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명 : 《하종현 5975》
장 소 : 아트선재센터
기 간 : 2025.2.14 ~ 2025.4.20
글/ 김진녕
생존작가 중 최고령 현역으로 꼽히는 하종현(b.1935)의 초창기 작업 40여 점을 모아놓은 전시가 열리고 있다.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리는《하종현5975》전(2.14-4.20).
2012년 그의 1960년대 초기작부터 근작까지 85점을 모아서 보여줬던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회고전 이후 보기 힘들었던 그의 초기 작업을 볼 수 있는 전시다.
그 회고전 이후 십 여 년 사이에 그의 학교 선배이기도 했던 박서보 등 뭉뚱그려서 단색화 화가로 불렸던 앵포르멜 그룹 출신 작가는 거의 세상을 달리했다. 한국의 앵포르멜 운동은 1957년 결성된 현대미술가협회를 중심에 놓고 보고 있다. 장성순(1927-2021), 김창열(1929-2021), 하인두(1930-1989), 박서보(1931-2023) 문우식(1932-2010) 등이 여기 속해 활동했었다.
하종현은 1959년 홍익대 미대를 졸업했다. 전시장 들머리에 걸린 그의 자화상이 1959년작이다. 전시 초입의 앵포르멜 풍 작품 넉 점은 1962-1965년 사이에 제작됐다. 그가 학부 시절부터 60년대 중반까지 전후 한국 서양화단을 휩쓴 앵포르멜 운동의 자장권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하종현이 화단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것은 1969년 9월에 창립한 한국아방가르드협회 활동이다. 창립회원으로 곽훈, 김구림, 김차섭, 김한, 박석원, 박종배, 서승원, 오광수, 이승조, 이일, 최명영, 하종현 등이 참여했다.
전시는 하종현의 이런 연대기적 행보를 충실히 따라가면서 그의 세계가 외부의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떤 탐색을 통해 작업이 변화해갔는지 보여주고 있다.
전시는 두 개 층에 걸쳐 4개의 파트로 구성돼 있다. 1959년 하종현이 미술 대학을 졸업한 직후부터 현재 그의 대표작으로 잘 알려진 <접합> 연작을 시작한 직후인 1975년까지의 기간을 총 네 시기로 나누었다.
'1부: 전후의 황폐한 현실과 앵포르멜(1959-1965)'의 전시는 유럽에서 2차 세계대전 이후 유행한 추상표현주의의 한 갈래인 앵포르멜이 한국전쟁 뒤 일본을 통해 유입된 다음 국내 서양화단에서 붐을 이루었던 흔적이기도 하다. 하종현도 1960년대에 이 흐름에 따르는 작품을 그렸다. 물감을 화면 위에 두텁게 올리거나 붓자국 같은 터치를 강조하는 등 화면 위에 올라간 물질의 물성에 대한 관심은 20세기 후반 이후 그의 작업과 동일하다고 볼 수 있다.
'2부: 도시화와 기하학적 추상(1967-1970)'에서는 그의 전체 작품 이력 중 가장 다채로운 색상이 한 화면에 등장하는 시기이다. 60년대 말- 70년대 초 한국의 기하학적 추상 붐은 서양 근대 미술의 모든 사조가 동시다발적으로 한국에 소개된 20세기 한국만의 ‘특수성’이 작용했다. 기하학적 추상은 서양에서는 2차 대전 이전에 인기있던 스타일이었고, 그 이후 앵포르멜이 등장했다. 한반도에서도 1920년대부터 기하학적 추상이 소개 됐지만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초에 이르러서야 '각광을 받았다'라고 말할 정도가 됐다.
주최측에선 “경제성장과 산업화로 인해 급격히 변화하는 도시 환경을 구조적 형태로 추상화한 작업”으로 “하종현은 강렬한 색채와 반복적인 패턴을 통해 새롭게 만들어지는 도시적 경관의 역동성을 표현하기도 하고, 단청 문양과 색조, 돗자리 직조 기법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여 전통적 미학과 현대적 조형 언어의 융합 가능성을 탐구하기도 했다”라고 이 시기의 작품을 소개하고 있다. 덧붙이자면 이 시기에 국전 등 제도권 미술에서는 전통 목공예 기물이나 화문석 등의 소재 등 ‘전통을 현대 회화에 되살리는’ 여러가지 시도가 각광받던 시기이기도 했다. 전통문양을 기하학적으로 반영한 하종현의 이 시기 작품은 하종현다운 모색으로 보인다.
아울러 이시기의 작품은 아방가르드 운동을 주도했던 평론가 이일과의 ‘협력’도 있었다. 전시장에는 이일과 하종현이 함께 찍은 사진을 걸어놓고 이 시기의 작품인 '<도시계획백서> 시리즈의 제목을 이일이 제안'한 것이라는 설명 글을 달아놨다.
아방가르드협회 활동 시절 협회지 발행인으로 나서기도 했던 하종현의 AG 시절은 '3부: 한국아방가르드협회(AG)- 새로운 미술 운동 시기(1969-1975)'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시기에 하종현은 캔버스와 물감에서 벗어나 철망, 신문, 석고, 스프링, 종이, 휴지 등 다양한 일상적 재료를 사용한 설치작업을 선보였다. 특히 AG의 첫 전시였던 《70년 AG전》(1970)에 공개된 뒤 현재는 도면으로만 남아 있는 거울 설치 작업 <작품>(1970)을 재현하여 최초로 공개하고 있다. 1972년 도쿄 긴화랑 전시 때 선보였던 나무 설치 작품 관계 시리즈 두 점도 이번에 재제작해서 관람객을 맞고 있다.
이번 전시의 마지막 파트인 `4부: 접합ㅡ 배압법(1974-1975)'에서는 하종현의 대표 연작 <접합>의 초기 작업을 만날 수 있다. 1974년에 시작된 하종현의 <접합> 연작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거칠지만 씨줄과 날줄이 엮여 2차원의 평면 형태를 하고 있는 마대자루 뒷면에 물감을 올리고 이를 물리적인 힘을 가해 앞으로 밀어내는 독창적인 기법은 하종현을 상징하는 기법이 됐다. 관람객이 보는 표면은 가지런하게 정렬된 우연의 합이자 반복된 노동의 흔적, 마대의 물성과 물감의 물성이 인간의 힘으로 어우러진 흔적이기도 하다.
<하종현5975>전은 한국전쟁 뒤 한국 현대미술의 전개 과정을 하종현이라는 성공한 예를 통해 학습기의 배움과 청년기의 여러가지 모색, 변하는 시대상의 반영, 자기만의 시각 언어 모색과 정체성 확립이라는 과정을 보여주는 전시다. 하종현의 근작은 3월에 국제화랑에서 따로 전시를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