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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박물관의 이규호 회고전

-고려대박물관의 현대미술컬렉션을 만든 학예사이자 화가 이규호

전시명 : 이규호 화백 회고전
장 소 : 고려대학교박물관 백주년기념관 기획전시실
기 간 : 2024.6.1~6.30
글/ 김진녕


고려대학교 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이규호 화백(1920-2013) 회고전>이 열리고 있다. 이규호는 두 가지 정체성이 있다. 일본 다이헤이요(太平洋) 미술학교를 나온 서양화가라는 정체성과 국공립미술관에서 한국 근현대미술 전시를 기획할 때면 주요 작품을 빌려갈 정도로 알짜 컬렉션으로 유명한 고려대박물관의 현대미술 컬렉션을 만든 학예사라는 정체성이다. 이번 전시는 화가 이규호에 방점을 찍은 전시이다. 하지만 그의 작품 세계를 알기 위해서는 그가 1962년부터 1977년까지 학예사로 일했던 고려대박물관 시절과 그가 교류했던 화단의 면면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할 것 같다.


최근 몇 년 간 이규호라는 이름은 한국 현대 조각을 대표하는 권진규의 전시가 있을 때마다 언급되곤 한다. 스스로 생을 마감하며 신화가 된 권진규의 마지막 일정이 자신이 기증한 고려대박물관 방문이었고, 권진규 작품을 컬렉션에 포함시킨 실무자가 이규호였기 때문이다.



다음은 권진규 홈페이지에 나와있는 그의 생애 마지막 해 기록이다.

□1973년(52세)​

・1월~2월, 고려대학교 박물관의 현대미술실에 소장되는 작품을 요청하고자 관장과 학예원 이규호가 권진규의 아틀리에를 방문한다.
1월 19일, 학예원 이규호가 아틀리에를 방문해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권진규의 작품을 소장하고 싶다는 의지를 전한다. 이에 대해 권진규는 매우 기뻐한다. 22일, 관장과 함께 다시 방문한 이규호는 《마두》와 《자소상》 (1969~70 년, No.87)을 선정해 박물관으로 옮긴다. 29일, 사례금으로 15만원을 지불하며 작품을 한 점 더 기증해 줄 것을 의뢰하지만 권진규는 사절한다.

2월 3일, 이규호는 몇 차례에 걸쳐 《비구니》 (1970 년, No.88)를 추가 요청한다. 또, 그 자리에서 핵물리학자 박혜일(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교수)을 소개한다.

2월 6일, 다시 이규호가 아틀리에를 방문해 《비구니》를 가져오며 영문학자 안동림(고려대학교 강사)을 소개한다. 9일, 이규호는 권진규에게 종합 진단을 받도록 권유한다. 김문호, 권옥연에게 상담하지만 권옥연은 「몸의 병보다 마음의 병을 먼저 고쳐야 할 것이다」고 말한다.

​・3월 24일, 안동림, 이규호, 박혜일, 고승관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한다.

안동림의 집에서 함께 한 이 저녁 식사모임에서 홍익대학 공예과를 졸업한 고승관이 시작한 한자 운세에 모두가 흥미를 느끼는 가운데, 권진규는 「死」라고 쓴다.


・5월 3일, 고려대학교 박물관 현대미술실 개막식에 참석한다.

​9시에 아틀리에로 온 박혜일과 함께 점심 식사를 마친 후, 오후 2시 경에 고려대학교 박물관 현대미술실 개막식에 참석한다. 오후 5시를 지나 고려대학교에 온 김정제를 데리고 이규호, 안동림과 함께 박혜일의 집으로 간다. 저녁 식사 후, 10시 반까지 「 탄호이저」 등의 음악을 들으며 보낸다.


​​・5월 4일, 아침 8시 20분 무렵, 다시 고려대학교 박물관을 방문해 전시중인 자신의 작품을 본다. 도록을 몇 권 받아 11시 반에 귀가한다. 오후 1시경, 벌써 전날에 써 둔 유서 2통(박혜일과 김정제 앞)을 우송하도록 집안 일을 돕고있는 김영옥에게 부탁하고, 아틀리에에 들어간다. 오후 3시, 유족 앞으로 된 유서와 장례비를 위한 약간의 돈을 남기고 자살한다. 

