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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문예인 오세창과 20세기 컬렉터

-18세기의 중인계급이 19세기의 문예 엘리트로 부상
-20세기 한국 컬렉터의 기준점이 된 오세창의 세계

전시명 : 근대 문예인 오세창
장 소 :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 2층 서화실
기 간 : 2023.9.7 ~ 2023.12.25

글/ 김진녕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근대문예인, 위창 오세창> 전(-12.25)이 열리고 있다. 박물관 상설전시관 2층 서화Ⅱ실에 1929년 서화협회전에 출품됐던 상형문자로 쓴 <어魚·거車·주舟>, 각각 전서와 예서로 쓴 출사표 열두 폭 병풍(1918/1923) 두 틀, 오세창과 교류하던 인물들이 맹원에 모여 술잔을 나누던 풍경을 고희동(1886-1965)이 서양식 드로잉 구도로 그린 <맹원아집도>, 1918년 7월에 열린 서화협회 휘호회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서화첩, 오세창과 변관식, 이상범, 김은호 등 13인이 합작한 서화합작도(국박 소장품 번호 구9940), 장황된 유물 뒷면에 오세창의 수장기가 붙어있는 고려불화 수대장존자상(국박 소장품 번호 구 4997, 보물 제 1883호) 등 30건 56점의 작품을 전시,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중반까지 한국의 근대를 살다 간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1864~1953)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주고 있다.


<제갈량의 출사표병풍> (1923)


주최측에서는 “3·1운동에 참여한 애국지사이자 우리 서화 연구에 힘쓴 위창 오세창 서거 70주년을 기념해 ‘근대 문예인’으로서 위창 오세창을 집중 조명한다. 근대 격동기 다양한 직업을 가졌던 오세창의 생애, 예술 활동, 감식안(鑑識眼)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을 중심으로 조명하는 기회”라고 전시 의미를 설명했다.

오세창은 16세인 1879(고종 16)년 한어(중국어) 역관(譯官)을 시작으로 언론인(한국 최초의 주간 신문 한성주보 기자, 만세보 사장), 독립운동가(3.1운동 33인), 서예가(서화협회 회원) 등 여러 직업을 가졌다. 그의 다양한 이력은 통번역 업무를 담당한 관원 명단을 적은 <통문관 관안>과 1906년 그가 신문사 사장으로 있을 때 발행한 <만세보>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전시장에는 통문관 관안과 1919년 3·1운동 때 인쇄된 <기미독립선언서>, 한성주보 등이 나와있다.


오세창의 다양한 활동 배경에는 그의 부친이자 역관이었던 오경석(吳慶錫,1831~1879)이 물려준 부와 지식의 역할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오경석은 역관으로 청나라를 12번이나 오갔던 이상적 밑에서 중국어와 서화를 배웠고, 집에서는 박제가의 실학을 익혔다. 그는 1853(철종 4)년 사신 일행의 역관으로 베이징을 방문한 이래 13번이나 중국을 오갔다. 특히 1866년 병인양요, 1871년 신미양요, 1876년 강화도 조약 국면에서 오경석은 단순한 통역관이 아닌 외교관의 역할을 수행했다. 조선 후기 역관들은 당대 세도가의 부침과 상관없이 청을 오가면서 ‘연경무역’을 주도해 재산을 크게 불렸는데 오경석은 누구보다 자주 베이징을 오갔던 역관이었다. 오세창은 일찍이 부친이 수집한 다양한 자료를 보며 성장했다고 하며 이는 전적과 서화를 그렇게 모을 수 있는 경제력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수대장존자상 뒷면에 부착된 오세창의 수장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있다.

지난 을해(1875, 고종12)년에 선부군(先府君, 오경석)이 신광사 스님에게 이 그림을 얻었다. 예로부터 전해오기를 "가장 끝에 있는 상(像)에는 그림을 그린 사람의 성명이 있는데 당나라 화가 오도자(吳道子)가 그린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고증을 할 수 없음이 애석하다. 대개 오백의 화상을 그린 축(軸)이 세월이 오래 흘러 모두 흩어졌다. 당시 절에 이미 남아 있는 것이 없었던 것은 오백나한상 전체는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또한 『고려사』와 『해주부지』에서도 모두 누가 그렸다고는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행히 일존(一尊)을 집에 모신 지가 어느덧 40년이다. 어쩌면 나로 하여금 하늘이 내려 준 보물을 지켜 보호하도록 하고 사라지게 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만약 499상의 진적(眞蹟)이 아직도 세상에 있다면 그것이 천 년의 세월을 거쳐 우리나라에 온 신품임을 깨닫고 소중히 여겨 지킬 것이니 역시 하나의 기이한 만남이다.

이에 몇 마디 말을 엮고 다시 장정(裝楨)해서 인연을 널리 심어 영원토록 공양하는 바탕이 되고자 한다.

