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명 : 흐르는 시간 속 지워지지 않는 질문들
장 소 : 김종영미술관 신관 사미루
기 간 : 2024.8.30 ~ 2024.10.27
글/ 김진녕
심승욱(b.1972) 작가가 국내에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린 것은 2015년 아트사이드에서 열린 개인전 <부재(不在)와 임재(臨在) 사이>부터다. 여기서 선보인 확성기와 초산비닐수지, 알루미늄 등으로 이루어진 검은색의 동명의 작품은 노래 <연가>를 배경음으로 사용해 마치 깊은 바다 속에 고립된 무엇인가를 연상케 했다. 이 작품은 이후 서울대미술관의 <예술보다 추한> 전 등 여러 전시에 선보이며 심승욱의 존재를 알렸다. 이후 심승욱은 여러 미술관의 기획전, 갤러리의 개관 기획전, 비엔날레 등을 통해 설치, 조각, 사진, 전시 기획 등 여러 형태의 작업을 선보였다.
이번에는 김종영미술관의 2024년 오늘의 작가로 선정되면서 <흐르는 시간 속 지워지지 않는 질문들>(8.30-10.27) 전을 열고 있다. 전시장인 김종영미술관 신관 3층에는 2022년 수애뇨 개관전 때 선보인 작업과 비슷한 맥락의 작품을, 2층엔 아카이브, 1층에는 그가 지금껏 대중에게 보여주지 않았던 컬러가 들어간 작업을 선보이고 있다.
정확히 말하면 3층의 작업도 기존 작업과 형태만 비슷할 뿐 디테일이 크게 변한 것이다. 괴수나 초인을 연상시키는 기존 검은색 대형 피규어가 우레탄폼이나 초산수지를 사용해 육중한 질량감을 표면에 드러냈다면 이번 전시에 선보이는 피규어들은 표면이 검은 비닐임을 감추지 않고 있다. 입김으로 불면 흔들거리는 것이 보일 정도다. 1층에 선보이고 있는 <구조-뼈에 붙은 살같이>나 <승리의 여신>, <계단을 내려오는 기계처럼>은 단열재로 쓰이는 아이소핑크와 미색이 보송보송한 느낌을 전해주는 미송구조목을 썼음을 가리지 않고 그대로 드러냈다. 기존의 그가 유지하고 있던 스탠스와 달라졌다.
그는 이전 작업의 골조를 그대로 드러냈을 뿐이라고 했다.
"갈등은 했었다. 이걸 거친 구조 그대로 드러낼까, 다듬을까 고민은 했다. 이번 전시에서 드러내고 싶은 내용이 있었다. 시간이 흘러간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시간이 흘러가는 것에 대한 감각. 예전에 시간이 가는 것에 대한 감각과 지금 시간이 흘러가는 것에 대한 감각이 다르더라.
시간이 지날수록 목격하는 것에 대한 대상이 달라지는 것 같다.
욕구가 달라진다고 할까 이런 걸 하고 싶어, 어느 시점에 내가 이런 걸 할 거야,라는 식의 계획 같은 것. 그런 류의 중요성이 시간이 지나면 달라지더라. 예전에는 그런 게 대단해 보였고, 목표지향적 행위 같은 것들이, 이 시점에서 보면 그게 큰 의미가 있을까 이런 생각이 들었다.
현대미술인 내 작업이나 현대미술이 높고 중요하고 멋지고 근사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 시점에서 보니, 그게 뭐 그렇게 대단한 일일까. 예술이란 게 대단한 일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뉴스를 보면 온통 싸우는 일 뿐이다. 이제는 왜 싸우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해서 이뤄진 게 대단한 것일까 의문도 들고.
작업 프로세스 상, 내가 뭔가, 이런 형식과 이런 스타일로 돼야 해, 그러면 어떻게든 이루려고 노력하고 실현하려고 했다. 내 표현력의 부족을 강박적으로 몰아붙이고 괴롭히고 그랬다. 이번 작업은 그런 생각이 없었다. 하다가 묶으니까 좋네, 하는 느낌이 들면 그렇게 끝냈다.”
<지난 시간 속에 남겨진 5개의 군상> 2024, 압축 단열재, 발포 우레탄폼, 미송구조목, 비닐, 가변설치
3층에 선보이고 있는 <지난 시간 속에 남겨진 5개의 군상>은 그렇게 작품 표면의 형태를 검은 비닐과 절연테이프로 마감했다. 겉면의 비닐과 몸통을 우레탄폼으로 밀착시켜 육중한 질량감을 표면으로 극한까지 밀어올렸던 것과는 다른 세계로 작가가 옮아간 것이다.
2020년 2월 그가 고동연과 함께 기획자로도 참여한 <새벽의 검은 우유> 전은 정재철이 생전에 참여한 마지막 그룹전이기도 하다. 심승욱은 그때 작가로도 참여해 녹아내리는 문장을 선보였다. 두 개의 장대 사이에 와이어를 걸고 그 위에 일부가 녹아내려 불완전한 형태의 문장, 이를테면 ‘Do not forget to smile’같은 영어 문장 형태를 걸어 놓았다. 이번에는 물질적인 형태도 생략하고 디지털 프린트로 더욱 알아보기 힘든 문자나 숫자의 뭉개진 형태를 전시장에 걸었다.
작품 제목도 ‘그날의 기억은’이거나 ‘그 시간 속 어느 날’이어서 작품 속 문장이나 숫자에 대한 정보를 극도로 줄여 놓았다.