온나라가 곤궁하던 1970년대에 작품을 수집하러 다니는 대학박물관 학예사의 고단한 입장과 국립현대미술관을 빼고는 이렇다할 현대미술관이 없는 나라에서 현대미술실을 만든다는 얘기에 기뻐하며 ‘터무니없는’ 대가에도 기꺼이 작품을 기증한 작가가 자신이 떠난 뒤 남아있을 자소상과 작별하는 장면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이 권진규 생애의 마지막 챕터는 지난해 5월 고려대박물관 현대미술실 개관 50주년 기념전 <지천명에 화답하다> 전시에 출품된 이규호의 ‘현대 작품 수집일지’의 일부가 공개되면서 ‘1973년 한국현대미술사’의 한 장면으로 완성됐다.


다음은 전시에 공개된 이규호의 수집일지 중 1973년 1월.

■ 이규호 "현대작품수집일지" 중 1973년
1월 9일(화) 맑음

신청한 사례금을 가지고 O선생 화실에 요후 6시경 향하다.

O선생의 계산과 나의 사례금 전달이 서로 맞지 않아 O선생에게 불안감마저 드리계 되어 몸둘바를 모르겠다. .. 이 불안감은 내 개인에 이익이 아니고 하나의 문화사업에 밑거름이 된다는 나 스스로의 위로를 하며 마음을 달래다.

1월 26일(금) 눈

... 오후에 이항성씨 댁을 예방, 동석 중인 불란서 화가평론가협회 부회장과 인사소개가 있어 좋은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중섭씨 작품 <꽃과 어린이>를 기증받아 즐거운 마음으로 학교에 돌아요다. 오지호 선생과의 약속을 내일로 연기, 전화하고 귀가하다.


5월 3일(목) 맑음 (현대미술실 개막일)

... 원로들께서 많이 불참하시어 섭섭한 감은 드나 하여튼 대성황을 이루다.

이 날이 오기를 준비하기를 다하였고 심신을 다해 마련하였으나 100% 진행되었다고는 믿을 수가 없으며 앞으로 계속 힘써서 3, 4년 후에는 최고 일류의 미술관을 만들어 보겠다는 욕심 뿐이다.

이규호가 50여 점의 작품을 모아 현대미술실을 개관한 고려대박물관의 현대미술 컬렉션은 2024년 기준 1200여 점을 헤아리는 규모로 발전했다. 권진규의 마지막 눈인사를 받았던 자소상과 비구니상은 고려대박물관 현대미술 컬렉션의 상징과도 같은 작품이 됐고 3층 현대미술실의 자소상과 비구니상 자리엔 7월 말까지 제주도립미술관의 <시대유감>전에 출장 중이라는 안내문이 붙어있다.

집안에서도 큰 소리 내는 것을 싫어하던 조용한 성품의 그가 화단의 이권 다툼으로 매해 불난집 처럼 시끄럽던 국전 참여에 발을 뺀 것은 그다운 선택으로 보인다. 하지만 한정된 재원으로 현대미술실을 만들기 위해 작품을 수집하는 것 역시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하는 입장이라 그의 수집일지에는 그 스스로도 화가인 그의 고민과 괴로움, 미안함이 드러난다. 그럼에도 그가 대학박물관의 현대미술 컬렉션에 적극적이었던 것은 명분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규호 작가의 아들인 이종훈은 부친의 고려대박물관 시절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1962년 당시 고려대 총장이던 유진오 박사님은 박물관이 유물만 있는 게 아니라 현대 회화작품도 필요하다는 생각을 가지셨던 분이었다. ‘뮤지엄의 역할이 다양화되기 위해 현대미술 소장의 필요성을 느끼셨고 그 역할을 부친(이규호)을 스카웃해 맡기신 것이다. 이어 1970-75년 총장을 지낸 김상협 선생과 뜻이 맞아서 박물관에 현대미술실을 만들기로 하고 본격적으로 작품을 수집했다. 당시 유물이나 고미술쪽은 윤세영 교수가 맡아서 했고, 현대미술은 아버님이 담당했다.

73년 50여 점의 작품을 모아서 현대미술실을 만들어 개관식을 했다. 개관전을 하고 나니까 많은 작가들이 적극적으로 나도 기증하고 싶다, 내 작품도 매입해달라는 분위기가 강하게 형성됐다.”



이규호, <만월>, 130x162cm, 1982


작품 수집에는 ‘화가 이규호’의 인맥도 한 몫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기창(2013-2001)은 서울 탑골공원과 이웃한 집에서 태어난 이규호에게 탑원(塔園)이라는 호를 선물했다. 그만큼 친했다는 얘기다. 물론 20세기 한국화를 대표하는 김기창의 작품도 고려대 현대미술컬렉션에 들어있다. 이규호는 탑원이란 호를 작품에 등장시킨 적은 없지만 탑에 대한 그의 유년 시절의 기억을 작품 속에 이끌어냈다. 80년대 후반부터 등장하는 달맞이 꽃과 탑 시리즈에는 그가 유년기에 마주쳤을 법한 원각사지 10충 석탑을 연상시키는 원통형으로 단순화된 탑이 화면에 등장한다.


