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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 시대와의 결별, 모더니즘의 시작 ‘1900년 비엔나’의 주역

-과거와의 분리를 선언하며 새로운 시대를 준비한 예술가들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마지막 불꽃

전시명 : 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 - 구스타프 클림트부터 에곤 실레까지
장 소 :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
기 간 : 2024. 11. 30.(토) ~ 2025. 3. 3.(월)
글/ 김진녕


‘1900년 비엔나’를 앞세운 전시가 열리고 있다. 오스트리아의 대표적인 미술관인 레오폴트미술관의 대표 소장품 중 총 191점이 등장하는 <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전( - 3.3,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시실>이 그것이다.

전시에는 비엔나 분리파의 대표작가인 구스타프 클림트(1862-1918), 콜로만 모저(1868-1918), 요제프 호프만(1870-1956), 리하르트 게르스틀(1883-1908), 오스카 코코슈카(1886-1980), 에곤 실레(1890-1918) 등 오스트리아 모더니즘을 대표하는 작가의 회화와 포스터, 드로잉, 사진, 조각, 공예, 가구 등 총 191점이 등장했다. 전시에 등장하는 작품은 모두 오스트리아 비엔나의 레오폴트미술관 소장품이다.


의사 출신의 미술품 컬렉터 루돌프 레오폴트(1925-2010)와 그의 부인 엘리자베트 레오폴트(1926-2024)의 오스트리아 모더니즘 미술에 큰 관심을 가지고 약 5200점의 미술품을 수집했다. 이를 바탕으로 설립된 것이 레오폴트미술관이다. 레오폴트 컬렉션은 구스타프 클림트, 에곤 실레, 오스카 코코슈카와 같은 오스트리아 모더니즘을 대표하는 예술가의 작품은 물론, 1900년대 전반기 비엔나의 사회와 문화를 종합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다양한 사진이나 공예, 포스터 등 다양한 예술적 장르를 포괄한다. 이번 국립중앙박물관 전시에는 레오폴트미술관이 기획한 순회전 컨텐츠에 국립중앙박물관과의 협의를 통해 공예품 60점이 추가됐다고 한다. “미술, 음악, 디자인, 건축 등 다방면으로 혁신적인 변화를 보여준 비엔나 1900년대를 조명하기 위해 레오폴트미술관과 수 개월 간 기획 회의를 거쳐 한국의 대중에게 소개할 전시 구성안을 새롭게 마련했다. 초기 기획안과 가장 큰 차이점은 비엔나 디자인 공방을 심도 있게 다루기 위해 공예품 약 60점을 추가했다”는 게 박물관 쪽 설명이다.


국내에서 열리는 서양 미술 전시회가 유명한 작가의 ‘안 유명한 작품’ 또는 물량이 넘치는 판화류로 채우는 경우가 많았다. 흥행을 위해 유명작가의 이름을 앞세우는 게 가장 쉬운 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술사적 위상을 소개하기 보다는 작가의 이름을 내세우기 위해 맥락 없이 유명작가의 소품으로 채워진 ‘서양 명화 대전’이 방학 때마다 창궐하곤 했다. 하지만 이런 방식의 쇼는 거듭될수록 비판을 들었고 국내 전시회 소비자도 이런 꼼수에 시큰둥한 반응으로 돌아섰다.


요제프 호프만이 설계한 베니스베엔날레 오스트리아 국가관


<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전은 유명한 작가의 안 유명한 작품을 채워넣는 대신 심도를 택했다. 사실 일반 관객에게 클림트의 번쩍거리는 금색의 키스 시리즈, 실레의 뒤틀린 형상의 인물화 정도는 지명도가 있지만, 코코슈카도 낯설어하는 이가 많고 베니스 비엔날레의 오스트리아 국가관을 설계한 요제프 호프만(1934)도 ‘무명 건축가’에 가깝다.


하지만 비엔나 분리파를 설명하기 위해서 이들 6명의 존재는 꼭 필요하고 이들이 제작한 회화나 드로잉, 포스터, 식기나 가구 디자인은 과거와의 단절을 앞세운 이들의 ‘총체예술’ 개념을 이해하는 데 뻬놓을 수 없다. 그래서 기획자는 전시장 도입부에 놓인 포스터와 비엔나 분리파의 그때 전시장을 찍은 사진을 확대해 걸고 공예품과 아카이브 자료를 비중 있게 배치했다. 한국 대중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화가인 클림트의 경우 번쩍거리는 황금빛 '키스'류의 그림 대신, 과거와의 단절을 선언하고 분리파 운동을 주도하며 실레 같은 새로운 시대의 무명 화가를 후원한 ‘혁신가 클림트’의 면모를 소개하고 있다. 이런 시도는 요즘 관람객에게 성공적으로 평가받는 듯하다. 이 전시는 같은 기간 국내에서 열리고 있는 대형 전시 중 관람객 동원에서 최상위권을 기록하고 있는 중이기 때문이다.


