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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색화가 이화자가 그려낸 ‘오늘의 한국화’ <창연>전

-‘관습의 재현’ 이 아닌 전통을 바탕으로 구현한 현대 한국화의 세계

전시명 : ‘오늘의 한국화’ <창연>전
장 소 : 스페이스 소포라
기 간 : 2023.10.18 ~ 2023.12.9

글/ 김진녕



스페이스 소포라가 개관 초대전으로 한국 채색화가 내화乃和 이화자李和子(b.1943)의 개인전 <창연蒼然>(10.18-12.9)을 열었다. 진주 <한국 채색화의 흐름전 I>(2022), <한국 채색화의 흐름전 II> (2023)에 주요 작품이 선보이긴 했지만 개인전은 2019년 이후 5년 만이다. 전시장에 걸린 작품은 수는 20여 점으로 많지 않지만 1969년 작인 <회고 II>부터 80년대, 90년대, 2000년대 작품까지 작가의 활동 연대 전반에 걸친 작품이 골고루 나와 그가 50년 넘게 추구해온 작품 세계 전반을 가늠해 볼 수 있는 회고전이다. 


<작은 숲과 황혼> 2009년, 한지위에 분채, 60x76.5cm



전시제목으로 쓰인 ‘창연(蒼然)’은 ‘물건 따위가 오래되어 예스러운 느낌이 은근하다’는 뜻으로도 쓰인다. 이번 전시에 나온 작품 중 가장 오래 전에 제작된 작품 <회고 II>(1969)는 그런 뜻에서 상징적인 작품이다. 1965년 홍대 미대에 입학한 이화자는 재학 시절 조복순 교수에게 채색 다루는 법을 배우고 천경자 교수에게 채색화를, 배렴 교수로부터는 수묵화를 배웠다. 그때 홍익대 안에서 배렴(이상범의 제자)으로 상징되는 수묵파와 김기창-천경자로 대표되는 채색파간의 갈등이 상당했지만 홍대 입학 전 대구사범을 나와 교사직을 경험한 이화자는 스스로 커리큘럼을 짜서 수묵과 채색을 다 배웠다고 한다. 



<달밤> 1995년, 한지위에 분채, 145.5x97cm



“나는 내가 교과과정을 짜서 내가 배울 것을 찾아 다녔다. 그래서 수묵을 배울 수 있었다. 천 선생 오실 때는 그런 그림 감춰 놓고. 디자인과 가서 수업도 듣고. 지금도 내가 수묵을 못하는 것은 아니다. 안 할 뿐이다.”(이화자 인터뷰 중)


당연히 그의 작품에 박생광과 천경자의 채색화 요소만이 영향을 끼친 것은 아니다. 대학 시절 이상범과 배렴의 수묵화 수업을 들은 것에서 보듯 수묵화적인 요소를 활용한 풍경화나 대 그림도 그가 화면에 구축한 세계의 일부다. 이번 전시에 나온 <초여름>(1989)은 단순히 수묵 대나무 그림의 컬러 버전이 아니다. 그가 경성대 교수 시절 하동인근의 섬진강에서 스케치한 실경 풍경화이다. 해방 뒤 한국 미술대학에 자리잡은 채색화단은 기존 도제식 수묵화단의 개자원화보류의 도판에 의존한 학습과 이를 바탕으로 한 화면 구성이 아닌 실경 스케치 학습을 강조했다. 전통적인 화목이기도 한 대그림을, 실경 스케치를 바탕으로 먹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색을 올린 채색화는 ‘전통 동양화’의 관습을 넘어선 현대 동양화 또는 20세기 후반의 한국화라 부를 수 있다.



<초여름> 1989년, 한지위에 분채, 240x190cm


홍익대에서 천경자로부터 채색화를 배운 60년대 학번은 공통적으로 천경자에 대해 특정 테크닉을 배웠다기 보다는 채색화라는 방향성과 현대의 화가로서 작품을 어떤 자세로 해야 하는가 하는 점이라고 회고하고 있다. 실제적으로 채색화 테크닉에 관한 수업은 조복순 교수가 담당했고, 천경자는 그 시절 해외 스케치 투어 등으로 자주 휴직하기도 했다.

