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랴오닝성 자매결연 30주년 기념 명대 서화 특별전 《명경단청明境丹靑: 그림 같은 그림》
경기도박물관 1층 기획전시실
2024.12.5.-2025.3.2.
한반도에 인접한 중국 랴오닝성의 중심도시 션양에 있는 랴오닝성박물관은 20세기 중화인민공화국이 설립한 첫 박물관이다. 랴오닝성박물관이 가진 12만여 점의 다양한 소장 유물 중 서화는 중요하고 품격 있는 작품들이 많은 것으로 유명하다.
경기도와 랴오닝성의 상호 협력의 결과물로, 랴오닝성박물관의 명대 서화 명작 53점이 경기도박물관의 기획전시실을 찾아왔다. 명나라 전기 중기 후기를 적절히 아우르는 회화 전시는 최근 한국에서 극히 그 예가 적은데, 특히 한국을 최초로 방문하는 중국 국가 1급 유물이 6점이 포함되어 있어 흔치 않은 기회를 제공한다.
전시장 입구
조선 초기에 해당하는 명나라는 1368년 주원장이 원나라를 북쪽으로 쫓아내고 만든 한족의 통일 왕조로 276년간 존재했다. 명대 회화의 복잡한 흐름을 단순화해 키워드 중심으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명대 회화의 두 가지 경향
1. 보수적, 궁정, 직업화가, 북종화
남송의 원체화풍을 계승하거나 원나라 이곽파를 따르거나.
2. 원말 4대가 영향, 문인화가, 남종화
동원, 거연 계통으로 시작해서 나중에 동기창이 정점을 찍음.
초반, 그러니까 1500년 이전까지는 1번이 압도했지만 이후는 2번이 대세가 됐다. 물론 교체 절충기도 있었고 다른 그룹들도 있다.
이런 이분법을 염두에 두고 다시 명 초기로 돌아가면, 북쪽에서 대진(戴進, 1388-1462)이나 오위(吳偉, 1459-1508) 같은 화가들은 남송의 마원, 하규 일파를 따랐고 이들을 사람들은 절파(浙派)라고 불렀다. 그 전 원대에는 문인들이 남송의 원체화풍을 낮춰보아 전통을 이어받지 않았지만 명초 궁정화원이 부활하면서 남송의 회화가 다시 학습의 대상이 된 것이다. 산수 뿐 아니라 화조 분야에서도 마찬가지.
전시전경
이 전시의 1부에서는 명대 전반기를 다루며 절파 탄생기의 중요 작품을 선보인다.
대진 <여섯 명의 선종 조사(禪宗六祖圖卷)> 명, 비단에 채색, 33.8×219.5cm, 1급 유물
대진 <여섯 명의 선종 조사(禪宗六祖圖卷)> 부분
절파가 절파인 이유는 대진이 절강성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쇼케이스에 펼쳐놓은 초기 대표화가 대진의 도권에는 여섯 명의 선종 스님들이 차례로 그려져 있다. 원체와 밀접한 관계를 보여주는 그의 화풍은 마원과 하규 뿐만 아니라 멀리 북송대 산수의 품격을 접목시켰다.
여기 <사자머리 거위(狮頭鹅圖軸)> 명, 비단에 채색, 191.0×106.0cm, 1급 유물
명나라 황제(5대) 주첨기(朱瞻基) <만년송(萬年松圖卷)> 명, 종이에 먹, 33.2×453.1cm, 1급 유물
중기로 가면서 심주(沈周, 1427-1509), 문징명(文徵明, 1470~1559)으로 대표되는 오파(吳派)가 (절파를 대신해) 대세를 잡았다. 문인화가 원체화를 다시금 넘어서는 상황이라고 볼 수 있다. 강남(양쯔강 이남)지역의 경치와 문인들의 유유자적한 생활상을 그려내며 송, 원 시대의 문인화 전통을 발전시키고자 했다. 2부 전시장에 걸린 심주, 문징명, 당인(1470-1523), 구영(1509?-1559?) 등 중심 인물들의 걸작에서 문인화 전통의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심주 <국화 감상(盆菊幽賞圖卷)> 명, 종이에 채색, 23.4×86.0cm, 1급 유물
심주 <국화 감상(盆菊幽賞圖卷)> 부분
구영 <적벽부(赤壁賦圖卷)> 명, 비단에 채색, 25.7×90.8cm, 1급 유물
구영 <적벽부(赤壁賦圖卷)> 부분
당인 <초가집 부들방석(茅屋蒲團圖軸)> 명, 종이에 채색, 82.4×27.7cm, 1급 유물
명대 말기, 중국 화론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하나인 동기창(董其昌, 1555-1636)이 등장하며 큰 파도를 만들어낸다. 그는 (남종의 스탠스에서) 산수화의 남북종론을 제창, 문인화와 원체화로 대표되는 두 경향이 서로를 지속적으로 극복해 나가는 과정으로 대륙의 회화사를 재구성했다.
동기창 <연이어진 묵직한 봉우리(峰峦渾厚圖卷)>, 중국 명, 비단에 채색 ,21.2×159.5cm
동기창 <연이어진 묵직한 봉우리(峰峦渾厚圖卷)> 부분
진홍수 <풀싸움(鬪草圖軸)>, 중국 명,비단에 채색, 134.3×48.0cm
이 와중에 자연미를 표현하는 사의화조화의 새로운 국면(진순, 서위 등)이 나타나기도 하고, 인물화 방면에서 독자적 입지를 다진 명말의 진홍수(1599-1652)가 서상기, 수호전 인물 등을 그려 명대 회화에 다양성을 추가하기도 했다. 전시의 말미에 이들의 다양한 회화가 자리잡았다. 결국 심주, 문징명, 당인, 구영의 네 사람의 대가가 산수화의 한 경지를 마련해 명대 초반의 산수를 발전시켰지만 송, 원대의 산수의 명성을 뛰어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전시장의 산수는 전반적인 명대 회화의 분위기를 파악하는 데 큰 힌트가 된다.
박물관은 중국 명대 회화를 우리가 보아야 하는 이유를 설득하기 위해 “필묵과 서화는 동아시아 문명의 공통언어”라 설파한다. 주변 국가들의 예술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는 것은 우리 예술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한 필수 과정이다. 조선시대 절파는 어떤 방식으로 수용되고, 문인화가 자리 잡은 것에 중국의 화론들은 어떤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쳤을지에 대해 고찰할 수 있다.
전시전경
주체적 수용이라고 표현하든 아니든, 절파 등 명대 화풍과 화파가 조선의 회화에 깊이 영향을 주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중국의 회화를 남북으로 나누어 남종화를 우위에 두고 평가한 명말의 이데올로기는 청대 화단, 조선의 문인화, 일본의 남화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조선 후기에는 화원 화가와 문인의 문인화를 구분하기조차 어렵다.
일반의 입장에서 굳이 중국 그림을 봐야 할까라는 생각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명확하게 조선의 그림과는 다른 분위기의 명대 그림들을 비교하며 보는 일은 우리 문화와 예술, 사회와 역사에 대한 이해를 확실히 깊게 해 준다.
닮은 듯하면서도 낯선 것이 중국의 수묵화. 사전 지식 없이 편안하게 감상하기보다는 명대 회화의 중요한 국면을 기록한 화가의 이름과 그림을 살짝 공부해 가는 것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