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명 : 한국화와 격변의 시대, 여성 삶 예술
장 소 : 서울시립미술관
기 간 : 2024.8.8 ~ 2024.11.17
글/ 김진녕
서울시립미술관에서 《격변의 시대, 여성 삶 예술》전(24.8.8.- 11.17)이 열리고 있다. 전시의 부제는 ‘천경자 탄생 100주년 기념’. 전시에 등장하는 작가는 23명으로 정찬영, 이현옥, 정용희, 배정례, 박래현, 천경자, 박인경, 금동원, 문은희, 이인실, 이경자, 장상의, 류민자, 이숙자, 오낭자, 윤애근, 이화자, 심경자, 원문자, 송수련, 주민숙, 김춘옥, 차명희 등 해방 직전부터 1980년대 국전 시대까지 당대에 이름을 얻었던 여성 작가들의 작품을 골라서 보여주는 전시다. 여성 작가 중에서도 이른바 한국화라고 불리는, 둥근 형태의 전통적 붓을 이용해 종이에 그림을 그리는 작가들, 그 중에서도 색을 다루는 기량을 익히고 작품에 반영한 작가들 위주로 작품이 선보이고 있다. 물론 이현옥, 이인실 등 수묵 위주의 작품을 선보인 작가도 들어있지만 전반적으로는 색을 다룰 줄 알았던 작가로 라인업이 짜여 있다.
참여 작가 명단에 천경자(千鏡子, 1924-2015)가 홍익대 교수 시절 가르쳤던 류민자나 이숙자, 오낭자, 이화자가 들어있지만 이들이 참여 작가의 절반을 넘는 것은 아니다. 또 천경자와 비슷한 시기에 일본 여자미술학교를 나와서 일제 강점기에 선전에서 최고상을 탔고 1970년대에는 최고의 추상화가로 불렸던 박래현(朴崍賢, 1921-1976)이 선전에 입선 후 1951년 부산에서 열린 개인전에 선보인 <생태>로 스타가 된 천경자보다 이름값이 낮다고 말할 수는 없다. 천경자나 박래현이나 이름 앞에 ‘동양화가’나 ‘여류화가’ 등의 군더더기 수식어를 달지 않고도 이름이 통하는 20세기 한국의 대표적인 화가다. 그런데 왜 서울시립미술관에서는 일제강점기 말기부터 광복과 한국전쟁, 국전 시대까지 20세기 중후반을 아우르는 회화 전시를 기획하며 ‘천경자’라는 부제를 달고 ‘격변의 시대, 여성 삶 예술’이란 제목을 달았을까.
주최측에서는 천경자가 살아 생전 전통적인 회화를 한국의 현대회화로 이어간 '태도'를 높이 산 것 같다. 전시 자료에 보면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천경자는 학교에서 제자를 가르칠 때도 어떤 틀을 제시하거나 강요하지 않았고, 제자의 성향과 작업 방식을 존중했다. 그의 자유로운 태도와 교육 방식은 그가 제자 류민자, 이숙자, 오낭자, 이화자 작가가 어떤 틀에 갇히지 않고 그림을 배우고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할 수 있는 밑받침이 되었다. 이들만이 아니라 전시에 참여한 많은 작가가 그의 작가적 태도에 큰 감화를 받았다고 회고하고 있다.
천경자는 1961년 11월 9일 자 『조선일보』 기사 「한국화는 형성될 수 있을까」에서 이상범, 고희동, 박노수와 달리 동양화에 관해 “세계 조류상으로 보아 모든 것이 변해가고 있다. 동양화 역시 변해가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유행성(流行性)만 찬양하거나 시대 조류에 아부해서도 안 되지만 역사의 흐름에서 얼굴을 돌려서는 안 된다. 나는 원칙적으로 ‘한국화’를 반대한다. 왜냐하면 ‘일본화’란 것이 국수주의적 경향을 가지고 대두된 것인데 한국화를 운운한다는 것도 따지고 보면 쇄국적이고 협소한 굴레에 매어 달리는 격밖에 안 되는 것이다. 화가가 자기 나라에 사는 이상 성격이나 감정도 물론 자기 나라의 생태를 나타내게 마련인 데 ‘한국화’해가지고 담을 쌓아 놓으면 작가의 자유로운 개성이 오히려 죽어 버리기 마련이다. 현대에서 동양화나 서양화의 구분이 재료로써 갈라놓게 되는데 지금 ‘한국화’ 운운하는 것은 난센스다. 그리고 동양화를 묵화로 그려야 한다는 그릇된 생각을 버려야 한다. 강서벽화만 보더라도 색채가 있었고 인도화도 그렇다. 동양화에서 묵화도 있을 수 있고 채색화도 있을 수 있다. 자유로운 창작적 개성 속에서 한국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표현한다면 그것이 곧 한국의 독특한 미가 생기는 것이지 굳이 ‘한국화’라고 이름 붙여 좁은 울 안에다 집어넣을 필요가 없다.”라고 당시로서는 매우 진보적인 생각을 밝혔다.