1960년대는 국전에서 ‘채색화는 왜색’이란 슬로건을 내세운 수묵 진영이 국전 주도권을 쥐고 심사 과정에서 채색 진영의 작품을 대거 낙선시키며 채색화와 수묵화의 갈등이 절정에 달했던 때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는 홍대 미대에서 천경자가 지도하는 채색반과 배렴이 지도하는 수묵반에서 그 갈등이 격렬하게 표출됐다. 국전 낙선전(1967)에 주도적으로 활동했던 이화자는 ‘천 선생과 약속한 대로’ 이후 국전에 출품하지 않고 비국전파로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이번 전시에 나온 <회고 II>(1969)는 그가 대학교 3학년이던 1967년 홍익대에 출강한 박생광 작가와 인연을 맺은 시절의 작품이다. 



<4월(April)> 1980년, 한지 위에 분채, 130x163cm 



“박생광 선생이 나를 가르칠 때는 내가 3학년 때라 졸업 작품으로 목기 그림을 준비할 때였다. 그때 조선조의 목기를 찾아서 국립중앙박물관이나 조자룡 선생의 에밀레박물관, 이대원 선생의 나무 기러기, 초대 서울시장을 지낸 김형민의 나무 기러기 등 좋은 작품을 찾아다니며 스케치를 하고 채색을 했다. 그때 박 선생이 아주 특이한 테크닉을, 내가 할 수 없었던 테크닉을 가르쳐주셨다. 그때 박 선생도 민속품에 대해 관심을 보이셨다.”



<초가을> 2018년, 한지위에 분채, 60x85.5cm



목기러기를 다룬 <회고I>(1968)은 대학 조교가 국전에 단체 출품하는 바람에 그의 마지막 국전 출품작이자 입선작으로 현재 국현에 소장돼 있다. 이듬해 그린 <회고 II>(1969)는 전통공예품을 다룬 정물에서 벗어나 퇴락한 고분 벽화나 절집 벽화의 요소를 현대 회화의 세계로 끌어들인 작품이고, 이는 종교화적인 요소를 감상화로 끌어올린 1990년대의 <달밤>(1997)이나 <기원 III>(1997) 같은 대표작의 세계로 이어진다.



<회고 II> 1969년, 한지위에 분채, 161x130cm



90년대의 기원이나 세월 시리즈에서 보여준 오방색에 먹을 섞어 부드럽고 세련된 색감 구사와 면분할을 통한 반추상의 화면 구성은 2000년대 풍경화 시리즈에서 추상화된 강변 풍경과 비정형화된 면분할로 표현된 숲의 세계로 이어진다. 전시장에 걸린 <내장사 뜨락>(2022)과 <쌍계사 십리벚꽃 길>(2023)같은 최근작에서 작가의 이런 끊임없는 모색을 확인할 수 있다.



<남이섬의 가을> 2023년, 한지위에 분채, 161x130cm



해방 직후 국전 시스템 안에서 벌어진 채색화의 왜색 논란은 오히려 채색화 진영의 각성과 끊임없는 혁신을 통해 전통 채색화의 현대화에 자극을 줬다. 해방 전 조선 화단의 최고 실력자로 인정받았던 김기창은 해방 뒤 한동안 국전 참여를 못했지만 누구보다 더 서구 사조를 작품 속에 구현하는 등 개방적인 혁신을 통해 대표적인 현대 한국화가로 거듭났고, 천경자는 자신의 작품을 ‘동양화’가 아닌 현대회화라고 불렀고, 박생광은 1980년대에 소재와 재료에서 기존 ‘전통’의 관습을 뛰어넘는 성취를 보여주며 동양화단과 서양화단의 경계가 무의미한 20세기 후반의 한국 대표화가로 발돋움했다. 천경자와 박생광에게서 배운 이화자는 전통 채색화 재료를 갖고 작품을 제작하지만 천경자와 박생광과는 다른 그만의 비전을 작품으로 완성해 50년 이상 달리고 있고, 스페이스 소포라에 걸린 작품을 통해 그가 쌓아온 성취를 확인할 수 있다.




업데이트 2023.10.20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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