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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이 들고 있는 새로운 화두 <덩어리>

- 폐목, 폐철근 대신 가볍고 거대한 돌을 길어올린 정현의 신작

전시명 : 정현 개인전 <덩어리>
장 소 :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
기 간 : 2023. 12. 20(수) ~ 2024. 3. 17(일)
글/ 김진녕


조각가 정현(b.1956)의 개인전 <덩어리>( - 3.17)가 서울시립미술관 남서울관에서 열리고 있다. 

21세기 들어 한국 조각가 중 가장 활발한 작품 발표 활동을 하는 작가 중의 한 명으로 꼽히는 그는 산업화 이후 등장한 산업 폐기물인 버려진 침목, 불에 탄 나무 등치, 건설 현장이나 철거된 집에서 나온 폐목이나 폐철근, 석유 정제과정에서 나오는 찌꺼기인 콜타르(coal tar), 시멘트 제조과정에서 나오는 부산물인 아스콘 같은 재료로 자신의 생각을 구체화시켜서 보여주곤 했다. 당연히 그의 작품은 우유빛 카레라산 대리석이나 분홍색이 살짝 도는 한국산 화강암, 매끄러운 청동 작품 같은 것과 거리가 멀다. 

콜타르의 검은색이나 녹슨 철판 같은 거친 질감과 무채색의 작품을 발표해왔던 그가 이번 <덩어리>전에선 신작을 발표했다. 그것도 하얗고 커다란 부피감을 자랑하는데, 이전 작품에서 보이던 것들, 즉 직선과 직선이 거칠게 충돌하며 생기는 예각의 흔적 같은 디테일이 보이지 않는다. 흰색의 신작은 파도에 단련된 바닷가의 자갈을 연상시키는 둥그런 곡선으로 이뤄진 커다란 바위처럼 보인다.


팸플릿에는 모델링을 할 때 컴퓨터의 도움을 받았으며 작품의 재료가 스티로폼임이 쓰여 있다. 그가 지난해 여수 바닷가에서 머물던 시절 해변의 자갈을 주워 온 것을 모델로 했다고 한다. 밀도가 높은 해변의 작은 돌을, 덩치는 커다랗지만 가장 가벼운 소재 중의 하나인 스티로폼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주최측에서는 “이번 전시에서 처음 선보이는 정현의 신작은 재료와 재료의 부딪힘에서부터 시작된다. 개인전을 앞두고 정현은 그동안 손에 익은 조형어법과 기존의 관습을 비워내고 철저히 백지 상태로 시작하고자 했다. 2023년 초 여수 장도에 있는 레지던시에 초청되어 보낸 기간 동안에 작업 구상보다는 걷는 행위에 집중해 몇 달 간의 시간을 보냈다. 그때 발에 차이는 돌을 하나씩 작업실로 수집해 온 것이 이번 신작의 출발점이다. 모은 돌은 발견된 위치에 따라 파도에 심하게 마모된 돌과 거친 질감이 그대로 살아있는 돌로 구분된다. 이번 전시에 선보이는 신작은 수집한 돌을 모두 3D 스캐닝 기술을 통해 확대 축소하여 변형하고, 서로 다른 질감의 낯선 충돌을 의도한 결과물이다.”라고 소개하고 있다.

새로운 재료를 채택해 작업했지만 침목을 이용한 ‘서있는 사람’ 시리즈나 폐목을 이용한 이전의 작업처럼 작가의 개입을 최소화시키는 스탠스는 그대로 가져갔다는 얘기다.


그가 처음부터 이런 세계를 보여준 것은 아니다. 다만 그의 대표작이 된 ‘서있는 사람’에서 볼 수 있는 인체에 대한 그의 관심은 일관된 것이다. 

그가 홍대 졸업전(1982년 홍익대 조소과 졸업, 1986년 홍익대 대학원 조소과 졸업)으로 제출한 작품은 매끄러운 청동으로 만든 여성 누드상이다. 이 작품은 경기도 마가미술관 마당에서 볼 수 있다. 그가 1985년 중앙미술대전에서 특선을 한 작품도 사실주의적 인체조각이라고 한다. 또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 해오름 극장 3층 로비에 있는 국립발레단 단장을 지낸 임성남 흉상(2012)이 그의 정교한 인체조각 솜씨를 확인할 수 있게 해주고 있다.

그런 그가 지금의 작품 세계를 확립하게 된 계기는 프랑스 유학(1990년 프랑스국립고등미술학교 졸업)이다. 한 인터뷰에서 정현은 유학 초기 프랑스 국립고등미술학교 교수가 그의 기존 인체 작업에 대해 “시적 상상력이 안 보인다”는 평가를 했고 이를 계기로 “주장하기보다는 성찰하며, 어디서 왔나, 무엇인가 물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는 유학 이후 사람을 표현하는 구체적인 수단으로 조각도 대신 톱이나 도끼를 택해서 작업했다.


조각가 권진규의 상설전시관으로 1층을 내준 서울시립미술관 남서울관의 공간 구성상 정현의 개인전은 미술관 마당에 대형작품 석 점이 나와 있고 미술관 2층 전시실에 모두 30 여 점이 선보이고 있다. 2층 전시실의 반은 신작에 할애됐지만 신작이 모두 상당한 부피감을 갖고 있어서 실내에 전시된 신작은 6점이고 나머지는 모두 2000년대에 발표된 구작이다. 구작 중 제작 시기가 가장 이른 작품은 1998년 석고에 콜타르로 색을 입힌 작품 석 점이다.


X-선 필름에 콜타르로 작업한 드로잉 작품(2003년 작) 수십 점이 한 전시실을 배정받은 것도 눈에 띈다. 석탄을 재료로 한 두상 시리즈(2005)나 2006년 국현 올해의 작가상 수상 전시에 선보였던 아스콘을 재료로 만든 <누워있는 사람>(2004)도 오랜만에 전시장에 등장했다. 신작에 방점이 찍혀있기는 하지만 침목을 활용한 서있는 사람 시리즈를 빼고는 2000년대 들어 그가 선보였던 세계를 대략 더듬어볼 수 있게 구성된 전시이다.


전시 제목을 ‘덩어리’로 한 이유에 대해 주최측은 “이번 전시는 1990년대부터 현재에 이르는 조형적 흐름과 함께 조각, 판화, 드로잉, 아카이브를 포괄적으로 소개한다. 전시 제목 ‘덩어리’는 최소한의 개입으로 매체의 물성을 극대화하는 작가의 접근 방식, 작품에서 두드러지게 발견되는 조형적 특징과 더불어 정현 작품의 재료가 고유 존재로서 살아내고 견뎌온 ‘덩어리진 시간’을 함의한다. 이는 하찮거나 쓸모를 다한, 그러나 시간과 경험의 결이 응축된 재료에 주목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비조각적 재료를 조각화하는 정현 특유의 작업세계를 함축적으로 조망하고자 하는 것이다”라고 밝혔다.



보도자료에 인용된 작가의 말에 따르면 “소리가 나거나 밖으로 나오는 것이 아닌, 안으로 들어가는 생각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 같다. 문제가 안에서 응어리졌을 때 예술적으로 표출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라고 설명한다. 

응시와 최소한의 개입,이란 그의 태도는 재료만 달라졌을 뿐 그대로라는 얘기일 것이다. 

업데이트 2024.03.13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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