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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혀 있던 114명 기증의 선의를 빛내다 <국립중앙박물관 기증관 재개관>

-2005년 용산 이전 이후 기증관 첫 개편
-기증자 위주의 공간에서 관람자 위주로 개편

전시명 : 국립중앙박물관 기증관 재개관
장 소 : 국립중앙박물관 상설관 2층
기 간 : 2024년 1월 12일(금)~
글/ 김진녕

동원 이홍근과 수정 박병래, 손세기-손창근 부자의 기증, 이건희 회장의 기증이 없었다면 18세기 이후 서화 부문에서 국립중앙박물관은 ‘국립’의 이름값을 할 수 있었을까,란 생각이 들 정도로 해방 이후 국립중앙박물관의 작품 수집에 기증의 역할이 컸다. 박물관 쪽에서도 1946년 첫 기증을 받은 이래 313명이 389차례에 걸쳐 모두 5만 여 점의 유물을 기증했고, 이는 국박 소장품의 11%를 차지한다고 밝혔다. 이 기증품을 집중적으로 소개하는 공간인 국립중앙박물관의 기증관이 1년 여의 공사를 거쳐 지난 1월 12일 다시 문을 열었다. 



이전에는 상설관 2층 남쪽 회랑을 기증관이 차지하고 있었다. 동쪽 끝의 이홍근실부터 서쪽 끝까지 기증자의 이름을 딴 기증실이 나란히 있었지만 실제적으로 기증자의 컬렉션으로만 꾸며진 방은 도자와 서화류의 이홍근실과 도자류의 박병래실, 고가구로 채워진 김종학실 정도였다. 이중 기획이란 이름으로 전시물 교체가 정기적으로 이뤄진 전시실은 이홍근실 정도였다. 이홍근실 구성은 도자류와 서화류가 반반이고 서화류는 일정 기간 이상 수장고 바깥에 나와있지 못하는 규정이 있기에 그나마 전시물 교체가 이뤄졌다. 나머지 기증실은 거의 디오라마 전시 수준의 붙박이장처럼 언제 가도 그 진열장, 그 조도 아래, 그 전시물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진열장이었다. 그래서일까 전시장에 대한 고객만족도도 최하위권이었다.




박물관 쪽에서 기존 기증관에 문제점이 있다는 것을 인정할 정도. 2016년께부터 개편 논의가 있었고, 2021년 초 발표한 보도자료를 통해 고객만족도 조사(2018년)에서 기증관이 6개 상설관(선사고대관, 중근세관, 조각공예관, 서화관, 아시아관, 기증관) 중 최하위를 기록했다며 ‘전시공간 재구성으로 관람 활성화’를 꾀하겠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실제적인 행동에 들어간 것은 기증관 회랑 서쪽 끝에 2021년 국보 반가사유상 두 점을 위한 단독실인 ‘사유의 방’을 만들면서 발길이 끊어진 죽음의 계곡 같았던 2층 남쪽 회랑에도 변화의 바람이 찾아왔다. 사유의 방 개관 이후 기증관 개편에 착수한 것. 이번 기증관 전시실 재개관은 용산 이전 20여 년 만에 국립중앙박물관이 내놓은 기증관 관람 활성화를 위한 새로운 답안지인 셈이다.




바뀐 기증관은 각 기증자의 이름을 딴 방 대신 기증1실부터 기증5실까지 다섯 개의 공간으로 구분했다. 서쪽 끝의 기증1실(오리엔테이션 공간)은 ‘나눔’이라는 주제로 기증자 관련 영상이나 기증자 이름을 벽면에 흘려주는 영상, 여러 기증자의 기증작품을 모자이크처럼 모아놓은 천정까지 이어진 대형 붙박이장, 붙박이 장에 들어가 맨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수백 점의 유물에 대한 정보와 디지털 이미지를 검색할 수 있는 단 한 대의 검색기, 널찍한 탁자와 소파 등 휴게 공간으로 구성됐다. 상품(유물)에 대한 개별 정보보다는 전체적인 이미지를 전달하는 백화점 쇼윈도 같아 보인다.

