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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미술사 속 잊혀진 수집가 윤상의 부활

- 1950년대 한국미술품 컬렉터 윤상과 그가 주최한 전시
- 전시회장에 놓였던 방명록을 통해 되살린 1950년대 한국 현대미술의 현장

전시명 : 윤상 수집 현대화가 작품전 <털보 윤상과 뮤즈의 추억>
장 소 : OCI 미술관
기 간 : 2025.1.16.(목) ~ 2025.3.22.(토)
글/ 김진녕

평양 출신으로 과수원집 아들이란 정도만 알려진 윤상은 1950년대 활동하고 있는 당대 한국 작가(동서양화)의 작품을 모았다. 윤상은 그가 수집한 한국 현대회화 작품을 모아 1956년 7월 21일부터 29일까지 9일간 동화백화점(현, 신세계백화점) 화랑에서《제 1회 윤상 수집 현대화가 작품전》을 개최했다. 윤상의 요절로 단 1회에 그친 이 전시에는 고희동, 이상범, 도상봉, 천경자, 김환기, 장욱진 등 동시대의 유명 한국 동ㆍ서양화 원로, 중진, 신진화가 49인의 작품 64점이 출품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미술계에서는 현대미술관의 필요성도 제기될 만큼 의미가 컸다. 청강 김영기가 이 전시를 리뷰한 당시 신문 기사를 보면 동양화가의 활동이 더 많은데 전시 비중은 그렇지 않았다는 ‘섭섭함’을 슬쩍 내비쳐 당시 화단의 분위기를 짐작하게 한다. 이 전시는 전후 폐허가 된 서울에서 열렸던 큰 문화 행사였기에 방송이나 신문에서도 다뤘으나 그 뒤 윤상은 잊혀졌다.


이 전시가 되살아난 것은 2010년 <윤상 서화첩>이 한 경매에 나오면서부터이다. <윤상 서화첩>은 《윤상 수집 현대화가 작품전》 전시장에 비치됐던 방명록으로 전시장을 찾았던 출품 화가 뿐 아니라 1956년 당시 전시를 관람했던 대한민국의 공예가, 서예가, 배우, 문학가, 음악가, 영화감독, 초대 국립중앙박물관 관장 등 문화예술인, 국어학자, 기업가 등 104인의 다채롭고 생생한 그림과 기록이 들어있다. 이 방명록에는 둥근 붓을 쓰는 데 익숙한 서예가나 동양화가는 물론 손응성 같은 서양화가도 붓과 먹을 이용해 드로잉을 남겼기에 당시 화단이나 문화계 전반의 분위기를 볼 수 있는 생생한 자료이기도 하다.



윤상 수집 현대화가 작품전 기념 서화첩 표지


2010년에 케이옥션을 통해 <윤상 서화첩>을 입수한 OCI미술관에서는 <윤상 서화첩>을 기둥으로 삼고, 당시 전시에 출품됐던 작품과 수장가 윤상이라는 인물을 추적해 그에 대한 아카이브 자료를 전시장에 선보였다. 여기에 20세기 중반에 활동한 원로 사진작가 임응식의 초상 사진 중에서 <윤상 화첩>에 글이나 그림을 남긴 이들의 모습, 그리고 OCI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윤상 화첩> 등장 화가의 20세기 중반 작품 등 세 가지 카테고리를 중심으로 전시를 꾸몄다. 초서와 행서, 한글이 뒤섞인 방명록은 하영휘 전 성균관대 교수가 탈초하고, 인물과 작품에 대한 추적은 OCI미술관 쪽 인력이 담당해 <윤상 서화첩>을 중심으로 근현대서화와 국립현대미술관, KTV 국민방송, 임응식사진아카이브 외 개인소장품 등 130여 점이 등장하는 ‘1950년대 한국 미술의 현장’이 2024년 종로구 수송동에 재현될 수 있었다.


그때 전시에 등장했던 작품 중 이번 전시에도 등장하는 작품은 두 점이다. <윤상 서화첩>에는 1956년 전시에 출품된 작품 64점 중 작품 7점의 신문스크랩 사진이 남아있다. 장욱진의 작품 <가족>(1954년)은 당시 사진이 남아있어서 확실히 같은 작품이라고 할 수 있고, 유영국의 작품 <도시>(1955년)은 리플릿에 남겨진 작품 제목 <도시>를 통해 “같은 작품일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두 작품은 작품의 소장 이력 변화가 한국 현대미술사와 관련이 있는 것이라 흥미로운 면이 있다. 이번 전시에서 최초로 공개되는 유영국의 <도시>(1955년, 개인 소장)는 「윤상 전시 리플릿」의 33번 작품 유영국의 <都市>와 제목이 일치한다.