천수 6년 계미년 후로 993년이 지난 을묘(1915)년 6월 초하루에 해주(海州) 오세창 위창이 경건한 마음으로 기록하다.


<수대장존자상> 고려시대. 뒷면에 오세창의 글이 있다.


1875년 무렵은 오경석이 고종과 대원군 부자의 눈과 귀로, 열강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외교 현장에서 한창 위세를 날릴 때이다. 또 고려시대에 창건된 손꼽히던 고찰인 신광사의 승려가 물색 없이 절의 귀중한 성화를 오경석에 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경석이 서화 수집에 열성이었고, 그럴 수 있는 재력이 있었던 것이다.

이런 아버지를 둔 오세창은 훗날 관직에 나아가 개화정책을 수행했다. 하지만 아버지처럼 관운이 트이지도 않았고, 조선이 망하기도 했다. 오세창은 관직에서 물러난 이후 언론인으로 애국계몽 운동을 후원했고, 1919년에는 민족대표로 3·1 운동에 참여해 2년 8개월 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그는 서화협회 회원으로 서화가들과 교류하며 활발한 예술 활동을 펼쳤고, 탁월한 감식안으로 서화 연구에 전념해 『근역서화징(槿域書畫徵)』, 『근묵(槿墨)』 등 저서를 남겼다.

이 역시 부친 오경석이 서예, 회화, 금석문 등 여러 분야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한 것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오세창이 편집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근역석묵(槿域石墨)』에는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금석문 탑본 78건이 실려있다. 특히 이 첩에는 469년 고구려가 평양 성벽을 축조하면서 새긴 <고구려 평양성 석편>(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 소장, 이하 석편, 보물) 탑본이 수록되어 있다. 이 석편은 1855년 오경석이 수집해 오세창에게 전해진 것으로 이후 일부 결실되었으나 『근역석묵』의 탑본은 결실 전 모습으로 가치가 높다.


<한진위당 묵각일품탑본첩> 청 19세기. 


서예가로서 오세창은 금석문을 따라 쓰고[임모(臨摸)] 문구와 설명을 적어 작품으로 제작한 ‘종정와전임모도(鐘鼎瓦塼銘臨摸圖)’ 전형을 확립했다. 이번 전시에는 그가 고대 중국의 기와와 청동기 명문 25점을 따라 써서 병풍으로 만든 <종정와전임모도> 열 폭 병풍(1925)을 볼 수 있다. 또 옛 글씨 상형고문을 바탕으로 독창성을 발휘한 <어魚·거車·주舟>(1929)는 고대 문자의 그림문자적 특성을 살린 그의 창작 능력을 볼 수 있는 작품이다.


<종정와전임모도> (1940)




<종정와전임모도> 열 폭 병풍(1925)



상형고문(象形古文)을 사용한 <어魚·거車·주舟>(1929)


이상적-오경석-오세창으로 이어지는 인맥에서 김정희(金正喜, 1786~1856)가 빠질 수 없다. 김정희 또는 김정희 류의 문예가 18세기 이후 성공한 중인 계급의 변화된 신분을 드러내는 장치로 작동했기 때문이다.

전시장에는 20세기 전반에 조선의 감식안으로 불렸던 오세창이 당시 진위 논란이 있던 김정희의 글씨를 보고 내린 판정문이 나와 있다. 서체가 매우 독특해 진위 논란이 있었던 『손자(孫子)』에 대해 오세창은 『손자』에 찍힌 인장이 김정희의 제자 신헌(申櫶,1810~ 1884)의 것임을 밝히고, 김정희가 당나라 서체를 참고했다는 점을 들어 『손자』를 김정희의 진품으로 결론내렸다.


오세창이 추사가 쓴 <해서 孫子>를 보고 남긴 글. 



나라가 기울어지다가 망하고, 서화 대신 생소한 미술이란 개념이 들어오고, 양반으로 상징되는 신분제가 사라지고 만인이 평등하다는 민주공화국 건국과 한국전쟁까지 겪은 오세창은 결과론적으로 18-19세기의 조선식 미학을 20세기로 전달한 감식안이자 예술가로 생을 마감했다. 전시는 그런 모습을 두루 두루 담아내고 있다.

이를 테면, 이번 전시품 목록에는 여느 상설전처럼 모두 국박 소장품이지만 출처는 동원 이홍근 기증품, 손세기-손창근 부자의 기증품, 이건희 기증품(통문관 관안) 기증품 등 20세기 한국의 대표적 컬렉터들의 기증품이 모두 포함돼 있다. 한반도에서 진행됐던 서화 유묵(미술품) 컬렉션이 18-19세기에는 중인 출신 컬렉터가 그 역할을 담당했고 20세기에는 상인 출신 부자들이 담당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20세기 중후반까지 18세기 후반에 형성된 ‘감식안’(가치관)이 20세기 중후반까지 이어졌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업데이트 2023.10.11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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