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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채색화를 바라보는 세 번째 시선, 한국 채색화의 흐름Ⅲ

진주에서 열리는 한국 채색화 2000년의 파노라마

《한국 채색화의 흐름Ⅲ - 진주 ; 색(色), 색(色)을 입다》
진주시립이성자미술관과 철도문화공원 차량정비고(옛 진주역사), 2025.7.17.-8.31.
글/ 김진녕

2022년과 2023년에 열렸던 진주의 한국 채색화의 흐름I, II에 이은 세 번째 전시 《한국 채색화의 흐름Ⅲ - 진주 ; 색(色), 색(色)을 입다》가 열리고 있다.

진주시립이성자미술관과 철도문화공원 차량정비고(옛 진주역사) 양쪽에서 오픈한 이번 전시는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는 한국 채색화의 역사와 미감을 조명하는 전시다. 《한국채색화의 흐름II》전이 전통채색화의 주요 소재였던 화조영모(花鳥翎毛) 중에서 화조를 취해 꽃과 새 그림을 중점적으로 소개했다면, 올해 전시는 영모(翎毛), 즉 털달린 동물을 그린 작품을 중점적으로 소개한다.


고화 파트의 전시가 열리고 있는 이성자미술관에서는 고구려 고분벽화부터 신라시대 김유신 장군의 지석묘 탁본, 고려 불화, 조선 후기 채색화를 대표하는 궁중장식화나 병풍화에 등장하는 동물 표현을 볼 수 있는 십장생도와 수렵도, 십이지괴석모란도 등의 전통채색화, 그리고 조선과 현대를 잇는 일제강점기 - 20세기 전반에 활동했던 안중식, 김기창, 이상범, 박생광, 장우성, 천경자, 안동숙, 유지원, 김흥종, 박봉수 등의 작품을 볼 수 있다.


미상 <요지연도> 조선후기, 비단에 먹과 채색, 개인


올해 처음 전시 장소로 채택된 철도문화공원 차량정비고는 옛 진주역사를 리노베이션한 장소로 일제강점기 이후 전통 채색화를 오늘의 현대회화에 합류시킨 근,현대 작가의 채색화를 선보이는데 주요 작가는 다음과 같다.

-김기창의 홍익대 미대 교수 시절 제자였던 오태학
-김기창 이후 홍대 동양화과의 맥을 이어갔던 천경자와 조복순
-박생광의 가르침을 받았던 오낭자, 이숙자, 이화자, 류민자
-이화대학에서 안동숙과 이유태의 가르침을 받은 원문자
-90년대 한국화의 혁신 상징이었던 황창배
-1950년 전후에 출생한 작가들

올해 특징이라면 1950년대생 작가들을 새롭게 등장시켰다는 점이다. 이왈종, 윤여환, 구지회, 김근중, 이종목, 정종미, 김선두 등 국전 세대 이후 본격적인 활약을 보였던 작가의 작품을 볼 수 있다. 


석천 윤여환 <묵시적 사유-돈오> 2012, 3합장지에 혼합재료, 작가소장


정종미 작가는 한국 전통 색의 재료인 염료를 찾는 과정에 큰 관심을 갖고 이를 재현하고 새롭게 작업에 반영하고 있다. 이번 전시에 선보이는 정종미의 작품 중에는 모시에 전통 염료로 염색 처리한 색면 작품이 전통이 어떻게 현재형으로 존재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정종미 <어부사시사(水)> 2024, 모시 전분풀 염료 콩댐, 작가소장


이번 전시에 처음으로 공개된 작품도 있다. 원문자 작가가 자신의 마흔 세살 생일을 기념해 제작한 <원숭이>(1987)는 이번 전시에서 처음으로 화가의 품을 떠나 세상과 만나고 있다. 원숭이 띠인 작가는 43마리의 원숭이를 네 폭의 병풍에 빼곡히 그렸다.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그렸다는 것에서 알 수 있듯 이 43마리의 원숭이는 불혹을 넘어선 작가가 희로애락과 감정을 표현하는 기념비적인 자화상이라 볼 수 있다.


소향 원문자 <원숭이> 1987, 한지에 먹과 담채, 작가 소장




지향 이숙자 <군우> 1987, 5배접 순지에 암채, 작가 소장



박봉수를 통해 보는 20세기 중반 한국화의 현대화
시리즈 전시 중 올해 처음 소개되는 박봉수(朴奉洙, 1916-1991)의 작품도 눈여겨볼 만하다. 그의 행보 자체가 20세기 중반 한국화단의 복잡성과 자체적인 근대화에 대한 열망을 그대로 담고 있기 때문이다.


