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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정조시대 정치를 위한 수단과 그 산물 <탕탕평평, 글과 그림의 힘>

전시명 : <탕탕평평蕩蕩平平-글과 그림의 힘>
장 소 :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시실
기 간 : 2023. 12. 8.(금) ~ 2024. 3. 10.(일)

글/ 김진녕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탕탕평평蕩蕩平平-글과 그림의 힘>( - 24.3.10.) 전시가 열리고 있다. 도판으로는 널리 알려졌지만 부산 바깥으로 나오지 않았던 김두량의 <삽살개>, 역시 소장처 바깥으로 나오지 않던 김홍도의 <주부자시의도>, <화성원행도> 등 54건 88점(국보 1건, 보물 11건, 세계기록유산 5건,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1건 포함)의 유물이 전시장을 채우고 있다.



그림 김두량, 글ㆍ글씨 영조  <삽살개> 1743년, 종이에 엷은 색, 개인소장,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주최측에서는 이 전시에 대해 ‘글과 그림으로 소통한 두 임금, 영조와 정조 이야기'라는 소제목을 붙였다. 2024년이 영조英祖(재위 1724-1776) 즉위 300주년이라는 의미도 부여했다. 정조正祖(재위 1776-1800)가 19세기 직전에 사망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영정조 재위시기는 대영제국의 최전성기인 빅토리아 여왕 시대(재위 1837-1901), 청나라 최전성기의 마지막 주자 건륭제(재위 1735-1796)와 일치한다. 전지구적으로 동양과 서양 모두 산업혁명에 의한 새로운 패러다임이 등장하기 직전 구체제에서 융성을 누린 마지막 시기가 된다.

한반도에서도 21세기에 ‘전통’의 이름으로 소개되고 소비되는 유물이나 전통은 대개 기록이 풍부하게 남아있는 영정조대, 그리고 영정조대의 유산을 이어받은 것들이다. 우리 회화사에서 조선조 최고의 화가로 평가받고 있는 겸재 정선은 영조 연간, 단원 김홍도는 정조 연간의 슈퍼스타라는 점이 이를 방증한다. 17세기 대항해시대 포르투갈과의 무역으로 일본에 유입된 은銀이 면포 수입을 위해 조선에 대량 들어간 것이 17세기 말-18세기 중반까지다. 이 은은 왜란과 호란의 양란으로 피폐해졌던 조선에게 물질적 여유를 가져다주었다. 이렇게 확보한 은으로 조선왕실은 청나라를 통해 청화나 비단 등 사치재를 수입했는데 이는 조선조 후기의 왕실 도자기와 병풍화, 박래품이 진열된 문방구도 등에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21세기 대한민국의 박물관 진열대에 자리잡고 있는 전시 유물 대다수가 바로 이 시대의 산물이기도 하다. 그래서 18세기를 조선의 문예부흥기라고 부르기도 하고, 정조 이후 망국의 길로 걸어들어갔던 조선의 마지막 불꽃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양란 이후 조선의 경제적 부흥은 숙종 치세부터라고 할 수 있고, 영조 치세 중간에 왜와의 무역을 통한 은의 유입은 끝났으며, 정조 시대에는 은의 부재를 홍삼 무역을 통해 간신히 버텼다. 이전 시대에 쌓인 잉여력으로 버틴 무역수지 마이너스 시대지만 문화의 발전 단계가 그렇듯 늘 경제 최전성기보다 한 박자 늦게 문화의 꽃이 핀다. 그래서 영정조 시대가 조선 후기의 꽃으로 불린다.

전시장을 채운 유물은 영정조 시대의 복잡한 정치적 함의를 상징하는 그림이나 글이 다수를 이룬다.



김희성(?~1763 이후) <왕이 준천 공사를 보다> 《준천첩》 1760년(영조 36), 비단에 색, 이건희 기증품



조선 후기는 특히 장자 상속이라는 유교식 룰에 집착했다. 영조는 무수리의 몸에서 태어났기에 이런 룰에서 한참 어긋난 조건이었고 우여곡절 끝에 왕에 오른 뒤에도 전임인 ‘경종 독살설’을 주장하던 무리가 있었기에 정당성 확보가 제1관심사였다. 자식을 죽이고 손자를 상속자로 지명한 특이한 ‘선택’을 했기에 정권의 안위에 대한 불안감이 컸을 것으로 보인다. 그의 손자인 정조는 왕실과 신하의 다툼 속에서 상속 1순위였던 아버지가 합법적으로 살해되는 과정을 지켜보며 성장했기에 왕세자 신분임에도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처지였고, 왕위에 오른 뒤에도 왕권 강화가 최대 관심사일 수 밖에 없었다. 영조는 ‘탕평’이라는 정치 슬로건을 내세워 무리지어 세력 싸움을 하던 유교 사제계급의 견제를 제도화했고, 영조의 상속자인 정조도 이 슬로건을 공유하면서 무수리의 아들 영조가 왕위에 오른 과정이 정당했으며 그의 손자 정조에게 하늘의 천명이 있었음을 홍보하는 글과 그림을 다량으로 만들어냈다.

