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명 : 고미술 기획전 <조선민화전>
장 소 : 아모레퍼시픽미술관(APMA)
기 간 : 2025.3.27-6.29
글/ 김진녕
아모레퍼시픽미술관(APMA)에서 <조선민화전 Beyond Joseon Minhwa>(3.27-6.29)이 열리고 있다. 조선시대 후기인 19세기부터 20세기 전반에 걸쳐 제작된, 아모레퍼시픽미술관의 소장 작품과 20개 기관과 개인 소장 작품 100여 점이 전시장에 나와있다.
APMA는 개관 이래 힘주고 있는 병풍화를 집중 조명하고 있다. 2018년 <조선, 병풍의 나라>, 2023년 <조선, 병풍의 나라 2>전에 이은 세 번째로 병풍화 위주의 전시를 선보이고 있다. 이번엔 병풍화 중에서도 19세기-20세기 전반의 근대에 당대 대중이 향유했던 ‘민화’라는 형식의 근대미술을 집중 조명한다는 점이 앞선 두 전시와 차이점이다.
관동팔경도8폭병, 20세기, 종이에 채색, 계명대학교 행소박물관
APMA에서는 이번 전시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오래 전 민간에서 그려지고 사용되며 묵묵히 자리매김해왔던 민화는 최근 그 구성과 표현, 색채, 개성, 완성도까지 시공간을 뛰어넘어 현대감각에 부합하는 작품으로 각광받고 있다. 이번 전시는 커져가는 민화를 향한 관심에 부응하여, '한국의 미(美)'를 새롭게 바라보고자 기획되었다. 민화를 다각도로 조명하는 이번 전시에서는 소재별로 작품을 구별해 그 표현과 미감을 심층적으로 감상할 수 있도록 했다. 정교하고 완성도 높은 작품들부터 대담하고 독특한 개성의 작품들까지 민화의 다양한 매력과 재미를 즐길 수 있으며, 궁중회화풍의 그림도 한자리에서 만나볼 수 있다. 나아가 도자기, 금속, 목기, 섬유 등 다양한 공예품까지 함께 전시해 민화가 동시대 공예품 장식에 미친 영향과 시대 유행의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책가도10폭, 이택균, 19세기, 비단에 채색, 아모레피시픽미술관
이번 전시에 등장하는 작품 중 단연 눈길을 끄는 작품은 2024년 12월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9억 3천만 원에 낙찰된 이택균(이형록, 1808- ?)의 책가도 10폭 병풍이다. 기명작이 드문 책가도 장르에서 이택균은 그림 속에 묘사된 도장에 자신의 이름을 적는 방식으로 서명을 남겼다. 그래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책가도(덕수 4382), 미국 클리블랜드박물관 소장 책가도 등이 그의 작품으로 확인되고 있다. 뉴욕의 인테리어 사업가인 미카 에르테군이 소장하던 이 책가도의 새주인이 아모레퍼시픽이었고 덕분에 이번 전시에서 실물을 볼 수 있게 됐다. 이번 전시에서는 이 작품을 포함해 이형록의 기명작 두 점을 볼 수 있다. 또 다른 한 점은 서울역사박물관 소장의 <백수백복도 열 폭 병풍>이다.
백수백복도10폭병풍, 이형록, 19세기, 비단에 채색, 서울역사박물관
도화서 화원이었던 이형록은 할아버지와 아버지도 화원이어서 3대째 그림 그리는 집안의 화가로 조선 후기 민간에서 광범위한 그림 수요가 이는 것을 목격하고 그 수요에 응했던 인물이다. 정확한 몰년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1870년대까지 활동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아마도 1894년 갑오개혁의 일환으로 도화서가 폐지되는 것을 못 보고 사망했을 가능성이 더 크다. 반면 서원희(徐元熙, 1862- ?)라는 인물은 도화서 폐지라는 격변을 겪은 화원 출신 화가다. 이 두 사람은 조선조 말의 격변하는 시대상과 민화 확산 현상에 대한 이해의 실마리를 제공하기도 한다.
백선도8폭병풍, 20세기, 종이에 채색, 서울대학교박물관
19세기의 민화 붐에 대해 이번 전시의 도록에 실린 박정혜(한국학중앙연구원)의 글 <민화, 궁중회화의 변주>에 서원희와 도화서 폐지, 궁중회화의 민간확산 현상이 등장한다.
