여러 상념으로 감상을 방해받고 싶지는 않았다. 조용한 전시실에서 꽃향기와 새소리를 상상하며 시각적인 즐거움을 오감으로 확장하는 좋은 기회가 생겼음에 감사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