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명 : 龍산에 날아오른 청龍 : 김낙준 컬렉션
장 소 : KCS(Kumsung Cultural Space) 서울
기 간 : 2024.10.26 ~ 2025.1.18
글/ 김진녕
2023년 6월 소마미술관의 《한국 근현대미술》전에 나온 유영국의 〈무제〉(1990년대)와 김환기의 〈무제〉(1969), 나혜석의 〈파리 풍경〉(1927-28)과 〈스페인 국경〉(1928년 께), 이인성의 〈기도하는 소녀〉(1936), 2022년 5월 진주시립이성자미술관에서 열린 《한국 채색화의 흐름》전에 출품된 천경자의 〈굴비를 든 노인〉, 2019년 5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근대서화전에 출품된 안중식의 〈촉석루도〉(1913), 2018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신여성 도착하다》전에 출품된 이인성의 〈해수욕장〉(1946).
여기에 거명된 작품에는 공통점이 있다. 모두 금성문화재단의 소장품이다. 금성문화재단은 1965년 출판인 김낙준(1932-2020)이 창업한 금성출판사가 만든 문화재단이다. 금성문화재단이 한국 근현대 미술을 대표하는 작품의 수장고로 이름을 널리 알린 것은 그만큼 공공성이 있는 외부 전시에 소장 작품을 흔쾌히 빌려줬기 때문이다. 다만 자체적으로 소장 미술품을 상시적으로 보여주는 물리적인 창구(이를테면 미술관 같은 시설)이 없었다는 점이 아쉬운 지점이었다.
그러던 차에 금성문화재단에서 처음으로 일반인에게 소장품을 상시적으로 공개하는 전시공간을 만들었다. 금성출판사(회장 김무상)가 창립 60주년을 기념해 지난 10월26일 서울 용산구 삼각지역 부근에 복합문화예술 플랫폼 ‘KCS(Kumsung Cultural Space) 서울’의 문을 열었다.
경부선 철도와 1호선 전철이 지나는 철길과 맞닿은 용산의 창고터를 개조해 전시와 교육, 공연 기능을 겸한 문화 공간을 만든 것이다. 창고 터에 있던 세 동의 건물에는 각각 ‘뿌리’, ‘싹’, ‘흙’이란 이름을 부여했고 전시 공간인 뿌리에서 창업자인 김낙준 회장의 도자컬렉션 중 청화로 용무늬를 그린 대표급 도자를 모은 《龍산에 날아오른 청龍 : 김낙준 컬렉션》과 금성출판사의 출판, 교육 아카이브 전시 《좋은 책, 좋은 세상: Kumsung Since 1965》, 《NOUN TO VERB: 김세은 개인전》을 내년 1월 18일까지 선보인다.
그동안 미술계에선 금성출판사쪽에서 소장품의 외부공개를 준비하고 있다는 얘기가 흘러다니기는 했다. 지난해 5월 도자컬렉션만 정리한 책 『the Ceramics- 김낙준 컬렉션』이 발간되기도 했다. 이 책의 편집위원장으로 정양모가 이름을 올렸고, 도판 해설은 최건이 맡았다.
작고한 김낙준 회장은 발간사에서 이런 소회를 남겼다.
“나는 선조들의 창조적인 예술혼이 빚고 다듬어 낸 우리 도자 예술의 환상적인 아름다움에 전율을 느꼈으며, 시간이 흐를수록 그 깊이와 넓이를 헤아릴 수 없는 한국 도자 에술의 오묘하고 불가사의한 세계에 빠져들며 엄숙한 소명 의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직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작품들을 만날 때마다 알지 못하는 어떤 마력에 이끌려 한 점 두 점 수장하기 시작한 것이 오늘에 이르렸습니다. 어느 것 하나 내 혼을 사로잡지 않은 것이 없지만은 학계와 미술계의 자문을 거쳐 소장품들을 정선하여 이렇게 『The Ceramics』를 선보이게 되었습니다.
서양에서는 입체 추상 회화 기법이 20세기에나 비로소 시작되었지만, 우리 선조들은 천 년전부터 도자 회화에서 그 기법을 보여 주었습니다. 이는 한국인의 창의적 DNA가 완성한 최고의 경지로 보여집니다. 나는 이토록 아름다운 우리 도자를 신품이라 일컫고 싶습니다. 신품이란 신과 인간, 우주와 만물이 하나 되는 시공간에서 완성되는 게 아닌가 합니다. 그러한 작품들은 수장가가 찾아 나서서 만나는 것이 아니라 그만의 예술성을 찾아낼 수 있는 적임자에게 스스로 나타난다는 것을 나는 체험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여기 선보이는 도자들로 저의 일상은 늘 설레고 행복했습니다. 나는 시인처럼 도자에 관한 송頌을 쓸 수도, 감정가나 전문가처럼 도자의 가치를 밝히고 보증할 수 없습니다만, 어떤 흙에서 나온 보석이나 꽃보다도 도자가 아름답고 영원하다는 것을 알기에 가슴에 품을 수 있습니다. 또한 천 년 전 이름을 밝히지 않은 도공과 화원의 혼불이 구워 낸 우리 도자를 빛내기 위해 나는 미래의 장작 가마에 꺼지지 않는 불을 피우고자 합니다. 그리고 다음 세대가 날로 더 새롭게 그 빛을 더해 가리라 믿습니다.