“문자 시리즈는 (관람자가) 굳이 읽어내야 할 작업이 아니다. 2020년 전시에 선보인 철선에 걸린 녹아내린 글자 형태나 이번 디지털 프린트 작업이나 녹아내린/뭉개진 형태를 통해 일종의 감정 전달을 의도한 것이다. 이미지만으로 닿을 수 있는 감각을 전달할 수 있지 않을까란 의도다. '기억은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를 문자로 쓰면, 그 문장에 의미는 전달되지만, 감정은 전달되지 않는 것 같다. 감정 전달을 위해 그런 형상을 취했다.
소설이나 시는 문자를 통해 의미전달을 한다. 미술 작업은 의미 전달 이상의 감정을 전달하는 그 무엇이다. 그 무엇을 위한 작업이다.
오래 전 지나간 시간, 멀지 않은 지나간 시간들. 그 기억을 지금 잊어버리고 사는 것 같다. 빠르게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사는 것 같다. 인간의 욕구나 욕망이 잊어버리고 싶은 것을 빠르게 잊고 외면하는 것 같아서 그런 감정을 전달하고 싶었다. 완전히 그런 맥락을 전달하지 못하는 패널 속의 문장을 통해 그런 감정을 전달하고 싶었다. 문장 이상의 감정을 전달하려고 해본 시도다. 글로 완벽하게 전달해 버리면 그 너머의 감정이 전달되는 대신 보는 사람의 경험이 멈춘다. 그래서 글자 꼴을 뭉갠 거다. 단어로 연결된 문장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인간의 감정은 모호한 것을 포함한 것이다. 감정 속에는, 나눌 수 없는 모호한 것이 잔뜩 들어있다. 이런 모호한 감정을 작업의 주제로 생각한 적은 없는데, 항상 작업에서 구현하고자 하는 대상의 어떤 가치를 얘기할 때, 분명하게 규정지으려고 하다 보니까, 이건 규정할 수 없는 경계선이 있다는 것을, 작업을 할수록 그런 지점이나 단계를 느꼈다. 이건 시간과 관련이 있으니, 나이와도 관련이 있지 않을까. (웃음)”
인간의 감정은 모호한 것을 포함한 것이다. 감정 속에는, 나눌 수 없는 모호한 것이 잔뜩 들어있다. 이런 모호한 감정을 작업의 주제로 생각한 적은 없는데, 항상 작업에서 구현하고자 하는 대상의 어떤 가치를 얘기할 때, 분명하게 규정지으려고 하다 보니까, 이건 규정할 수 없는 경계선이 있다는 것을, 작업을 할수록 그런 지점이나 단계를 느꼈다. 이건 시간과 관련이 있으니, 나이와도 관련이 있지 않을까. (웃음)”
<구조_뼈에 붙은 살 같이> 2024, 미송 구조목, 압축 단열재, 아크릴 채색
전달하고자 하는 뜻을 모호하게 만들려는 의도가 아니라 전달하고 싶은 것이 말이나 글이란 수단에 담기엔 어려워서 시각 작품 형식의 문법으로 담아보려고 했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보편적인 것이고, 창의적인 것이라는 말을 몇 년 전 봉준호 감독이 어느 시상식에서 말하면서 다시 회자되기도 했다. 전시장 안에는 그의 글이 짧게 벽면에 붙어있기도 하다. 그 글 속엔 2023년에 일어난 그의 개인사가 짧게 담겨있었다. 흐르는 시간 속에 누구나 겪고, 그도 겪었어야 할 일이다.
<흐르는 시간 속 지워지지 않는 질문들>이라는 전시 제목의 ‘흐르는 시간 속’에 그도 포함되어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면 ‘지워지지 않는 질문’은 무엇일까.
<비닐산수> 2024, 압축 단열재, 발포 우레탄, 미송 구조목, 비닐
“시간이 갈수록, 살면서, 작업을 해도 그렇고, 답으로 와 닿는 게 아니라, 계속해서 모호하고, 질문만 자꾸 생긴다. 전시 제목은 신해철의 노래 가사 중 하나다. 시간과 기억, 잊혀짐, 지나감, 시간이 지나가면 과거 속의 기억이 잊혀지는 것, 등 이번 전시에서 내가 담고자 했던 것이 노래가사에 들어있더라.
예전에 내가 학생 때 노 대가에게 이 작품은 무슨 의미입니까, 물으면 '그냥 봐'라고 하셨다. 그때는 (그 대답을)비판적으로 봤는데, 내가 시간이 갈수록 보니까. 내 작업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하지 못하겠다. 내가 더 살아내면, 나도 예전 그 선생님들처럼 그냥 봐, 이렇게 되지 않을까 싶다.”
좌) <그 시간 속 어느 날-19550402> 2024,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 80 x 67 cm
우) <그 시간 속 어느 날-19760921> 2024,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 80 x 67 cm
<그 시간 속 어느 날-그의 시간 속에 나> 2024,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 80 x 67 cm
전시장 마지막에 걸린 작품의 제목은 <그 시간 속 어느 날- 그의 시간 속에 나>이다. 화면엔 뭉갠 숫자가 보일 뿐이다. 첫 줄엔, 아마도, 19361031, 둘째 줄엔 19720708, 셋째 줄엔 20230118로 추정되는 숫자가 보인다. 어쩌면 이것은 이 작품이 품고 있는 여러 뉘앙스 중 가족 사진으로 볼 수도 있다는 단서가 되기도 한다. 〈Some Things Are Better Left Unsaid〉, 그런 노래도 있었음이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