그림 같은 ‘잡기’를 왕이 즐기면 안된다는 것이 당시 국가 조선의 지배 이데올로기였지만 영정조 치세 기간에는 왕권 강화와 백성과 신하의 소통을 위한 수단이라는 명분으로 도화서를 적극 활용했다. 도화서에서는 신하와 임금의 수직적 ‘질서’를 강조한 다수의 궁중 계회도와 왕권 강화를 위해 애쓴 신하에게 내리는 초상화 등이 다수 생산되었고 덤으로 장식화도 다량으로 제작됐다. 그리고 그것이 한국의 고전 미술사의 주요한 유물이 됐다.




전시는 4부로 구성됐다. 제1부 ‘탕평의 길로 나아가다’에는 글과 그림으로 탕평의 의미와 의지를 전하는 서적과 그림이 나와있다. 주최측에서는 전시 보조 자료로 임금이 북극성으로 제자리를 지키고 신하와 사대부, 백성이 그 주위를 돌고 있다는 ‘황극탕평皇極蕩平’(임금이 표준을 바로 세우면 만백성이 그것을 자신의 표준으로 받아들인다는 뜻) 이념을 도형화시킨 다이어그램을 벽면에 붙여 놓았다. 그리고 ‘탕평’이 싸움이나 논쟁 따위에서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음을 뜻하는 말로 유교 경전 『서경書經』의 「홍범洪範」조에 나오는 “무편무당 왕도탕탕 무당무편 왕도평평無偏無黨 王道蕩蕩 無黨無偏 王道平平”에서 유래한 단어라고 소개하고 있다. 이를 풀면 “치우침이 없고 무리를 만들지 않아야 왕도가 탕탕하고, 무리를 만들지 않고 치우침이 없어야 왕도가 평평하다”는 뜻이라고 한다.

들머리에 놓인 전시물은 책이다. 영조가 왕위 계승자로 지명된 것은 정당하며, 이를 두고 수차례 역모 사건이 일어난 것은 정당한 것이 아님을 밝히는 <천의소감>과 그 한글판, 무신란(1728년)의 근본적 원인이 붕당 때문이라는 영조의 주장을 담은 <감란록>(1729, 영조5년) 같은 책과 미래의 유교 사제인 성균관 유생들에게 편나눠 싸우지 말라는 당부를 적은 탕평비(1742, 영조 18년)의 탑본이 나와 있다.



영조가 자신의 국정 운영 방침을 널리 알리고자 서적을 간행하고 이를 한글판으로 다시 발행해 일반 백성에게까지 메시지 전파를 노리고 탕평비라는 시각 기념물까지 세운 것은 영조가 글과 그림을 적극적인 정책 홍보수단으로 여겼음을 보여준다. 제1부의 압권은 김두량이 그리고 영조가 직접 그림에 대한 의미를 그림 위에 쓴 <삽살개>(1743, 영조19년)이다. 이 그림 자체가 김두량의 대표작으로 알려진 그림이기도 하고 실물을 보기 힘들었던 작품이라 더욱 반갑다. 이 작품에는 최근 TV드라마에서 영조를 연기한 배우 이덕화의 내레이션이 흘러나온다. 눈을 사납게 치켜뜨고 맹렬하게 짖는 개를 그리고 그 위에 영조는 ‘사립문을 밤에 지키는 것이 네 책임이거늘 어찌하여 낮에 또한 이와 같이 짖고 있느냐’라는 힐난조의 내용을 적었다. 아무 때나 마구 짖는 ‘개’가 무리를 지어 상소하는 붕당 패거리를 겨냥하는 것임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영정조 시대의 슬로건인 탕평이 어떤 상황에서 나온 것임을 압축적으로 알려주는 그림이다. 전시장 들머리에 놓인 네 권의 책과 탕평비 탑본에 흥미를 못 느끼던 관객은 이 그림 한 장으로 영조 연간 조정에서 벌어지던 긴장감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장득만, 장경주 등, <영수각에서 거행한 영조의 기로소 입사> 《기사경회첩》 제 31-32면, 1744년(영조 20), 비단에 색



