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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리먼 컬렉션으로 보는 인상파 작품과 컬렉터 이야기

<인상주의에서 초기 모더니즘까지>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시실, 2025.11.14~2026.3.15
글/ 김진녕

국립중앙박물관(이하 국박)에서 <인상주의에서 초기 모더니즘까지, 빛을 수집한 사람들>전(25.11.14-26.3.15)전이 열리고 있다. 미국 메트로폴리탄박물관(이하 메트) 소장의 미술품 81점을 보여주는 전시다.


전시장의 들머리에는 살바도르 달리(1904-1986)가 요하네스 페르메이르(1632-1675)의 <레이스 뜨는 여인>을 거의 그대로 다시 그린 작품 <레이스 뜨는 여인>(1955)을 걸어놨다. 그리고 그 옆에는 이 작품을 달리에게 의뢰한 로버트 리먼(Robert Lehman, 1891-1969)이 보낸 편지를 벽에 프린트해 부착했다.


살바도르 달리 <레이스를 뜨는 여인> 1955, 캔버스에 유채, 로버트 리먼 컬렉션(1975년 기증) 


전시장 초입의 이 세팅은 메트의 로라 D. 코리 큐레이터가 기획하고 출품작이 이미 정해진 상태에서 이 전시를 국박이 어떻게 다듬었는지를 한눈에 보여준다. 전시 제목에서 보이는 ‘인상주의’나 ‘모더니즘’과 살바도르 달리는 별 상관이 없지만, 이번 전시 출품작 81점 중 65점은 로버트 리먼 컬렉션으로, 1969년 그의 사후 메트에 기증한 3000점의 미술품 중에서 인상주의부터 초기 모더니즘 시기에 걸친 작품을 고른 것이다. 그리고 출품작 중 나머지 16점은 65점의 리먼 컬렉션과 관련된 메트 소장품이다. 즉 이 전시는 메트의 로버트 리먼 컬렉션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 중에서도 2차 대전이 끝난 뒤 로버트 리먼 자신의 안목으로 중점적으로 수집했던 인상파나 초기 모더니즘 계열의 작품 위주로 구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빈센트 반 고흐 <꽃 피는 과수원> 1888, 캔버스에 유채, 헨리 이틀슨 부부 기금(1956년 기부)


폴 세잔 <자 드 부팡 근처의 나무와 집들> 1885-86, 캔버스에 유채, 로버트 리먼 컬렉션(1975년 기증)


로버트 리먼은 팍스 아메리카나 시대의 1세대 수혜자로 꼽을 수 있다. 대항해 시대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식민지 경영과 산업혁명으로 전성기를 누렸던 유럽이 2차 세계대전으로 몰락하기 시작하고 그 자리를 미국이 차지하면서 팍스아메리카나 시대를 열었다. 로버트 리먼은 20세기 중후반 미국의 4대 금융그룹 중 하나로 꼽혔던 리먼브러더스의 중흥기를 이끈 인물이다. 금융업으로 아주 큰 부를 쌓은 그는 젊은 시절부터 미술에 관심이 많았는데, 1913년 조선과 일본, 중국을 여행하며 아시아 미술품을 수집하기도 했고, 2차 대전 뒤에는 프랑스 파리에서 몇 달씩 살면서 미술품을 사들였으며 인생 후반부에는 메트의 이사회 의장을 지냈다.

달리가 리먼의 의뢰를 받아 페르메이르의 모작을 그렸던 때는 1955년으로 그의 나이 50이 넘었을 때였고, 그때 달리는 이미 세계적인 명성을 확고히 했던 미술계의 슈퍼스타였다. 그런 달리에게 작품 주제까지 정해서 의뢰를 했다는 것은 리먼이 서구 미술계와 경제계를 넘나드는 빅 맨이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 무렵 로버트 리먼은 페르메이르의 작품을 손에 넣고 싶어했지만 37점에 불과한 페르메이르의 작품은 그때도 돈이 있다고 해도 구할 수가 없는 귀한 물건이었고 리먼은 당대의 슈퍼스타였던 ‘달리 터치’의 페르메이르 작품 수장으로 소장욕을 달랬던 셈이다.

이런 당대의 유럽과 미국의 정치적 지형변화, 경제적 패권 이동, 사회적인 변화상이 달리가 그린 페르메이르풍 작품 한 점에 모두 들어있는 셈이다. 그러니 국박 전시장의 들머리에 걸린 달리의 작은 크기 작품 한 점이 로버트 리먼이라는 컬렉터와 그의 컬렉션을 함축적으로 소개하게 된 것이다.


키스 반 동겐 <경마장에서> 1950년대, 캔버스에 유채, 로버트 리먼 컬렉션(1975년 기증)


컬렉터 위주의 기획전은 우리에게도 낯설지는 않다. 국박에 기증된 이건희컬렉션이 3년 전 <어느 수집가의 초대>라는 이름으로 같은 장소에서 열렸기 때문이다. 이건희 컬렉션은 우리나라에서 산업혁명의 진행으로 대자본이 등장하고, 그 대자본이 기업 활동으로 인해 축적한 잉여력으로 작품을 수집하고, 그 컬렉터의 사후에 대규모 기증이 이뤄진 첫 번째 사례이기도 하다. 이건희 컬렉션이 기증된 뒤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의 소장품 수가 드라마틱하게 늘어나고, 관련 기증전에 사람들이 몰렸다.

그와 비슷한 현상이 이미 예전에 메트에서 다수 일어났었고 그 대표적인 인물이 로버트 리먼이다. 그의 기증 뒤 메트는 증축 공사를 통해 센트럴파크와 접하고 있는 서쪽에 피라미드형의 아트리움을 갖춘 ‘로버트 리먼 윙’을 만들어 리먼 컬렉션을 상설전시하고 있다.

