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명 : 《강명희-방문》
장 소 :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관
기 간 : 2025.3.4 ~ 2025.6.8
글/ 김진녕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관에서 《강명희-방문》전(2025.3.4- 6.8)이 열리고 있다. 주최 쪽에선 1972년 프랑스로 떠난 뒤 오랜 기간 한국과 프랑스, 또는 몽골과 중국 등 세계 여러 곳을 오가며 방문자처럼 살아낸 강명희(1947- )가 “오랜 시간 대면한 자연의 풍광 속 본질에 천착하고 존재와 자연과의 관계를 화면에 담아내며 독자적인 회화 영역을 구축한 60여 년에 걸친 화업과 주요 작품들을 망라하여 선보이는 전시”로 “강명희의 회화에는 서로 다른 문화권의 영향과 동서양을 넘나드는 색채와 감성이 묻어난다. ‘방문’은 작가의 작품 명에서 빌려 온 전시 제목으로 한 곳에 완전히 정착하지 않고 이동하며 작업한 작가의 유목적 태도와 일시적 만남에서 비롯된 예술적 영감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
전시장 입구인 로비벽에 세워진 <북원(北園, jardin nord)>(2002, 462x528㎝)는 압도적인 크기 뿐만 아니라 사물의 구체적인 형상성은 사라지고 강명희 특유의 춤을 추는 듯한 색채감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강명희가 이번 전시에서 보여주는 세계를 상징한다.
강명희는 70-80년대에는 대학 동문이자 동료 작가이고 기획자였던 남편 임세택(林世澤, b.1947)의 이름과 함께 거론되고는 했다.
1986년 임세택과 함께 한 퐁피두센터에서 2인전, 1989년 4월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열린 《임세택과 강명희》전도 모두 남편과 함께 한 전시였다. 대학 시절 임세택은 오윤, 오경환과 함께 민중미술의 태동을 알렸던 '현실동인'(1969)의 창립회원으로 활동했고 이후 미술 동인 ‘현실과 발언’을 창립했고 1981년 서울 구기동에 서울미술관을 세워 한국과 프랑스를 오가며 활동했다. 서울미술관을 통해 신학철이나 권순철 등의 활동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1970년대 이런 행동 반경은 이번 전시의 3번째 파트인 ‘비원’에 걸린 개발도상국 시리즈 등 몇 몇 작품에서 현실발언적인 경향성을 확인할 수 있고, 전시 개막식에도 윤범모, 신학철, 임옥상 등 ‘현실과 발언’ 계보의 인사가 대거 참석하기도 했다.
<개발도상국-파병>(1975), <개발도상국-교수형>(1975), <개발도상국-세계의 풍경>(1976)
<개발도상국-파병>(1975), <개발도상국-교수형>(1975), <개발도상국-세계의 풍경>(1976)은 70년대 한국 현실에 대한 비판적인 발언이 담긴 작품이다. 다만 창작 시점에서 보듯 강명희가 프랑스에 있던 시절 제작한 작품이고, 특히 <파병>과 <교수형>은 미디어나 타인의 관점으로만 겪어봤을 법한 사건이다. 작품에서 다룬 ‘파병’은 월남 파병으로 1964년부터 1973년까지 진행된 일로 남성인 임세택이라면 몰라도 프랑스에 거주하는 여성인 강명희에게 강 건너 불이었던 사건이다. ‘교수형’은 1974년 2차 인혁당 사건으로 사형된 8명의 이야기를 다룬 것으로 보인다. 이 사건도 강명희는 뉴스나 주위의 이야기로 접했을 것이다. 70년대 작업에서 보이는 이런 경향성은 80년대 이후 자신이 직접 보고 듣고 요동치는 감정을 기록하는 태도로 바뀐다. 그런 작품이 1부와 2부에 중점적으로 선보이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강명희 세계를 관통하는 몇몇 요소가 초기 작업에도 드러나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전시 3부의 제목이기도 한 <비원>(1963)은 아이러니하게도 이번 전시에 나오지 못하고 도판만 비치돼 있다. 강명희의 프랑스 작업실에 옮겨놨는데 제작된 지 50년이 넘은 작품은 국외 반출에 복잡한 절차를 요구하는 프랑스 국내법상 시간이 촉박해 걸리지 못했다고 한다. <비원>도 얼핏 보면 구상성은 거의 흔적이 없고 거친 필획의 흔적, 색의 변주가 미묘한 작품으로 최근작과 비교하면 최근작에서 좀 더 세필을 쓸 뿐 50여 년 전에도 비슷한 세계를 탐구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전시 3부인 <비원>파트가 강명희의 가장 오랜 과거를 보여주는 섹션이라면 1부와 2부는 현재의 강명희를 보여주는 섹션이다.
전시장 들머리의 <북원>에서 이어지는 1부 ‘서광동리에 살면서’는 2007년 국내로 재이주한 뒤 제주도에 터를 잡으면서 작업한 작품을 소개하고 있다. ‘서광동리’는 그가 약 10년 간 사용하던 작업실이 있었던 지역 이름이다. 그는 이 작업실 안팎의 풍경이나 한라산, 황우치 해안, 대평 바다, 산방산, 안덕계곡 등 수 십 번- 수 백 번 직접 보았던 풍경을 같은 이름으로 캔버스에 옮겼다. 하지만 그의 작업은 이름표가 없다면 그곳이 황우치인지 안덕계곡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화면에 재현된 나뭇가지를 닮은 선이나 떠도는 안개를 닮은 색뭉치, 거기에 산란된 빛 같은 날카롭고 가는 색의 붓자국이 엉킨 것을 보노라면 작가가 그 덤불을 보고, 산을 보고, 하늘을 보고 요동쳤었던 감정의 결이 전해지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형태를 그대로 재현하지는 않았지만 섬세하고 미묘한 붓자국과 색의 변주가 감정을 재현하는 풍경화라고 할 수 있다.
2부 ‘방문’은 프랑스에서 한 작업과 몽골이나 남미 파타고니아, 남극, 중국 등 해외 각지를 여행하며 그린 작업이 선보이고 있다. 작가가 1990년대부터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는 프랑스 투랜(Touraine) 작업실에서는 그곳의 정원과 땅을 소재로 그려낸 <북원>, <중정>, <방문> 시리즈를 볼 수 있다.
20세기 후반의 한국과 프랑스를 자양분 삼아 강명희가 21세기에 그려내고 있는 풍경화는 민중미술계의 유명인사였던 임세택의 이름과 동반하지 않아도, 한국 영화계의 슈퍼스타였던 오빠 신성일의 이름이나 프랑스의 전직 총리였던 빌팽이라는 이름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강명희라는 이름을 충분히 설명하는 국면으로, 진작에 접어들었음을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