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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암미술관 <겸재 정선>전

-정선 작품의 양대 수장고가 협력해서 여는 블록버스터 전시

전시명 : 겸재 정선
장 소 : 호암미술관
기 간 : 2025.4.2-2025.6.29
글/ 김진녕

겸재 작품의 가장 큰 수장처로 꼽히는 두 기관인 삼성문화재단과 간송미술문화재단이 공동기획하고 국립중앙박물관 등 18개의 기관 및 개인의 소장품 총 165점(국보 2점, 보물 57점(7건)이 등장하는 대규모의 겸재 전시가 호암에서 열리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전 한반도 일대를 지배했던 조선 왕조의 지배자 초상화도 대부분 불타 없어버릴 정도로, 재앙급 재난으로 점철된 근현대사를 겪어낸 한국에서 18세기 화가의 그림이 수 백 점 살아남아 전해졌다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깝다. 역으로 이는 겸재 정선의 작품이 조선시대 민간에서도 귀하게 대접 받으며 전해졌다는 이야기이도 하다.


정선(鄭敾, 1676-1759)은 몰락한 양반 출신으로 숙종 2년 지금은 서촌으로 통칭되는 경복고 근처에서 태어났다. 그는 신분상 중인은 아니며 몇 대에 걸쳐 과거를 통하여 출세하지 못한 몰락한 양반이었다. 14세에는 부친을 잃었고, 20세에 당대의 세도가였던 김창집의 추천으로 도화서 화원으로 활동했다는 주장도 있다. 어쨌든 그가 그림 재주로 말단이지만 나랏밥을 먹었다는 것은 확실하고 훗날 성공한 중인 화원에게 주어졌던 현감(縣監) 벼슬을 한 것은 기록으로 남아있다.


귀거래도10폭병, 조선 18세기, 국립중앙박물관, 이건희 기증


귀거래도10폭병 부분


정선은 여러모로 김홍도(1745-1806)와 비교된다. 정선과 김홍도는 18세기 조선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양대 화가다. 정선은 18세기 전반과 중반 조선 르네상스를 이끌어낸 영조(이금, 1694-1776, 재위 1724-1776)의 화가라 부를 수 있고, 김홍도는 정조(이산, 1752-1800)의 화가라고 부를 수 있다. 경제력이 계속 우상향 그래프를 그리던 영조 연간에 세상을 뜬 정선은 죽을 때까지 그림 주문에 시달리며 안락하게 살다가 세상을 떴다. 국고 파탄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경제력이 계속 우하향 그래프를 그렸던 정조 연간에 전성기를 맞이했던 김홍도는 최근까지도 언제 어디서 죽었는지도 특정하지 못해 ‘몰년 미상’으로 기록될만큼 동가식 서가숙하는 불우한 말년을 겪어내다 세상을 떴다.


척재제시, 경교명승첩, 조선 1740-1741년, 간송미술문화재단, 보물


정선은 남종화의 영향을 받았지만 실경 사생을 바탕으로 우리 강산의 모습을 그려서 '진경산수'라는 이정표를 세운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의 그림에는 간단히 이름과 장소 정도만 들어가 있고, 정선이 자신의 문기文氣를 내세우기 위한 이벤트를 벌였다는 기록은 찾기 힘들다. 반면 김홍도는 중인 출신으로 도화서에 기록했다는 기록도 있고, 정선과 달리 풍경화(산수화)보다는 도석화, 풍속화로 당대에 평가받았고 초상, 화훼영모류는 물론 불화까지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남겼다. 그 시절 성공한 중인들이 열광하는 시회 모임에도 열성이었다는 기록도 있다. 


고사관폭도, 조선, 18세기, 간송미술문화재단


이번 호암의 겸재전은 풍경화가 주류고 약간의 화훼초충류, 풍속화적 요소를 갖고 있는 문인화류 정도이다. ‘김홍도필’이나 ‘전 김홍도’로 전해지는 작품에서 등장하는 군중이나 인물의 활달한 움직임을 정선의 작품에서 찾기 힘든 것도 겸재와 단원의 차이이다.


