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와 리뷰 > 전시

박광진이 70년간 찾아온 '자연의 소리'

-서울시립미술관 <자연의 속삭임>전
-한 화가의 70년 간의 모색, 1950년대와 2020년대

전시명 : <박광진-자연의 속삭임>
장 소 : 서울시립미술관
기 간 : 2024.12.12 ~ 2025.2.9
글/ 김진녕


원로 화가 박광진(b.1935)에게 2024년은 굵직한 미술관 전시만 1년 내내 네 건이나 있던 해였다. 제주도립미술관에서는 상반기에 <자연의 소리, 봄>전이, 7월부터는 <원풍경 :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해>(- 2025.3.2), 전남 무안의 오승우미술관에서는 5월부터 7월까지 <자연의 소리>전이 열렸고, 홍익대박물관과 홍익대현대미술관에서는 《박광진 : 자연을 마주하다》(2024.9.2- 12.6)전이 열렸다. 그리고 지난 연말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관에서 박광진의 50년대 국전 출품작부터 2020년대 최근작까지 모두 등장해 회고전 성격을 띤 <자연의 속삭임>전(2024.12.12- 2025.2.9)이 선보였다.


1935년 서울 창신동에서 태어나 어느덧 망백의 나이가 된 박광진은 2023년 103점의 작품을 모교인 홍익대에 기증했고, 자신의 인생 후반기에 수십 년 간 머물며 작업한 제주도립미술관에 149점, 절친인 오승우 화백의 이름을 딴 오승우미술관에 200점을 기증했다. 평생의 작업을 정리해 전국의 공립미술관에 기증했고 그 기증작을 바탕으로 서울과 제주, 무안에서 일년 내내 박광진 전시회가 열린 것이다. 


그는 서울교대 교수(정년 퇴임)라는 공식직함 외에도 1960년대에는 일요화가회 지도교수로, 1970년대 초중반에는 월남종군화가단 프로젝트와 민족기록화 프로젝트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2000년대 들어서도 제주현대미술관 건립 추진 등 미술행정가로도 왕성한 활동을 하는 한편 현재까지 기증작만 450여 점에 이를 만큼 작품 활동도 열심히 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1950-70년대까지 작품이 집중적으로 등장한 서울시립미술관의 <자연의 속삭임>전은 해방 뒤 한국 현대화단의 행보를 더듬어볼 수 있는 흥미로운 전시였다. 전시에서는 박광진이 평생 작업한 1천 100여 점의 작품 중 서울시립미술관 소장품과 개인 소장품 중 그의 대표작을 선별하여 117점의 작품을 소개했다. '탐색: 인물, 정물, 풍경', '풍경의 발견', '사계의 빛', '자연의 소리'라는 네 개의 섹션으로 이루어졌는데, 1950-70년대 국전이 한국 미술계의 가장 큰 이벤트였을 때 제작한 작품은 첫 번째 섹션에 모여있고, 이는 당시 한국 미술계의 흐름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첫 섹션 들머리에 걸린 박광진의 최초 유화 작품인 〈창경원 입구〉(1952)는 그가 서울사범학교에 재학할 당시 스승인 이봉상(1916-1970)이 사용한 캔버스에 덧그린 것이기도 하다. 1954년 홍익대에 입학한 박광진은 비원파의 창시자이기도 한 손응성(1916-1979)의 보문동 화실을 드나들면서 손응성의 영향을 받아들여 목우회에 대학생 신분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손응성 보문동 화실


1957년 박광진이 국전에 처음 특선한 <국보>(1957)는 박물관 진열장 안에 들어있는 반가사유상과 기마인물형 토기, 청동 정병 등 고기물을 세밀하게 묘사한 작품이다. 그의 스승인 손응성의 포트폴리오에도 풍경화는 물론 거의 극사실에 가까운 세밀한 묘사로 도자기와 과일, 고가구를 그린 정물화가 제법 된다. 대학교 졸업작품인 <담배가게>(1956)의 전시자료에는 “박수근씨가 초가집이나 농부를 많이 그릴 때, 거의 1년 가까이 홍대에서 함께 작업했다. 나는 유화로 졸업작품을 준비했고, 그는 연필 스케치로 여러 번 작업했다”라는 박광진의 말이 씌어져 있다. 