이규호, <달맞이 꽃과 탑>, 91x91cm, 1989


이규호는 다작을 한 것은 아니지만 해방 뒤부터 쉬지않고 꾸준히 작업을 했다. 미술평론가 이구열이 쓴 <해방공간(1945∼50)의 우리 문화예술 미술>이란 글에는 ‘1946년에 조형예술동맹 결성에 참가하였다가 그것이 좌익노선의 조선미술동맹으로 이어진 뒤에 이탈한 손찬성(孫讚星)*김찬희(金讚熙)*이규호(李圭皓)*방덕천(邦德天)*조관형(趙寬衡)의 5인 양화가가 제작활동의 자율성을 다짐하면서 모였던 작은 단체이다. 1947년 12월에 동화백화점 화랑에서 창립전을 가졌다’란 대목이 나온다.


이규호는 한국전쟁 뒤에는 1958년 이항성 주도로 설립된 한국판화협회에 유강렬(劉康烈), 최영림(崔榮林), 이상욱(李相昱), 박성삼(朴星三), 박수근(朴壽根), 최덕휴(崔德休), 전상범(田相範), 임직순(任直淳), 장리석(張利錫), 변종하(卞鍾下), 김정자(金靜子), 차혁 등과 함께 창립회원으로 참여한다. 이후 활발한 활동을 펼치다 1962년 고려대 학예연구원으로 스카우트되면서 판화 작업 보다는 회화쪽으로 작업의 중심추가 기울었다. 이번 회고전 전시장에는 1959-1963년 작업한 그의 판화 작품과 목판 원판을 볼 수 있다.


고려대 박물관에서 일하면서도 그는 꾸준히 작업을 이어갔다. 보문동에 있던 작업실은 그의 다이헤이요미술학교 선배이기도 한 손응성 작가의 고택과 가까워서 교류가 잦았다. 그러다 작업실을 돈암동으로 옮기면서 인근의 권진규 작업실을 자주 드나들며 자연스레 친분을 쌓았고 공주릉 근방의 번동 작업실을 거쳐 말년의 양주 작업실로 이어진다.


이규호, <달과 달맞이꽃>, 91x91cm, 1991



그의 시그니처로 자리잡은 달맞이꽃 시리즈는 1970년대 후반에 등장한다. 고대 교정을 거닐다가 우연히 마주한 달맞이꽃을 보면서 마음이 크게 움직였다고 한다.


이규호, <달의 변천>, 91x91cm, 1986


이종훈은 “아버님이 워낙 달맞이 꽃을 좋아하셨다. 늦게 피는 꽃, 기다리는 꽃, 말없이 피는 꽃, 이런 모습이 당신의 모습과 비슷하다고 생각하셨다. 그래서 달맞이 꽃을 좋아하셨다”고 전했다.


이규호, <달과 달맞이꽃>, 91x91cm, 1987


구체적인 형상을 갖던 달맞이 꽃은 달빛에 빛나는 풍등 같은 단순화된 또는 추상화된 형태로 나아간다. 이규호는 90년대 초반부터 비구상적인 요소가 드러난 작품을 선보이기 시작해 90년대 후반부터는 비구상쪽으로 완전히 기울었다. 차고 이우는 달의 모습을 기하학적인 선에 담아낸 ‘달의 변천’ 시리즈에는 노란 사각형의 색점이 달맞이 꽃이 됐다.

이규호의 대규모 전시는 작가의 생존 당시 2009년 9월 조선일보 미술관에서 가졌던 미수전 이후 처음이다. 이번 전시를 통해 유족이 소장하고 있는 150여 점의 작품 중 주요 작품을 볼 수 있다.

열악한 재정 상황 아래에서도 1960-70년대 한국 미술의 대표작을 수집하던 그의 열정은 미술대학이 있는 대학미술관이나 어지간한 국공립 미술관에 없는 컬렉션을 만들어냈다. 그런 과정을 통해 쌓인 감식안과 미감, 시대를 보는 눈, 예술을 보는 눈은 이규호의 작품 세계에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거친 마티에르와 단순화된 형태와 미묘한 색감의 변주가 드러나는 이규호의 후기 작품을 보는 것은 20세기 한국 현대미술사를 반추하게 만든다.




업데이트 2024.06.12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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