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명 : 석난희_그림 속의 자연 畵中自然
장 소 : 서울 성곡미술관 1관
기 간 : 2025.4.10-7.6
글/ 김진녕
올 봄에 열린 여러 한국 현대미술 전시 중 동갑에 같은 대학을 나온 두 명의 작가 전시가 눈에 띈다. 1939년생, 홍익대학교에서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인 김환기(1913∼1974)에게 추상을 배우고 이후 반세기 넘게 추상의 세계를 탐구했다는 공통점이 있는 석난희와 조문자. 석난희는 성곡미술관에서 《석난희_그림 속의 자연 畵中自然》(4.10-7.6) 전을, 조문자는 성북구립미술관에서 《고동치는 대지》(3.27-5.25) 전을 열었다.
석난희나 조문자는 59학번이다. 이들의 바로 위 선배가 1990년대 후반 이후 한국 미술 시장의 키워드로 등장한 단색화진영의 대표 작가 박서보(1931-2023)와 하종현(b.1935)이다. 해방 이후 미술대학을 졸업한 1세대로 분류되는 박서보는 1957년 결성된 현대미술가협회를 중심으로 한국형 앵포르멜 운동을 벌였고, 현대미술가협회는 서울대 출신으로 이뤄진 ‘60년미술가협회’와 1962년 악뛰엘(actuel)이라는 단체를 결성해 앵포르멜이 그 시절 한국 현대미술의 전위임을 각인시켰다. 악뛰엘은 1964년 4월 2회 악뛰엘전을 끝으로 소멸해갔다. 이 2회 전시에 참여한 석난희는 1964년 파리 유학을 떠났다. 1963년 홍익대 서양화과 교수이던 김환기가 교수직을 사임하고 뉴욕으로 떠났고 1966년 이봉상(1916-1970)도 홍익대 서양화과 교수직을 사임하고 그 자리를 모교 졸업생인 30대의 박서보나 하종현 등이 채웠다. 앵포르멜로 상징되는 격정적이고 변혁적인 에너지는 이후 ‘성찰적이고 수행적인’ 미니멀한 추상, 단색화로 이어졌고, 90년대 이후 한국 미술시장의 키워드로 등장했다. 50년대 중반 이전 입학한 앵포르멜 선발대와 달리 59학번인 석난희와 조문자는 앵포르멜과 추상표현주의의 자장권 안에서 꾸준히 활동을 이어갔다.
이번의 이 두 전시는 단색화 유행에 휩쓸리지 않고 1960년대부터 근 60여 년 동안 꾸준히 앵포르멜이나 추상표현주의라는 시각 언어 안에서 자신만의 시각 언어를 모색해나간 두 작가의 성취를 보여주는 전시다.
석난희의 전시에서는 앵포르멜 풍을 받아들이고 그 뒤 긴 시간 동안 자기만의 시각언어를 찾아나가는 여정을 찾아 볼 수 있었다. 성곡미술관쪽에선 석난희의 세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석난희는 김환기의 제자로, 그가 대학에서 미술 교육을 받았던 1959~1962년 당시, 한국 화단에서는 1960년대 전후 등장한 앵포르멜 미술이 한창이었다. 한국 앵포르멜 미술(Art Informel)의 영향을 받았고 파리국립고등미술학교에서 유학하며 예술적 시야를 넓혔다. 1969년 귀국 후 자연을 주제로 한 추상미술을 탐구하며 독창적인 표현 방식을 발전시켰다. 특히 1970년대부터 목판화와 판목화를 병행하며 자연을 작품 속에 직접 흡수시키려 시도했고, 1985년에는 자연과 더 가까워지기 위해 경기도 안성에 작업실을 마련했다. 그의 모든 작업은 ‘자연 연작’으로 일관되며 ‘인간과 자연이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관계’를 담아내고자 한 그의 예술은 ‘자연과 인간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세계관’을 반영한다.
“석난희는 김환기의 제자로, 그가 대학에서 미술 교육을 받았던 1959~1962년 당시, 한국 화단에서는 1960년대 전후 등장한 앵포르멜 미술이 한창이었다. 한국 앵포르멜 미술(Art Informel)의 영향을 받았고 파리국립고등미술학교에서 유학하며 예술적 시야를 넓혔다. 1969년 귀국 후 자연을 주제로 한 추상미술을 탐구하며 독창적인 표현 방식을 발전시켰다. 특히 1970년대부터 목판화와 판목화를 병행하며 자연을 작품 속에 직접 흡수시키려 시도했고, 1985년에는 자연과 더 가까워지기 위해 경기도 안성에 작업실을 마련했다. 그의 모든 작업은 ‘자연 연작’으로 일관되며 ‘인간과 자연이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관계’를 담아내고자 한 그의 예술은 ‘자연과 인간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세계관’을 반영한다.