해방 뒤 민족 정체성 확립이 화두이던 1950-60년대 국전에는 동양화나 서양화 분야 할 것 없이 전통 유물 소재가 많이 다뤄졌고, 1960-70년대에는 스케치를 바탕으로 한 풍경이나 동물 그림이 자주 수상목록에 올랐다. 이번 전시에는 박광진이 그린 두 점의 <토끼장>(62, 63년 작)을 볼 수 있었고, 1963년에는 이종상(b.1938)이 소의 발굽을 다루는 장면을 그린 <장비>가 국전에서 특선을 차지하기도 했다. 

정물과 고궁, 인물, 동물 등 다양한 모색을 하던 박광진이 점차 풍경으로 정착하던 시기는 두 번째 섹션에서 다루고 있다. ‘풍경의 발견’이라 이름 붙인 이 섹션에서는 그가 1967년부터 1990년대까지 농촌과 도시 주변의 아름다움을 그리며 세계 각국의 명소를 탐방해 작품 세계를 확장해 나가던 시절의 작품을 모아 놓고 있다.


불국사의 가을, 1978, 캔버스에 유채, 180.1 x 132.4 cm, 정부미술품(국립현대미술관)소장


세번째 섹션인 ‘사계의 빛’에서는 196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까지 그가 그린 한국의 순수 자연을 사실적으로 담아낸 풍경화를 선보인다. 설악산이나 북한산, 불국사 등 특정 지역의 풍광을 명시한 작품은 그의 작품 이력에서 체력이나 필력이 절정기에 달했던 시절이라는 점과, 실제로 주요 관공서에 걸렸던 대작이 포함됐다는 점에서 큰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특히 파란색으로 벽면을 칠한 ‘섹션 인 섹션’ 격의 블루룸에는 일반에게 공개된 적이 없는 관공서(청와대 포함) 소장, 국립현대미술관 관리 작품이 10여 점 선보였다. 작가는 특정 지명을 제목에 집어넣을 정도로 사실성에 공을 들였고 때문에 20세기 진경산수화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 시기에는 그가 월남 종군단 화가로 민족기록화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시기라 그 계열 작품까지 나왔다면 이번 전시가 완벽한 회고전이 될 뻔 했다. 아쉽게도 그런 계열 작품은 아카이브 자료로만 제시하고 실물은 나와있지 않았다. 


아카이브 자료


마지막 파트인 ‘자연의 소리’에서는 1990년대 이후 작가가 오래 머물던 제주도 특유의 환경을 다룬 작품이 걸려있다. 이전 그의 풍경화가 근경과 중경 중심의 정지된 풍경에 유일한 움직임으로 물이 떨어지는 계곡이나 저수지의 물비늘에 비친 반영 정도였다면, 1990년대 이후의 제주 풍경화에서는 극단적으로 줌인이 들어가거나 아주 먼 원경만 실루엣으로 처리하는 방식이 등장한다. 특히 갈대를 클로즈업한 자연의 소리 시리즈는 세차게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를 초고속으로 셔터를 누른 듯한 선명한 초점과 움직이는 갈대의 동세가 윙윙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소리 감각을 전해준다. 극단적인 원경의 실루엣 풍경화에서는 유채밭을 연상시키는 노란색 배경과 초록의 가는 줄무늬가 대비되면서 2000년대 이후 추상 영역으로 여겨지던 표현법을 평생 그가 천착해온 구상 세계의 요소로 끌어들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박광진은 이에 대해 “단순한 묘사가 아닌 자연의 소재가 집약되고 응축된 화면을 보여주고자” 했다는 표현을 썼고 “나는 한 번도 내가 구상작가라는 사실을 잊어본 적이 없다”라고 밝혔다.(서울시립미술관 전시자료)