1916년 경주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난 그는 경주공립보통학교의 일본인 교장 오사카 긴타로(大坂金太郞, 1877-?)가 그의 재능을 높이 사 15세가 되던 1930년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 일본에서 그는 묵화에 서양화의 사실성을 절충시킨 화풍으로 제국미술전람회(제전, 帝展)에서 맹위를 떨쳤던 고다마 기보(兒王希望, 1898-1971)의 사숙에 들어가 수묵과 채색, 유화 기법을 배운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 유학은 부모님의 귀국 종용 등으로 인해 1년여 밖에 이루어지지 못한다. 이후 독학하던 박봉수는 1935년 만주를 통해 중국으로 건너가 이듬해부터 북경미술학원(현재의 중앙미술학원)에서 수학했고 이때 2년 여의 체류기간 중 몽골 등 중국 구석구석을 여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1937년 중국에서 귀국한 뒤 박봉수는 3년간 금강산의 사찰 승방을 돌며 불교의 교리를 접하고 불상과 탱화를 제작한다. 미술사연구자 황빛나는 “이때의 경험이 특별히 채색화나 인물화 수업을 받은 적 없는 박봉수가 1939년 조선미술전람회에 <풍류악> 이라는 여성인물화로 초 입선한 후 연속적으로 41년과 42년 <예에 노닐다>와 <손자>를 출품하여 입선하는데 밑거름이 된 듯 하다”는 견해를 밝히기도 했다.

해방 뒤 서울로 가서 중앙화단에서 활동하려했지만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박봉수는60년대 중반까지 경주에서 활동하게 됐다. 이때 만난 미술계 인물이 김영기, 이응노, 박수근 등이다. 1946년 세워진 경주예술학교(1946-1952)는 대한민국 최초의 예술학교라는 기록을 갖고 있다. 경주예술학교의 동양화부에 이응노, 김영기 등이 교수진으로 참여했고 박봉수도 교수진으로 활동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인연은 백양회로 이어진다.

1957년 김기창ㆍ박래현ㆍ이유태ㆍ이남호ㆍ장운봉ㆍ김영기ㆍ천경자ㆍ김정현ㆍ조중현 9명이 중심이 되어 결성된 백양회는 초대 회장이 김기창이었다. 1958년 8월 제2대 회장으로 선출된 김영기는 해마다 서울에서 열린 회원전 외에도 각 지역 순회전과 공모전을 개최하고, 해외전을 기획ㆍ실행하는 등 백양회의 활동 범위를 확대했다. 첫 순회전은 1959년 1월 목포에서 열렸고 이때 허건ㆍ성재휴ㆍ박봉수ㆍ김화경 등이 새로운 회원이 되었다. 이듬해인 1959년 11월에는 진주에서 제2회 지방순회전이 열렸다. 백양회는 1960년 1월 타이완국립예술원 초청으로 타이완과 홍콩에서 3차례에 걸쳐 백양회전을 열었고, 1961년 1월에는 타이완과 도쿄, 오사카에서 동남아 순회전을 개최하게 됐다. 이런 백양회의 해외 순회 전시회는 한국의 민간미술단체로는 처음으로 열린 해외전이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고 이때 얻은 경험으로 한국화의 독자적인 성격에 대한 논의(김영기의 ‘한국화’ 호칭 등)로 이어지기도 했다.

박봉수의 아들인 박상용의 증언에 따르면 박수근과 경주의 로동리에 있는 박봉수의 화실에 이응노와 박수근이 방문했었다고 한다.

박봉수의 아내인 정순금(1922-2017)의 생전 회고에 따르면 50년대 말, 60년대 초 무렵 박수근이 경주 박봉수의 집에서 한 달 여를 살면서 첨성대에서 반월성 가는 길의 계림 숲을 스케치하면서 박수근 특유의 나무 풍경이 나왔다는 것이다. 박수근의 기록을 보면 그가 50년대 후반~60년대 초 신라문화제 사생대회에 심사위원 자격으로 여러 번 참석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 1956년 계림 숲의 휘어진 고목을 스케치한 작품도 존재한다.

1958년 프랑스 파리에 정착한 이응노도 50년대에 경주에 자주 왔었다고 한다. 당시 이응노는 김영기나 박봉수와 함께 경주예술학교 교수진으로 참여하기도 해서 3인의 친분관계는 두터웠다고 할 수 밖에 없다.

정순금의 회고에 따르면 “이응노가 파리 가기 전에 경주에 와서 박봉수가 수묵으로 추상하는 것을 구경하기도 했고, 이응노가 박봉수의 작업을 보고 바로 이거다,라고 말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이후 이응노는 파리로 가서 문자추상으로 유명해졌다. 이 일화에서 짐작할 수 있는 것은 1950년대 중후반에 이응노나 박봉수 사이에 문자 추상에 대한 공감대가 있었고, 각자의 방식으로 문자추상을 실험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응노가 도불하던 그해 박봉수는 김영기와의 인연으로 백양회에 가입해 중앙화단의 활동에 합류했다.