…1970년대 이후 앵포르멜의 표현 방식은 (한국에서)점차 설 자리를 잃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도 석난희는 꾸준히 추상미술을 탐구하며 자신만의 예술적 방향을 잡아 나아갔다. 그 결과 그의 작품은 당시 유행하던 격렬한 표현주의적 추상미술과는 차별화된 독특한 미감을 품고 있는데, 이는 중국 송대 문인 소동파(蘇東坡)의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다(詩中有畫, 畫中有詩)”에서 드러나는 동양적 예술관과 맞닿아 있다. 즉, 석난희는 추상화를 통해 그림과 시가 결합하는 방식으로 자연의 리듬과 정신의 자유로움을 표현했다.”
석난희 전시는 김환기가 그린 <난희 초상>(1962.12.13, 환기미술관 소장)으로 시작된다. 석난희는 1962년 홍익대 미술대학 재학 중 최우수 학생으로 선발돼 첫 개인전을 열었고 이 전시장을 찾은 김환기는 방명록에 초상화를 그리고 1962.12.12이라는 날짜까지 적어놨다. 그때 선보였던 강렬한 색덩어리를 화면에 배치한 추상풍의 <누드>(1962, 국립현대미술관 소장)도 전시장에 걸렸다. 석난희에게 유학을 권했던 김환기는 1963년 교수직을 내려놓고 뉴욕으로 갔고 석난희도 1964년 프랑스 유학을 떠났다. 1969년 귀국한 석난희는 이후 반세기가 넘는 기간 그만의 세계를 구축했다.
전시 작품은 크게 유화 계열과 판화 계열이 비슷한 비중으로 구성돼 있다. 1968년 유학 당시 제작한 석판화 <자연>이 <난희 초상>과 <누드> 사이에 걸려있는 것은 상징적이다. 그만큼 석난희의 작품 세계에서 판화의 비중이 높다. 석판화, 목판화, 나무판 자체를 깎아내고 먹을 입힌 판목화, 그리고 그의 작가 인생 중 최후반기라 할 수 있는 2010년대에 들어서 발표한 종이에 유화물감과 먹을 이용한 시리즈는 석판화와 회화, 서예적인 필획 사이 어딘가에 걸친 석난희만의 세계를 보여준다. 유화 작품에서도 앵포르멜계 작품에서 흔히 감지되는 강렬하고 공격적인 색덩어리 같은 미감보다는 미묘한 선의 떨림이나 원색을 멀리하면서 예민하게 변주되는 색의 스펙트럼이 더 눈에 띈다
<자연> 1977, 종이에 목판화, 79x82.3cm
<자연> 1994, 판목화, 265.5x83.5, 247x90, 257x55cm
<자연> 1980년대, 캔버스에 유채, 91x72.7cm
그의 작품은 판화, 판목화, 유화 가릴 것 없이 대개는 ‘자연’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다. 전시장에 놓여있는 석난희의 말 중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었다.
“자연은 삶을 풍부하게 해주기도 하지만 인간을 오만으로부터 경외의 마음을 배우게 하는 스승이기도 하다. 자연은 진실을 실천하는 근원이고 또 행동에 대핸 목적과 책임을 완수하는 본보기이기도 하다. 나는 자연을 사랑하면서도부터 두려워할 줄 알았다. 자연 속에서 옳고 그릇됨을 판단하게 되었다.”(창작, 그 희열: 석주미술상 10주년 기념 수상작가집, 1999)
미술평론가 오광수는 “석난희는 프랑스에 유학하면서 앵포르멜의 열기를 더욱 강하게 느낄 수 있었으며 그 영향 역시 적지 않게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그의 귀국 후 대체로 70년대의 작품의 경향을 보면 추상표현적인 감화를 강하게 드러내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미 국내에서 철 지난 양식으로 매도되고 있는 상황에서 그는 이에 개의치 않고 독자적인 방법으로 앵포르멜적인 작업을 지속함으로써 예외적이란 인상을 강하게 주었다. 이는 유행에 민감한 우리의 현대미술에서 자신의 출발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 고집스럽게 독자의 모색을 이어간 행적이 아닐 수 없다”고 석난희의 작업을 평가했다.
“자연은 삶을 풍부하게 해주기도 하지만 인간을 오만으로부터 경외의 마음을 배우게 하는 스승이기도 하다. 자연은 진실을 실천하는 근원이고 또 행동에 대핸 목적과 책임을 완수하는 본보기이기도 하다. 나는 자연을 사랑하면서도부터 두려워할 줄 알았다. 자연 속에서 옳고 그릇됨을 판단하게 되었다.”(창작, 그 희열: 석주미술상 10주년 기념 수상작가집, 1999)
<자연> 2003, 종이에 유채, 먹, 목탄, 91x69cm
미술평론가 오광수는 “석난희는 프랑스에 유학하면서 앵포르멜의 열기를 더욱 강하게 느낄 수 있었으며 그 영향 역시 적지 않게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그의 귀국 후 대체로 70년대의 작품의 경향을 보면 추상표현적인 감화를 강하게 드러내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미 국내에서 철 지난 양식으로 매도되고 있는 상황에서 그는 이에 개의치 않고 독자적인 방법으로 앵포르멜적인 작업을 지속함으로써 예외적이란 인상을 강하게 주었다. 이는 유행에 민감한 우리의 현대미술에서 자신의 출발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 고집스럽게 독자의 모색을 이어간 행적이 아닐 수 없다”고 석난희의 작업을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