박광진은 홍익대미술관에 작품을 기증한 뒤 이뤄진 <홍대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추상영역의 표현법을 채택한 것에 대해 이렇게 밝혔다. “우리나라 근현대 미술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과 프랑스에서 공부한 사람들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때 미술을 배운 사람들도 모두 구상회화를 추구하는 화가들이었다. 해방 이후 이 사람들이 서울대학교와 홍익대 미대 교수가 되었다. 학생을 가르치는 교수가 구상화가였기에 추상을 그리는 사람은 없다시피 했다. 나도 그 영향으로 구상회화를 배웠고, 그렇게 그려왔다. 2000년대 작품부터 화풍이 바뀐 이유는 추상회화를 추구했던 박서보(1931-2023)의 영향도 있고, 시대가 변화하면서 추상미술이 시대상에 더 부합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다고 추상만 그리는 것이 아니라 구상회화 현대적인 추상회화를 작품 안에서 서로 접목시키려 노력하고 있다.”(홍대신문, 2023.9.26)


억새의 소리 23, 1998, 캔버스에 유채, 130 x 162 cm(x2개), 서울시립미술관 소장


박광진의 <자연의 속삭임>전은 1950년대부터 구상 계열의 화가로 활동하면서 70여 년간 작품 활동을 단절없이 해온 한국 현대화가가 한국의 20세기와 21세기에 어떻게 대응해나갔는지 살펴볼 수 있는 전시였다.


홍익대미술관에서 지난해 <자연을 마주하다>전을 진행할 때 공개된 정연심 홍익대교수와의 영상대담은 그 시절 우리 미술계의 현황을 잘 보여준다.
다음은 인터뷰 발췌

“1950년대 초기에는 홍익대학교라는 게 말은 간판은 있는데 교사도 없고, 우리는 용산에 청파국민학교에서 입학했다. 강의는 남산국민학교, 배화여고 여기서는 일반 강의를 받고, 미술 실기는 종로 2가 우미관 극장, 이 장소가 크기 때문에 우리 미술학부 강의실(실기실)이 거기 있었다. 강의실이 없으니, 그 앞 큰 길가에 장안빌딩이라고 하는 빌딩이 하나 있는데 그 아래층이 레인보우 다바이었다. 그 다방이 강의실이었다. 학생들도 얼마 안되니까 거기서 주로 강사드로가 앉아서 학생에게 커피를 사주면 커피 한 잔 얻어먹으면서 대화하는 게 강의였다. 기억나는 게, 지금 이경성 선생님의 서양미술사가 주로 그곳(레인보우 다방)에서 강의를 했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박서보, 뭐 전부 다 같이 그랬다. 학년 구분 없이 미술학부에서 같이 실기실, 조소실도 하나, 누드 모델실도 하나, 석고 데생실도 하나였다. 그러니까 학년 구분 없이 본인이 들어가고 싶은 데를 들어가서 배웠다. … 특히 양질의 수업을 한 게 이봉상 선생님, 이 분이 사범학교 출신이다. 당시에 흔한 일본, 유럽에 유학을 가지 않고 사범 출신으로 홍대에서 교수가 된 사람이 이봉상 선생이었다. 근데 이미 그분은 교직에 대한 걸 잘알았다. 그래서 초창기 교육과정도 이봉상 선생님이 다 만든 것이다. 그때 그 분은 강의시에 들어오면 실기를 하나하나 전부 다 수정해줬다. 예를 들어서 ‘팔이 구부러졌다. 얼굴이 짧다’라는 식의 구체적인 지도는 지금도 기억나는 게 이봉상 선생님이 유일했다. 그래서 이봉상 선생님께서 홍대 초기에 회화과장을 했다. 근데 그때 회화과장이라고 해봐야 몇 분 없었다. 부장이 그 위에 한 분 있는데, 윤효중이라는 분. 그 분은 학장이 아니고 부장, 미술학부장, 초대 부장인데 오늘날 홍대의 뿌리를 찾자면 윤효중을 뺄 수 없다. 그 분이 아니었으면 홍익대 미대가 서울대 미대와 맞서서 싸울 수 있는 실력과 이미지로 맞서서 싸울 수 있는 대결을 그 분으로 인해 당당하게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뿌리는 찾자면 윤효중, 이봉상, 동양화에서 이상범 선생님인데, 그 분은 워낙 얌전하고 조용한 분이셨고, 또 동양화과에 학생들이 별로 없었다.”