1968년 박봉수는 서울 종로2가 YMCA건물 뒷편에 화실을 내면서 서울활동을 시작했다. 가족이 모두 이사한 것은 1969년. 경제적인 면에서는 공무원이던 부인에게 의존하던 박봉수가 전업화가로서 자립한 것은 1972년 일본 활동을 하면서부터인 것으로 보인다. 1972년 부인과 함께 일본으로 간 박봉수는 요코하마와 삿포로, 오사카, 나라에서 전시를 하며 작품활동을 이어갔다. 나라에서 연 전시가 일본 방송에도 나오는 등 크게 성공하면서 작품도 팔리고 그때의 수입으로 서울에 처음으로 집을 마련하기도 했다. 2년 여의 일본 활동을 마치고 귀국한 박봉수는 유럽진출을 도모했다.

박봉수는 불화 모티브의 그림도 많이 그렸지만 그의 종교는 카톨릭이다. 박봉수가 친했던 신부 중에 경북 왜관에 있는 베네딕트수도원 소속 신부가 있었다. 어느날 박봉수는 왜관의 수도원에 가서 독일 본원(비르츠부르크)에 가서 체류를 하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독일 본원 수도원장이 이를 승인해 박봉수는 수도원장 초청 형식을 통해 단독으로 독일에 갔다. 독일 베네딕트수도회 본원 뮌스트슈바르자허에 체류하면서 박봉수는 수도원 요청으로 카톨릭 자선단체에서 매년 발행하는 달력 제작에 참여했다. 그때 전세계로 보급되는 수도원의 달력에 12장의 성화를 그렸고, 그때 받은 보수가 박봉수의 세계 여행 자금이 됐다. 그때 그가 그린 달력 원화가 수도원에 남아있을 가능성이 있다.

이번 전시에 출품된 알제리의 타실리 벽화, 남아프리카의 암굴벽화 등이 모두 그때 그가 보고 듣고 남긴 산물이다. 아들 박상용은 “그 때 대구의 매일신문사에서 요청해 아버지는 1년 동안 삽화와 함께 기행문을 연재했다. 우리 가족들은 아버지의 안부를 매일신문의 기행문을 보고 알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지홍 박봉수 <낙타> 1975, 한지에 채색


독일을 베이스 캠프로 삼아 74, 75년 2년에 걸쳐 진행했던 박봉수의 세계 여행은 유럽과 아프리카, 동아시아, 오세아니아를 포함한다. 홍콩이나 티벳, 인도, 뉴기니 등에서 그린 스케치도 남아있다.

1977년 김영기가 비국전파 모임 성격의 대한미술원을 창립하자 박생광, 박봉수 등이 참여했고, 파리에서 활동하던 이항성도 가입했다. 박봉수는 초대 회장 김영기에 이어 2대 대한미술원 회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이항성의 소개로 대한미술원 단체전이 파리에서 두 번 열리기도 했고, 그때마다 박봉수가 현지에 갔다.

박봉수는 선전에서 입선하면서 작가로서 이름을 드러냈지만 시장 수요가 있고 작품만 팔아 생존가능한 전업 작가로 활동한 것은 1970년대부터다. 그의 이름을 한국 시장이나 일본시장에서 널리 알린 작품은 구상 계열의 동물화나 채색화 등이었지만 그가 시장의 수요와 상관없이 50년대부터 죽을 때까지 파고든 세계는 문자 추상 계열이었다. 그의 사후 열린 전시에서 추상 계열의 작품이 세상에 공개됐지만 이후 수장가의 창고에 들어가 나오지 않고 있어 아쉬움을 더한다.

권행가는 <화랑가의 형성과 동양화 붐>이라는 글을 통해 “일명 ‘동양화 붐’의 시대라 불리는 미술 시장의 호황이 시작된 것은 1974년 중반부터이다. ….당시 주요 구매층이었던 재벌급 실업가, 의사, 변호사, 회사 중역 이상 등 신흥 부르주아지와 그 부인들은 주로 전통적인 산수화나 세필 채색화, 인물화, 미인도를 선호하였다. 반면 서양화에 대한 선호도는 낮아 서울은 6 대 4, 지방은 좀 더 보수적이어서 8 대 2 정도의 비율로 동양화가 더 잘 팔려 이 시기를 동양화 붐의 시대라 부르게 된 것”이라며 1970년대의 미술작품 선호도를 진단했다. 이런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시장 수요가 있는 그림을 그려 그 수익을 원동력으로 자신이 하고 싶은 문자 추상계열의 작품을 제작했던 것이 박봉수였다.

해방 이후 한국미술계를 좌지우지했던 학맥도 없었고, 일본에서 배웠다고 하면 한국화 장르에서 감점요인으로 작용됐던 시대에, 시장 수요에 응하는 한편 자신이 하고 싶어했던 새로운 흐름과 감수성을 중단없이 평생 이어간 작업을 남긴 박봉수의 세계는 그 자체가 20세기 한국 현대회화의 성과이기도 하다. 전시장에 걸린 것은 작은 크기의 작품 6점이지만 그 6점이 그때의 한국 채색화 시장의 상황과 작가의 큰 꿈과 야망, 실행력을 보여주기에 부족하지는 않다.

업데이트 2025.07.31 2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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