제 2부 ‘인재를 고루 등용해 탕평을 이루다’는 영·정조가 글과 그림으로 조정의 지지 세력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나온 산물을 전시하고 있다. 영조를 적극 지지했던 ‘충신’ 박문수에게 선사한 초상화 두 점은 각각 중년기와 장년기의 초상으로 초상화 기법의 변천을 살필 수 있게 하고 있다. 이 섹션의 시각적인 하이라이트는 김홍도金弘道(1745-1806 이후)가 그려 1800년 초 세화로 바친 <주부자 시의도>이다. 정조는 이해 세상을 떴고 김홍도는 정조 사망 이후 몰년이 확인되지 않을 정도로 불우한 말년을 보내며 찬란했던 18세기 조선이 끝났음을 알리고 있다.


제 3부 ‘왕도를 바로 세워 탕평을 이루다’에서는 영·정조가 ‘효’와 ‘예’를 내세워 정당한 왕위 계승자임을 강조하는 상황을 다룬다. 영조가 원로대신 모임인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는 것을 기념한 <기사계회첩> 그림에서 자신과 사도세자의 자리를 나란히 배치해 왕위 계승의 정당성을 강조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섹션의 또 다른 전시 작품인 <진하도>는 정조가 의빈 성씨 사이에서 첫아들 문효세자(1782-1786)를 얻은 지 3개월 만에 원자로 책봉하면서 정조가 선조의 덕으로 원자가 태어났다며 아버지 사도세자와 어머니 혜경궁 홍씨에게 존귀한 호칭인 ‘존호’를 올리는 행사를 기록한 그림이다. 사도세자의 복권, 정조를 중심으로 인정전 뜰에 줄지어 선 신하를 묘사해 왕권 강화에 대한 정조의 의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그림이다.



제 4부 ‘질서와 화합의 탕평’을 대표하는 유물은 <화성원행도> 여덟 폭 병풍이다. 청과 왜의 비단 직교역으로 은유입량이 제로가 되고 오히려 청으로부터 왕실사치품 등의 수입을 위해 국내산 은을 내다 팔며 재정 상황이 악화되는 와중에 화성 신축이란 대규모 토목공사를 일으킨 정조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사도세자의 무덤이 화성에 있다는 점에서 정조가 아버지를 기리기 위한 의도가 포함되어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정조는 1795년 윤2월 9일부터 7박 8일 동안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화성에 다녀왔다. 이 행사 과정을 여덟 폭에 나눠 그린 게 <화성원행도>이며 사진찍듯 행사 대열과 상차림, 복식까지 다 기록한 일종이 기록사진으로 이후 조선왕실 행사의 기준 도판으로 활용된다.


최득현, 김득신 등 <화성원행도> 1795년(정조 19), 비단에 색



한국 드라마의 사극 장르에서 언제라도 흥행 보장을 하는 아이템이 있다. 특히 기록이 풍부하게 남아있는 조선시대 중에서도 권력 찬탈을 다룬 태종과 세조 치세, 임진왜란의 영웅 이순신, 파벌 간의 견제와 균형을 통해 왕권을 보호하고 아들을 죽이는 극한 선택을 하며 최장수 왕이란 기록을 세운 영조와 죽은 아버지를 복권 시키는 정조의 이야기는 드라마화 될 때마다 시청률을 보증하는 카드다. 사극으로 수십 회를 이어가며 시청자를 설득하는 드라마와 길어야 한 두 시간인 전시 체류 시간은 관람객을 설득시키는 방법이 다를 수 밖에 없다. 몇몇 전시 작품에 익숙한 배우의 목소리로 나레이션을 깔고 인터랙티브 모니터를 통해 영조와 정조의 스토리를 관람객과 나누는 방식을 채용한 것은 ‘무수리의 아들 영조’, ‘할아버지에게 살해당한 아버지 대신 왕위에 오른 정조’라는 엽기 드라마 요소 너머 정치와 권력, 세계관의 충돌을 수반한 18세기 조선 문화 생성의 현장을 전달하기 위한 수단이었을 것이다. 조선의 문예부흥을 일궜다는 두 왕, 영조와 정조가 왕권 강화를 위해서라도 ‘글과 그림’을 애용할 수 밖에 없었던 시대상황을 돌아보게 만드는 전시다.



업데이트 2023.12.13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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