“(구상 작가로 활동한 것에 대해)그때 국전에서 특선하면 시선이 집중되기 시작했다, 당시 홍대생도 거의 다 국전에 출품했다. 박서보와 하종현 작가도 같이 출품했는데 별로 효과가 안좋고, 내가 재학생 신분으로 국전 서양화부에서 처음으로 특선을 받았다. 특선을 한 게 나의 작품에 하나의 방향성으로 고착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특선을 한 <국보>라는 작품은 남산박물관의 황금색 불상 진열한 곳을 그대로 그린 100호 크기의 작품이다. 그때 국전 심사를 이종무와 김환기 선생님이 같이 했었다. 특선 받는 걸 결사 반대한 사람이 김환기 선생님이었다. 이종무 선생은 그때 학부장이었다. 윤효중 선생님 다음의 학부장이었다. 이 분은 우리나라 서양미술의 단군 할아버지 같은 역할이었다. 그 분하고 심사장에서 내 작품 때문에 일대 싸움이 벌어졌다. 그게(심사장에서의 싸움) 드러난 계기가 신촌에서 홍대로 가는 셔틀 버스와 비슷한 것을 대학에서 준비하면 아침 출근 시간에 맞춰서 교수들이 신촌에 모인다. 그 버스 안에서 김환기, 이종무 선생님의 싸움이 2라운드가 벌어져서 그때 내가 굉장히 화제의 인물이었다. 어떻게 보면 그 사건이 내가 미술계에 데뷔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스승 손응성에 대해) 실제로 내가 누구한테 미술을 지도받았냐면, 대학은 홍대를 다녔지만 우리 미술사에도 잘 안나타나는 손응성이라는 화가가 있다. 그 분하고 내가 어떻게 연결이 되어서 홍대에서 강의 끝나고 나서 가는 곳이 그 분 작업실에 가서 앉아있는 것이었다. 아무 말도 안하고 그림 그리는 것만 구경했다. 손 선생님은 술을 좋아하시는데 나는 술을 못하니까 그 뒷바라지만 내가 주로 했다. 어느 정도로 제자 그 분을 흠모했냐면 결혼해서 그 분하고 가까이 있으려고 신혼 살림집을 그 분이 사는 보문동 바로 앞집에 집을 샀다. 실제로 지도해주시지 않았지만 그 정도로 내가 흠모했던 선생님이었다. 그래서 구상미술로 가게 된 계기가 손응성 선생님과의 관계(영향)이다.”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구상의 역할) 미술의 역사를 보면 현대 미술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고 구상을 거쳐서 오는 것이다. 홍대 초기는 거의 다 구상이어서 학생도, 교육과정도 모두 정물, 인물, 누드, 풍경을 그리라고 했다. 유일하게 그렇지 않은 방향으로 간 사람이 김환기 선생님과 유영국 선생님이다. 그 외에는 거의 다 구사이었다. 특히 남관 선생님은 홍대 강사를 하던 나한테 학생들에게 기초를 꼭 가르치라고 강조했다. 지금 홍대는 추상을 하는 학교로 알려져 있지만, 구상 계열로 남아있는 원로는 유일하게 나와 김숙진, 황용엽 밖에 없다. 우리 밑으로 살아있는 작가는 구자승, 박용일도 있지만 원로는 우리 셋이다. 앞으로 구상 미술이 완전히 없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미술은 사실 돌고 돈다. 파리와 일본 미술계를 보면 상당히 구상으로 오고 있다. 그래서 내가 구상을 한 것을 후회허가나 뒤처졌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2024년 5월3일, 대담 정연심)


업데이트 2025.02.12 12:20

  

최근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