전시는 프롤로그와 함께 총 5부로 구성돼 있다.

‘프롤로그, 비엔나에 분 자유의 바람’에서는 비엔나의 대도시 확장 프로젝트를 배경으로 명성을 얻은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를 소개한다. 전통적인 아카데미 화법을 구사하던 클림트가 인상주의와 같은 유럽 미술의 영향 속에서 점차 ‘클림트다운’ 특징이 나타나는 과정을 보여준다.


‘1부 비엔나 분리파, 변화의 시작’은 비엔나 분리파가 추구한 다양성을 소개한다. 클림트는 비엔나 미술계를 주도하던 보수적 성향의 비엔나 미술아카데미와 예술가협회에 반대하면서 1897년 4월 새로운 단체를 만들고 회장으로 취임했다. 그는 이 단체의 이름을 1892년 뮌헨에서 만들어진 ‘분리파’에서 따와 ‘비엔나 분리파’로 이름지었다. 여기서 ‘분리’란 과거 예술과의 단절, 새로운 양식의 예술을 향해 나아가는 것을 의미했다. 1898년 새로 지어진 비엔나 분리파 전시관 제체시온Secession의 입구에 쓰여진 “시대에는 예술을, 예술에는 자유를”이란 문구는 비엔나 분리파의 목표를 뚜렷하게 보여준다.

1부에 소개되는 비엔나 분리파 전시회 포스터, 잡지 ‘성스러운 봄’의 표지 디자인, 우표 디자인과 판화 등은 새로운 예술적 형식을 찾고자 했고, 이를 위해 특정 양식을 고집하지 않았던 이들의 다양한 실천 과정을 보여준다.


비엔나 분리파 전시회 포스터, 에곤실레



‘2부 새로운 시각, 달라진 오스트리아의 풍경’은 비엔나 분리파의 개방성을 다룬다. 클림트는 비엔나 분리파에 속한 예술가에게 오스트리아 밖에서 일어나는 예술 운동을 충분히 경험할 것을 주문했다. 이 과정 속에서 유럽을 풍미하던 인상주의와 상징주의의 영향을 받아들인 흔적을 볼 수 있다.

‘3부 일상의 예술로, 비엔나 디자인 공방의 설립’은 예술적 장르를 허물고자 설립한 ‘비엔나 디자인 공방’을 집중적으로 조명한다. 의자와 핸드백, 식기류 등 일상에 쓰이는 다양한 기물을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들였던 총체예술, 이는 중세적인 세계관의 선발대에서 산업혁명 시대의 후발 주자로 전락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예술가가 변하는 시대에 내놓은 혁신의 모색이기도 하다.


‘4부 강렬한 감정, 표현주의의 개척자들’에서는 에곤 실레로 대표되는 젊은 예술가가 등장한다. 실레는 보수적인 아카데미의 교수법에서 벗어나기 위해 동료들과 ‘신예술가그룹’을 창단한다. 이들의 활동 기간은 짧았지만, 세 번의 전시회에서 강렬한 표현주의적 경향을 선보이며 비엔나 예술계에 세대 교체를 알렸다. 표현주의로 두각을 드러낸 리하르트 게르스틀과 오스카 코코슈카가 4부를 대표하는 예술가로 소개된다.


‘5부 선의 파격, 젊은 천재 화가의 예술 세계’는 에곤 실레의 대표작들을 중점적으로 선보인다. 실레의 작품 세계를 ‘정체성의 위기,’ ‘모성,’ ‘검은 풍경화,’ ‘에로티시즘’ 등의 주제로 집중 소개하고 있다. 20세기 이전 유럽 대륙의 지배자는 합스부르크 왕가였고, 그 세력의 중심지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었으며, 이 중심지에서 베토벤이나 말러, 클림트 같은 낭만주의 음악과 미술이 꽃피웠다. 그 체제의 마지막 슈퍼스타인 실레는 비엔나 분리파의 막내로 1차 세계대전이 끝나던 1918년 10월 독감으로 28세의 짧은 생을 마감한다. 1918년 그해 봄엔 클림트가 세상을 떠났고 11월엔 대항해시대 이후 식민지 경영과 산업혁명의 확산으로 유럽 대륙에 부의 불균형한 성장(힘의 불균형)이 불러온 제1차 세계대전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패배로 끝났으며 비엔나 분리파는 완전히 과거의 유산이 됐다. 컬렉터 루돌프 레오폴트는 짧게 살다 간 에곤 실레의 작품을 집중적으로 수집하면서 그를 되살렸고 그 유산으로 세계 최대 에곤 실레 컬렉션을 보유한 레오폴트미술관이 탄생하게 됐다. 덕분에 이 섹션에서 양과 질이 보장된 실레의 작품을 집중적으로 볼 수 있다.