“민화의 수요가 급격하게 증가한 시기는 바로 궁중 화원의 그림이 양적 질적으로 발달한 시기와 맞물리면서 18세기 후반 무렵 궁중화풍의 장식 그림이 민간에서 크게 유행하게 되었다. 18세기는 민화의 시작이 아니라 궁중화풍 민화가 급성장한 시기로 보아야 할 것이다. … 모든 민화가 궁중회화의 영향 속에서 발전한 것은 아니다. 궁중회화의 영향을 받은 민화는 전체 민화를 놓고 보면 작은 비중이며 대부분 민화는 오랜 시간 동안 자생적으로 형성된 민간의 미감과 조형 의식 속에서 성장 발전하였다.…1894년 갑오개혁으로 인한 도화서의 폐지는 민화의 생태계에 적지않은 영향을 미쳤다. 몇몇 화원만 궁내부 소속의 도화주사로 남고 나머지 화원은 민간의 전업 화가 속에 흡수되었다. 전직 화원의 궁중 양식은 민간 화가에게 쉽게 전수되었으며 궁중화풍의 민화가 유행하는데 기여했다고 여겨진다. 도화서를 나온 화원이 시대 흐름에 적응하며 민간에서 활동한 행적을 일일이 추적하기는 어렵지만, 그 중에서 서원희(徐元熙, 1862- ?)의 사례는 하나의 참고가 될 만하다. 서원희는 1880년 규장각 차비대령화원이 되었으며 1900년부터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된 1910년까지 도화주사를 지냈고 1918년 경에는 공방 ‘이교당二巧堂’을 차려서 그림을 주문 판매했다. 2017년 크리스티 경매에 출품되었던 <백동자도 10폭 병풍>의 마지막 폭에 찍한 ‘해운海雲’, ‘서원희인’은 궁중 양식이 뚜렷하게 남아있는 이 병풍의 작가가 전직 화원 서원희임을 말해준다. 서원희가 1910년 이후 독립적인 화가로 민간에서 활동하던 무렵 주문받은 그림으로서 작품에 관서를 첨가한 것으로 보인다. 궁중회화와 민화가 제재와 도상, 양식과 기법을 공유하게 된 것은 화원이 전업화가로서 근무 외 시간에 민간의 수요에 부응한 덕분이다. 궁중화풍은 도화서가 폐지된 이후 약 20년 간 급속히 확산되었으며 민간에서 유통되는 장식화의 수준도 크게 진전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서원희인’은 온양민속박물관의 <평생도> 병풍에서도 확인되기도 한다.
도화서 폐지 이전에 도화서 화원으로 활동했던 이형록이 자신의 서명을 인장에 새겨넣는 방식으로 그린 작품을 남겼다는 것은 도화서 폐지 이전에도 화원이 민간 수요에 활발히 응했다는 방증으로 봐야하지 않을까 싶다.
이번 전시에는 화원급의 능숙하고 정교하게 색을 다루고 형상을 일궈낸 작품들이 등장한다. 주최쪽에서도 이번 전시의 대표 작품 중 하나로 꼽는 삼성문화재단 리움이 관리하는 <수련도 10폭 병풍>(19세기 제작 추정, 개인 소장)은 이른바 ‘손 근육’이란 게 뭔지를 확실히 보여주는 화려하고 정교한 작품이다. 또 다른 전시 대표작인 서울대박물관 소장의 <백선도 8폭 병풍>(20세기 제작 추정)에는 화면마다 둥근 형태의 방구부채와 접히는 접부채를 여러 점 그려넣고 부채의 펼쳐진 면마다 화조도나 괴석도, 수묵 산수 등 19세기에 유행했던 여러가지 그림을 사진 같은 극사실주의풍으로 묘사해놓고 있다.
수련도10폭병풍, 19세기, 비단에 채색, 개인소장
이런 절정의 붓 테크닉을 보여주는 ‘손 근육’ 작품의 반대편에 대담하고 창의적인 ‘머리 근육’을 쓴 해학과 현대적인 감각이 넘쳐나는 것도 전시장에 다수 등장해 있다. 대표적인 작품이 계명대 행소박물관 소장의 <관동팔경도 8폭 병풍>(20세기 제작 추정)이다. 울진 망양정이나 강릉 경포대, 통천 총석정 등 동해안 명승지를 그린 그림은 조선에 유람이란 문화가 확산된 18세기부터 자주 그려졌다. 이 그림 속의 관동팔경은 지형이 거의 픽토그램 수준으로 단순화되어 있다. 8폭의 총석정은 당간지주 같은 돌기둥처럼 그려져있고 두 번째 폭의 망양정에 오르는 길은 공중에서 늘어뜨린 사다리처럼 묘사됐고 그 길 초입에 우짖는 새는 바위보다 크게 그려져있다. 그럼에도 이 그림은 묘한 현장감과 정취를 전해주고 있고 21세기 초반 현대작가가 그렸다고 해도 믿을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민화만의 생명력과 현대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춘향전도10폭병풍, 20세기, 지본채색, 계명대학교 행소박물관
전시에는 여러 지방 스타일의 문자도나 어해도, 구운몽이나 춘향전을 다룬 병풍, 궁중회화가 민간에 보급되는 과도기적인 양식의 일월부상도나 화조도 등 민화병풍의 거의 모든 종류와 가장 인기있는 세화였던 까지와 호랑이 그림, 운룡도, 소원과 길상을 담은 어변성룡도나 서수도 등 19세기-20세기 초 한반도에 자생하던 ‘미술’을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