금강전도, 정선, 조선 18세기 중엽, 개인소장, 국보


정선이 현대 한국을 포함해도 죽기 직전까지 그림 주문이 밀릴 정도로 경제적으로도, 평판으로도 가장 행복하게 살다간 화가라는 점은 사실인 것 같다. 서울대 교수인 장진성은 정선이 살아생전 당대에 어떤 평가를 받았고 어느 정도의 수요가 있었는지를 <정선의 그림 수요 대응 및 작화방식>이란 논문에서 다뤘다.


"분주한 일상생활 속에서 정선은 ‘휘쇄필법(揮灑筆法)’이라는 한 번에 쓸어내리듯 급히 휘두른 필묵법으로 폭주하는 그림 수요에 대응해 나갔다. 즉 매우 빠른 붓질로 경물을 신속하게 그려내는 정선의 작화 방식은 그림 주문이 너무 많아 하나하나 성의를 다해 그릴 수 없는 상황에서 급히 그림을 그리기 위해 고안해낸 필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병연(李秉淵, 1671-1751), 조영석(趙榮祏, 1686-1767), 권섭(權燮, 1671-1759), 신돈복(辛敦復, 1692-1779), 강세황(姜世晃, 1713-1791), 심재(沈縡, 1722-1784), 이규상(李奎象, 1727-1799), 권섭(權燮, 1671-1759) 등은 정선의 그림을 평가하면서 모두 ‘휘쇄필법’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을 정도로 정선의 그림 수요 대응방식으로 휘쇄필법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또한 조영석은 정선이 그림 주문에 시달려 피곤하고 지친 필법인 ‘권필(倦筆)’로 그림을 그렸으며 그림 주문이 폭주할 경우 ‘응졸지법(應猝之法),’ 즉 갑작스러운 그림 요구에 대응하기 위하여 임시방편적으로 그림을 그리는 경우가 많았음을 지적하고 있다. 즉 ‘휘쇄필법,’ ‘권필,’ ‘응졸지법’은 정선의 바쁘고 지친 일상생활과 밀려드는 그림 주문을 감당하기 위해 고안해 낸 형식적인 필묵법으로 상호간에 깊은 연관성을 지닌다. 즉 ‘휘쇄필법,’‘권필,’ ‘응졸지법’은 정선이 그림 주문에 시달려 바쁜 일상 속에서 정성을 들이지 않고 대충대충 형식적으로 그린 ‘수응화(酬應畵)’ 제작을 위해 사용한 필묵법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정선이 한가할 틈도 없이 거의 매일 그림을 그릴 수밖에 없었던 것은 정선 그림의 높은 가격 때문이었다. 정선의 그림은 화첩의 경우 보통 30-40냥 정도 했으며 따라서 작은 조각 그림도 모두 보배로 여길 정도로 정선 그림의 인기는 대단하였다. 아울러 정선의 그림을 중국으로 가져가 파는 경우가 있었는데 중국에서 정선 그림은 100-130금(金)을 호가하였다. 18세기 전반 중국 청나라 인기 화가들의 그림들이 대부분 6금(金)이하이며 건륭제(乾隆帝, 1736-1695년 재위) 시기의 일급 궁정화가들의 한달 월급이 7-11금이라는 사실을 고려해 볼 때 정선 그림의 가격은 경이로운 일이었다. 정선은 자신의 그림을 사서 중국에 되팔려는 사람들의 그림 요구로 나날이 쉴 틈 없이 그림을 그렸던 것이다. 조영석이 언급하고 있듯이 정선의 화가로서의 명성이 높아지자 비단은 날로 쌓여가고 한가할 틈이 없어졌을 정도로 정선은 매밀 매일 그림을 그렸지만 엄청난 그림 수요를 감당할 수 없었다. 정선은 생의 거의 마지막까지 그림 주문에 대응하는 바쁜 삶을 살았다. 『열하일기(熱河日記』에서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은 “겸재(정선)는 80여세가 되어도 여러 겹의 두터운 안경을 쓰고 촛불 아래에서 세밀한 그림을 그렸는데 터럭만큼도 실수가 없었다 (謙齋年八十餘, 眼卦數重鏡, 燭下作細畵, 不錯毫髮)”라고 노화가(老畵家) 정선의 그림 그리던 상황을 전하고 있다. 눈이 어두워 두터운 안경을 쓰고 촛불 아래에서 열심히 그림을 그리던 80여세 노인 정선의 일상생활은 현재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인기 작가로서 정선의 모습을 보여준다.”