기증2실은 ‘문화유산 지키기와 기증’이라는 주제로 족보나 초상 등 문중 기증품, 국립중앙박물관회 기증품 등이 놓여있다. 특히 일제강점기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이 부상으로 받았던 고대 그리스 투구(보물 제904호)가 개편 이전에는 진열장 하나를 배정 받았었지만 이번 개편으로 단독 공간에 핀 조명을 받으며 놓여있는 것이 눈에 띈다. 사유의 방 디자인과 같은 맥락으로 인테리어에 의한 감정의 고양을 노린 전시 연출로 보이지만, 5만여 점의 기증품 중 그리스산 고대 투구가 단독 공간을 배정받을 만한 이유를 전시장 안에서 찾기 어려웠다.




기증3실은 ‘기증 문화유산의 다채로운 세계’라는 주제로 우리 옛 생활문화를 담고 있는 문방과 규방 공예품, 흙과 금속으로 만든 다양한 유물과 다른 나라의 문화유산 기증품 등과 함께 선보이고 있다. 이를테면 이전 기증관에서 청동거울이 기증자별로 자리했다면 이번 개편으로 청동거울은 하나의 주제 아래 모여서 전시되는 방향으로 바뀐 것이다. ‘다채로운 세계’라는 이름을 달았음에도 다양한 유물을 통일된 주제로 소개하기에는 역시 힘겹다는 것을 보여주는 섹션이다.



기증4실에 대해 박물관 측에서는 “‘전통 미술의 재발견’이라는 주제로 전통 미술과 현대미술이 만나는 공간”이라고 소개했다. 예술가의 안목으로 옛 물건에 숨어있는 아름다움을 찾아내고(화가 김종학의 목공예 컬렉션), 전통 미술품에서 받은 영감을 예술 창작 활동의 원천으로 삼은 현대 작가(유강열 등)의 기증품을 집중 소개하고 있다.

마지막 공간은 '기증테마공간'이라는 이름이 붙어있다. 기증 문화유산과 관련된 작은 주제 전시를 선보일 예정이라고 한다. 재개관 기념으로 이 공간에는 2020년 손세기 손창근 부자가 기증한 김정희의 <세한도>가 나와 있다.



이번 개편으로 그동안 볼 수 없었던 부분이 노출된 파트 중 유강열 컬렉션이 눈에 띈다. 기존에는 진열장 한 칸에 석간주 등 도자류 몇 점 전시에 그쳤지만 한국전쟁 직후 록펠러 재단의 지원을 받은 국립중앙박물관이 해외 미술을 받아들이는 창구로도 활용됐다는 것, 50-60년대 국내에서 판화 붐이 일었던 배경 등 근대미술사에 대한 이해를 넓힐 수 있는 전시물이 대거 등장했다. 또 문중이 기증한 유물도 별도의 전시공간을 얻었고, 국립중앙박물관의 오랜 후원자인 국립중앙박물관회의 기증품도 사실상 별도의 진열대에서 존재감을 드러내게 됐다.

반면 기존 단독실에서 서화류와 도자류를 대거 접할 수 있었던 이홍근 컬렉션은 이번 개편으로 도자류는 대형 붙박이장 안으로 들어갔고 서화류는 붙박이장 앞의 열 폭 정도의 병풍을 선보일 수 있는 유리 진열장으로 축소됐다. 박병래 컬렉션과 김종학 컬렉션의 진열 공간도 축소됐다. 이번 개편으로 다음 기증관 개편 전까지 상설관에서 그들의 서화류 기증품을 볼 수 있는 공간은 서화실로 축소된 셈이다.


기존의 기증관 구성이 기증자 별로 칸막이를 나눠 놓는 기증자 위주의 공간이었다면 이번 개편은 칸막이를 없애고 주제를 부여해 관람자 위주로 재구성하려는 의지를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기존 기증관에서 313명의 기증자 유물 중 20여 명의 유물만 소개했는데 이번 개편으로 114명의 기증 유물을 소개하는 것도 다양성 측면이나 기증의 선의를 빛낸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보인다.


다만 성인 관람자의 키를 한참 넘는 대형 진열장 꼭대기에 놓인 도자류는 인테리어용 반짝이는 오브제로 가져다 놓은 것이지 관람을 하라고 놓은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그렇게 놓인 수백 점의 유물의 정보를 알아볼 수 있는 인터랙티브 모니터는 달랑 하나인 점이나, 대형 진열장 안에 산처럼 쌓아놓은 수십-수백 점의 도자류에 대한 정보를 어두컴컴한 조명 아래 깨알 같이 작은 글씨로 인쇄해 비닐로 코팅한 안내문은 관람자 위주라 하기엔 어려운 것 같다.



업데이트 2024.01.17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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