실제로 천경자는 평소 자신이 그리는 그림이 '천경자의 그림'이고 현대의 그림이지 전통 회화나 한국화로 규정되는 것에 거부감을 보였다는 많은 에피소드가 전한다. 주최측에선 “이번 전시는 그간의 전시나 연구와 달리 천경자 작가의 이런 현대적 사고방식을 부각하고 그가 미친 영향, 그리고 당시 그와 동시대를 살았지만, 천경자와 달리 일제강점기로 인해 동양화에 씌워진 굴레를 벗어나기 쉽지 않았던 여성 작가들을 조망하고자 했다”고 밝히고 있다.
천경자, 1972, 꽃과 병사와 포성, 종이에 색, 284 x 185 cm, 국방부 소장
전시장의 들머리에는 천경자의 출세작이자 천경자 월드의 상징이기도 한 <생태>가 걸려있고, 그 옆에 이번 전시를 통해 대중에게 처음 공개되는 170호 대작 〈꽃과 병사와 포성〉(1972, 국방부 소장)이 보인다. 월남전 당시 정부에서 종군 화가단을 파견했던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고, 이를 통해 다수의 전쟁기록화가 제작되기도 했다. <꽃과 병사와 포성> 옆에는 서울시립미술관이 기증받은 천경자의 스케치 중 월남전 관련 스케치가 함께 선보이는 심화과정도 붙어있다.
첫번째 섹션에 해당하는 이 공간에 주최측은 ‘격변의 시대’라는 이름을 붙였다. 한국전쟁 와중에 삶에 대한 강렬함을 표현한 <생태>, 60-70년대의 월남전 참전을 담은 〈꽃과 병사와 포성〉, 20대 후반에 겪은 4.19혁명(1960)을 작품화한 문은희의 설치 작품, 1977년 배우 윤정희와 피아니스트 백건우 부부의 납치사건 때 연루된 박인경의 작품, 5.18 직후 교련복을 입은 대학생을 통해 시대의 살풍경을 담은 이숙자의 <캠퍼스 훈련생>(1982), 제6공화국 말기 민주화 시위가 여전한 가운데 방독면을 쓴 경찰과 각시탈을 쓴 무당을 한 화면에 담은 이숙자의 <얼쑤! 얼싸!>(1991) 등은 민주화 10년간의 성과와 한계를 담은 그림처럼 보이기도 한다. 같은 공간에 걸린 이화자의 97년작 무제 두 점과 장상의의 <다시래기>(1988)는 60년대 민속 기물을 빌려온 국전풍의 ‘전통색’보다 한결 더 성숙하고 무르익은 한국화의 현대를 보여준다.
이숙자, 1982, 캠퍼스 훈련생, 순지에 암채, 210 x 152 cm, 작가소장
전체적으로 50년대부터 90년대까지 급변하는 사회적인 갈등을 작품에 반영한 작품들을 보여준 것이 첫번째 섹션이라면 두 번째와 세 번째 섹션에서는 ‘사회와 미술제도 I, II’라는 이름으로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서 돋보였던 여성화가와 해방 이후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에서 두각을 나타냈던 여성 작가를 살펴보고 있다. '사회와 미술제도 I'에서는 선전에서 각광을 받았던 정찬영과 정용희, 박래현, 천경자의 이름과 작품이 거명되고 있고, '사회와 미술제도 II'에는 한반도에서 처음으로 교육기관에 미술이 진입한 해방 이후 미술대학 출신의 학맥과 졸업생의 활약을 담고 있다. 천경자에게 배운 오낭자, 이화자, 이숙자, 채색을 가르치지 않았던 서울대 미대 출신의 장상의, 이대에서 안동숙에게 배운 원문자의 국전 입상작 등의 작품을 소개하고, 선전과 국전의 심사위원단이나 입상 명단을 자료로 정리해 벽면에 걸었다.
4전시실 격인 크리스탈 룸에는 백양회와 신수회, 춘추회, 묵림회, 시공회 등 한국화 관련 단체의 활동상을 아카이브 자료로 선보이고 있다. 5전시실에는 ‘여성, 삶, 예술’이란 소제목 아래 천경자부터 류민자, 금동원, 수묵 베이스의 이인실이나 장상의, 한국화를 기반으로 추상으로 들어간 송수련, 계속해서 시각언어를 다듬고 있는 원문자나 이화자의 최근작까지 전시실을 채우고 있다. 8월 20일 미술관 초청으로 전시관을 방문한 류민자, 오낭자, 이화자, 원문자 작가는 먼저 세상을 떠난 주민숙 작가나 윤애근 작가와 비슷한 연배다. 작가가 세상을 떠나면 그때부터 작품은 온전히 작품의 매력 만으로 시간과 싸우고 그 중에 어떤 작품은 불멸을 획득한다. 심금을 울리던 개인사도, 이권을 배분하던 화단의 권력도 시간 앞에서는 무력하게 사라지고 대개는 작품만 남는다.
《격변의 시대, 여성 삶 예술》전은 시절 유행에 맞춰 ‘여성의 눈’이라는 필터를 씌우기는 했지만 부족한 실물 작품 전시를 아카이브 자료를 통해 보충하고 작품을 통해 한국 사회와 한국화 진영의 20세기 중후반 흐름을 엮어 보여주려는 시도가 감지됐다. 너무 많은 자료와 작가 아카이브가 있어서 전시 공간이 좀 더 컸더라면,이란 생각이 들기는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