사직송, 조선 18세기, 고려대학교 박물관


전시 들머리에는 겸재의 상징적인 그림인 <인왕제색도>(이건희 컬렉션/ 국박 소장)와 <금강전도>(개인 소장/ 삼성문화재단 관리)가 걸려있다. 이어지는 공간에는 <경교명승첩>이나 <해악전신첩>, <장동팔경첩>같은 정선의 대표적인 화첩이 펼쳐져 있다. 지금까지 봐왔던 어느 전시보다 많은 면을 펼쳐 보여주고 있다는 게 특징이라면 특징이다. 



여산초당, 정선, 조선 18세기, 간송미술문화재단, 보물


전시장 끄트머리엔 소나무를 단독으로, 사실적으로 묘사한 세 작품을 마주 보게 걸어 놨다. <사직송>(고려대박물관 소장), <노송영지도>(송암미술관 소장), <노백도>(삼성문화재단 소장)는 배경을 생략하고 오직 소나무만 사실적으로 그렸다는 점에서 ‘소나무 초상화’같은 느낌도 전해주는 흥미로운 작품이다. 이어 출구로 향하는 나머지 공간에 작가 미상의 지도그림인 <한양전도>와 민화풍 <금강산도>를 나란히 걸어놨다. 정선으로 인해 실제 조선의 강산을 그리는 진경산수 붐이 일었지만 어찌된 일인지 조선 사회는 19세기 후반 강제 개화가 일어나기 직전까지 진경산수와는 거리가 먼 대상을 과감하게 생략하거나 비튼 판타지풍의 민화 금강산도류가 소비됐다. 한국식 미감의 숙성기간이었을까, 정조의 치세와 함께 찾아온 반동복고풍의 여진이었을까.


인왕제색도, 정선, 1751년, 국립중앙박물관, 국보

이번 전시에 인색하게 소개된 색이 들어간 겸재의 화훼도류는 아무래도 내년으로 예정된 대구 간송미술관 전시에 본격적인 판을 펼칠 것 같다. 간송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화훼영모화첩>은 복원 수리 작업을 거친 뒤 4월 말부터 대구 간송미술관에서 일반 공개 중이기도 하다. 삼성문화재단과 간송미술문화재단이 공동 기획한 <겸재 정선>전의 첫번째 공개 장소가 호암미술관이고 두 번째 공개 장소가 대구 간송미술관이다. 겸재의 상징과도 같은 <금강전도> 같은 대작은 대구 전시에도 그대로 나오겠지만 <인왕제색도>가 올해 하반기부터 2027년까지 이어지는 해외 투어에 소집됐다고 하니 간송만이 낼 수 있는 기획과 컨텐츠가 보강될 것으로 예상된다.  호암에서 열린 출품작만으로도 큰 전시지만 아직 기대하게 할 만한 게 또 남아있다는 점에서 정선이 우리 역사에서 손꼽을만한 대단한 화가인 점은 분명하고 그런 정선의 작품을 질리게 볼 수 있는 전시다. 

업데이트 2025.04.30 1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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