유영국 <도시> 1955, 개인소장


유영국은 ‘산’을 주로 그린 추상화가로 잘 알려져 있지만, <도시>를 통해 인공적인 풍경도 그렸음을 알 수 있다. OCI미술관의 유제욱 학예사는 전시 오프닝에 참석한 유영국 선생의 둘째 아들인 유건의 발언을 소개했다. 

“작품이 그려진 1955년은 유영국이 울진에서 서울로 이사오던 시기였다. 유건 선생이 ‘아버님이 그때 많지는 않았지만 도시 풍경을 그리시기도 했다. 그때 나온 작품일 수도 있다’는 얘기를 했다.” 

미술계에서는 유영국이 1970년대에 삼성 이병철 회장에게 처음 그림을 판매한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 전에는 작품을 팔지 않았다는 얘기인데 윤상이 이 작품을 소장하게 된 사연도, 이후 작품의 소장자가 바뀐 내력도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작품이 사진까지 남아있는 경우인 장욱진의 작품 <가족>은 2023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장욱진 회고전》에 출품된 개인 소장의 <가족>과 같은 작품이다. 이는 「윤상 전시 리플릿」(국립현대미술관 소장) 기록과 신문(연합신문 추정) 스크랩 사진을 통해 당시 윤상 전시에는 <마을>이라는 제목으로 출품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소장자가 바뀌면서 제목도 바뀐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OCI쪽에서는 “현대미술 작품이 창작되고 주인과 제목이 바뀌며 소비된 이력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한국 현대미술사 연구에 중요한 근거가 된다”고 밝혔다.  




윤상 서화첩 수록 신문 스크랩 중 장욱진의 <마을>


<윤상 서화첩>에 글과 그림을 남긴 인물 백 여 명 중 절반은 그 시대의 동ㆍ서양화가였다. 동양화가 및 문인화가 17인과 서양화가 38인 등 모두 55명의 서화가가 각자의 개성을 담아 윤상의 초상화(김기창, 임직순 등)를 비롯, 정물, 인물, 풍경 등 다채로운 축하 그림과 기록을 남겼고 그 그림이나 글을 쓴 주인공의 ‘풍모’도 임응식의 사진을 통해 전시장을 채우고 있다. <윤상 화첩>에는 화가 뿐 아니라 서예가 4인, 사진가 3인, 공예가 2인, 시인, 소설가, 극작가 등 문학가 10인, 작곡가 등 음악가 4인, 국어, 한문학, 역사학 등 학자 3인에 더해 배우, 영화감독, 김재원 초대 국립중앙박물관장, 기업인, 독립운동가 등 다양한 인물이 등장한다. 1950년대 대한민국의 학술 및 문화계 인물 간의 관계를 유추할 수 있는 자료인 셈이다.


동양화가 김기창이 윤상서화첩에 남긴 <윤상의 초상>


<윤상 화첩>은 당시 윤상이 한국 현대화단의 주요 작가와 가까웠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이지만 그들이 어떻게 가까워지고 어떤 소통 과정을 거쳤는지의 앞 뒤 이야기는 모두 사라졌다. 식민 통치와 한국전쟁, 남북분단, 새마을운동 같은 천지개벽같은 사건이 연이어 벌어진 한반도에서는 20세기 중반 이전 기록이 온전히 남은 게 드물고 한국전쟁 이전 현대미술사의 초반기의 주요 작품이나 인물사가 공백으로 남은 일이 비일비재하다. 이를 테면 윤상이 이중섭의 전시를 후원한 사람 중의 한 명이라는 것은 이중섭 아카이브에 들어있는 사실이고, 이번 전시에 윤상이 사용한 인장 중 이중섭의 게 모양이 그대로 들어간 인장이 찍힌 방명록이 전시되고 있어서 윤상과 이중섭의 관계가 다시 한번 입증됐다. 재능 있는 화가가 있었고, 그 재능을 사랑하고 격려한 수집가가 있었고, 1956년 어느 날 그들은 전시장을 찾았고 기록을 남겼다. 그 뒤 어떤 작품은 전해지고 어떤 작품은 사라졌다. 그 앞 뒤에 붙어있는 이야기가 한국 근현대미술사일 것이다. 그 작은 토막이 이제서야 전시장에 찾아온 것이다.



업데이트 2025.01.22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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