…
나무에서 나온 최고의 산물이 종이와 책이며 흙에서 나온 최고의 산물이 도자라 생각하며 한평생음 지냈습니다. 내 생애를 바친 책의 세상과 도자의 세계가 하나 되는 이 황흘한 순간, 우리 앞에 또 하나의 우주가 열리는 듯합니다. 그 우주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백자 청화 용어문 병, 조선 후기 19세기, 높이 30cm
이 책에 「완물흥지玩物興志에 이른 도자 컬렉션」이라는 글을 실은 이토 이쿠타로伊藤 郁太郞 오사카 시립 동양도자미술관 명예관장의 글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The Ceranics』는 고려 편과 조선 편으로 나뉘는데 한눈에도 우수한 명품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특히 고려청자는 뛰어난 작품을 고루 갖추고 있었다.
'청자 상감 모란문 주자'와 '청자 퇴화 능화문 매병', 두 점을 비롯해 참으로 진실한 의장意匠들이 있고, '청자 원앙연적', '청자 상감 모란접문 항缸', '청자 철화 초화문 연적' 등도 보기 드문 명품이었다. 분청사기 중에는 '분청 인화 연화문 주자'가 절품이었고, 매병과 장군에도 눈부시게 아름다운 작품이 많았다.
조선백자 중에서는 '백자 진사 연지수금문 팔각병'이 세상을 깜짝 널라게 할 것이다. 진사 문양은 유일한 것이었는데, 처음 나왔을 때 혹자는 위작이 아닌가 하고 눈을 의심하기도 했을 정도였다. 연적에도 눈여겨봐야 할 명품들이 있다…”
백자 청화 운룡문 연적, 조선 중기 17~18세기, 높이 9.9cm
그런데 이번 전시에는 이토 이쿠타로가 상찬한 유물이 한 점도 안 나왔다. 심지어 『The Ceramics』에 1번과 2번 도판으로 맨 앞을 장식한 〈청자 소문 표형 주자〉(고려 중기 11-12세기)와 〈청자 음각 포도문 표형 주자〉(고려 12세기) 두 작품도 나오지 않았다. 도자전문가인 이완식은 두 유물에 대해 “순청자 계열인데 색이나 형태가 수준이 높다”고 평했다.
한반도에서 근대적인 컬렉션 개념으로 고려 청자 붐이 일었던 것은 일제 강점기였다. 개성 부근의 고분이 파헤쳐지면서 청자가 쏟아져 나왔고 이런 유물 중 상당수가 왜인에 의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 뒤에 일었던 것이 백자 붐이었다. 특히나 해방 뒤 남북이 분단되면서 고미술 시장에 새로운 청자는 보기 힘들어졌지만 조선 왕조의 왕실 도자를 굽던 광주 금사리와 분원이 있던 곳이 남한 지역이라 새로운 유물 공급이 상대적으로 양호했고 고미술 시장에서 도자 거래의 중심은 백자로 옮아갔다. 20세기 후반 한국 컬렉터의 대명사인 삼성 이병철 창업주가 청자를 모았고 그의 아들인 이건희 회장이 70년대 이후 컬렉션을 하면서 백자를 주로 수집했던 것도 이런 시대적인 흐름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다만 청자는 190년대 중반 이후 국교가 수립된 중국을 통해 북한에서 출토된 양품이 다수 국내에 유입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중 현재 국보로 지정된 청자 유물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 명품을 국내 소장가들이 많이 수집한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 작가의 도록 출판 등으로 자연스럽게 국내 미술계와 연을 맺은 김낙준 회장이 일찌감치 한국 근현대 회화작품을 다수 소장했지만, 도자 컬렉션은 비교적 늦게 시작했음에도 연대가 올라가는 고려청자 양품을 수집할 수 있었던 것을 이런 시대적인 상황과 연결해서 보는 시각도 있다.
금성문화재단에서 펴낸 김낙준 컬렉션의 도록은 청자로 시작했으나 첫 일반 전시의 주인공으로는 백자를 낙점했다. 용이 그려진 백자. 아마도 전시장이 자리잡은 곳의 땅 이름이 용산이라는 점을 감안한듯 싶다.
소담한 〈백자 청화 운룡문 연적〉(조선 17-18세기)부터 조선 백자의 절정을 담당했던 금사리 시기에 제작된 〈백자청화 쌍룡문 대준〉(조선 18세기, 높이 59cm), 광주 분원 시대에 제작된 〈백자 청화 용어문 병〉(조선 19세기) 등 청화 백자 석 점과 〈백자 철화 운룡문 준〉(조선 17세기, 높이 47.6cm)과 〈백자 철화 운룡문 항아리〉(17세기) 두 점 등 모두 여섯 점을 전시장에 배치했다. 도자 전문가인 이완식은 〈백자철화 운룡문 준〉은 광주 분원에서 제작한 것으로, 〈백자 철화 운룡문 항아리〉 두 점은 무늬 패턴이나 색상이 개성 가마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백자 철화 운룡문 항아리, 조선 중기 17세기, 높이 31.5cm
KCS서울 쪽에서는 “앞으로도 계속 김낙준컬렉션을 일반에 선보일 예정”이라고 밝혔다. 도자 컬렉션은 물론 김낙준 컬렉션의 회화작품도 이 창구를 통해 접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