‘에필로그, 예술에는 자유를’에서는 전시장 들머리에 소개된 에곤 실레의 <원탁, 제49회 비엔나 분리파 전시회 포스터>가 영상으로 등장한다. 클림트가 사망한 직후에 그려진 이 포스터에는 실레가 클림트를 스승으로 각별하게 여겼다는 것을 알 수 있어서 과거의 유산을 자양분 삼아 입신한 클림트, 그런 클림트가 제시한 ‘현대’에 대한 비전, 그걸 작품으로 구현한 실레의 사례를 통해 전통과 혁신에 대한 의미를 되새김하게 된다.



이번 전시 도록에 실린 글 중 두 편을 짧게 인용한다.

<비엔나 모더니즘으로의 전환>

한스 페터 비플링어(레오폴트미술관 관정)

에곤 실레는 클림트를 거쳐야만 완전히 그의 반대 지점에 있는 표현주의에 이를 수 있다고 1908년과 1909년 무렵 스스로 인정한 바 있다. 클림트 또한 19세기에서 벗어나 20세기 초 아방가르드로 나아가기 위해 화려한 역사주의 양식을 먼저 거쳐야 했다. 혁신적인 비엔나 예술계의 진정한 해방 행위로 보아야 할 이 지적 인식체계의 전환은 1897년 비엔나 분리파의 창립으로 시작됐으며, 이는 오스트리아 모더니즘 예술의 탄생을 의미했다.

비엔나 분리파의 초대 회장을 맡았던 클림트와 그의 동료인 모저, 몰, 알프레트 롤러, 요제프 호프만 등은 함께 동시대 국제예술을 위한 중요한 기반을 만들었다. 분리파는 ‘총체예술 Gesamtkunstwerk’라는 개념을 통해 모든 생활 영역에 예술이 스며들게 함으로써 새로운 일상을 만들어내고자 했다. … 이 개념은 1903년 설립된 ‘비엔나 디자인 공방’을 통해 구현됐다.


<’총체 예술’에 기여한 예술 공예품>

에른스트 플로일(예술품 수집가)

‘총체예술’이라는 용어는 1827년 무렵 철학자 에우세비우스 트란도르프가 처음 이름을 붙였다. 이 개념을 열렬히 지지한 인물로 리하르트 바그너(작곡가)가 있는데, <미래의 예술작품>(1849)에서 바그너는 다양한 예술장르로 이루어진 통합된 예술작품을 가정하고 이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모든 예술 장르로 이루어진 위대한 총체예술은 각각의 장르를 어느정도 활용하고, 보편적 목적에 도달하기 위해 장르를 소멸시킨다.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 모든 예술의 보편적인 목적, 즉 완전한 인간 본성을 조건없이 즉각적으로 묘사하는 목적을 가진 이 이대한 총체예술은 개인이 임의로 이룰 수 있는 행위로 인식되는 것이 아니라, 미래 인류가 필연적으로 상상할 수 있는 공동작업으로 인식되어야 한다.” 수많은 사상가와 예술가가 바그너의 이론을 따랐으며, 그들은 모두 각자의 예술 장르와 운동이 동등하다고 믿었다. …

… 1903년 건축가 오토 바그너와 그의 제자 요제프 호프만, 콜로만 모저 등이 함께 설립한 ‘비엔나 디자인 공방’은 총체예술 작업을 창작 원칙으로 따랐다. 1905년 발행한 단체 성명서에서 그들은 예술적 관점에 따라 집 전체, 가구뿐만 아니라 가정에 필요한 모든 물건을 디자인하고 만들 계획이라고 밝혔다.

… 1897년 비엔나 분리파는 다음과 같은 격언을 남겼다. “우리는 고급 예술과 저급 예술, 부자를 위한 예술과 가난한 사람을 위한 예술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예술은 보편적인 선善이다.”



업데이트 2025.01.08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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