이번 전시의 공간 연출과 구성도 로버트 리먼의 맨해튼 저택을 재구성한 리먼 윙의 전시 공간을 모티브로 삼고 있는 듯 보였다. 붉은 커튼과 벽지로 꾸민 구성은 전시장 들머리에 재현됐고. 리먼 윙 아트리움의 창으로 쏟아지는 햇살의 변화는 전시장 중간중간 프로젝션으로 창에 비치는 숲의 실루엣과 그림자의 이동, 찰랑이는 윤슬의 흐름은 리먼 윙의 물리적인 공간 구성을 떠올리게 하는 한편, 대기와 바다의 색채 변화에 천착하던 인상파 시대의 인식 변화를 상기하게 만든다.


이번 국박 전시는 여전히 한국의 미술계 이벤트에서 흥행 지렛대로 쓰는 미술계 슈퍼스타의 이름을 내세우지는 않고 있다. 고흐나 르누아르, 달리, 고갱, 마티스, 드가 같은 인지도 높은 화가는 물론 이들보다는 한국에서 덜 유명하지만 앙리 에드몽 크로스, 에두아르 뷔야르, 카미유 피사로, 조르주 쇠라, 폴 시냐크, 피에르 보나르 같은 서양 근대 미술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작가의 작품이 대거 등장하지만, 이들의 이름을 내세우기 보다는 인상주의가 왜 그 시절에 태동하고 인기를 끌었고, 그게 모더니즘으로 어떻게 연결되는지 차분하게 보여주는 선에서 절제한다. 그래서 같은 작가의 작품도 맥락에 따라 여기 저기 흩어져서 걸려있다. 주최측은 전시를 다섯 개의 마디로 나눠 놓았다.

1부, ‘더 인간다운, 몸’에서는 서양 미술의 전통인 누드화가 인상주의 안에서 어떻게 해석하고 변해갔는지를 보여주고, 2부 ‘지금의 얼굴, 초상과 개성’ 역시 낭만주의 시대까지 귀족이나 부유층의 트로피이자 전통적인 화가의 생계수단이었던 초상화가 소시민의 순간을 포착하는 장르로 바뀌어가는 과정을 볼 수 있다. 3부, ‘영원한 순간, 자연에서’에서는 근대 이전 성인의 고행 뒷배경이나 왕과 귀족의 초상화 뒷배경으로 등장하던 풍경이 화면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19세기의 변화를 볼 수 있다. 이때 대중은 철도의 등장과 여행(이동)의 보편화, 도시화의 진행으로 인해 자연과 풍경을 재인식하기 시작했던 시기와 맞물린다. 4부, ‘서로 다른 새로움, 도시에서 전원으로’는 인상파 시대 예술의 중심이던 프랑스 파리라는 대도시의 거리 자체를 소재로 삼은 작품과 일하는 농민과 전원 풍경이 노스탤지어로 작동하는 시대가 됐음을 보여주는 작품이 등장한다. 마지막인 5부에서는 ‘거울처럼 비치는, 물결 속에서’라는 이름으로 변화 무쌍한 빛의 변화가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물빛이나 대기의 빛을 전달하는 데 진심이었던 인상파의 본령을 소개하고 있다.


오귀스트 르누아르 <피아노를 치는 두 소녀> 1892, 캔버스에 유채, 로버트 리먼 컬렉션(1975년 기증)


2부 ‘지금의 얼굴, 초상과 개성’에 소개되고 있는 르누아르의 <피아노를 치는 두 소녀>(1892)는 르누아르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히는 작품이다. 르누아르는 이 작품을 세 가지 버전으로 반복해서 제작했고, 지금 한국에서 두 가지 버전이 동시 소개되고 있다. 리먼 컬렉션 소장본과 프랑스 오르세 미술관 소장본, 프랑스 오랑주리 미술관 소장본 세 가지 버전 중 리먼 본과 오르세 본은 포즈와 작품 크기가 거의 비슷하지만, 오랑주리 본은 오일 스케치라는 점에서 제작 방식이 다르고, 결정적으로 모델의 포즈가 나머지 두 작품과 다르다. 또 다른 두 작품과 달리 서있는 여성이 왼쪽 손을 턱에 대고 있다. 오랑주리 소장본은 지금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오랑주리-오르세미술관 특별전: 세잔과 르누아르>전( - 26.1.25)에 전시되고 있다.

뉴욕의 메트와 파리의 오랑주리 미술관에 가야할 수고를 서울 서초동과 용산에서 해결할 수 있다는 점에서 2025년의 한국은 1892년의 한국이나 1948년의 한국과 다르다. 다만 단군 이래 최대 호황기가 이어지고 있다는 21세기 전반기에 국공립 박물관(미술관) 수만 폭발적으로 늘어난 한국의 상황을 떠올려보면 이 전시는 메트라는 양적으로, 질적으로 1급으로 꼽히는 박물관의 성립 과정을 복기하게 만든다. 초강대국 미국을 대표하는 메트는 로버트 리먼 같은 컬렉터의 기증이 계속 쌓여서 이뤄진 공든 탑이라는 점, 그것이 국립이 아닌 민간 자본과 기획력의 결집으로 이뤄진 성과라는 점, 지리적 사회적 배경이 20세기에 최전성기를 보낸 팍스아메리카나 시대의 축적물이라는 점 등이다. 메트의 예는 미국이라는 특수성이 있기는 하지만 성공적인 박물관 운영에 참고할만한 사례라는 점은 분명하다.
업데이트 2025.11.17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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