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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티컬로 재탄생한 색죽과 비선

글/ 임연숙(세종문화회관 전문위원)

전시명 : 권기수 개인전 《색죽色竹-비선飛線》
사비나 미술관
2025.11.08.-12.31

  한국화 중견작가 권기수의 개인전이 사비나 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2025년 올해는 지난 3월부터 8차례의 개인전을 진행했는데, 그만큼 많은 양의 작품 제작과 왕성한 활동을 보여주고 있다.


사비나미술관《색죽色竹-비선飛線》(2025) 전시 전경


작가와의 인연은 27,8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98년 9월 2일 부터 9월 8일 까지 일주일간 열렸던 덕원갤러리(당시 인사동 소재)의 《화화 畵畵》전시에서 이다. 물론 학과 선 후배로 알고 지내는 관계였지만 기획자와 작가로서 한국화에 대한 고민과 생각을 본격적으로 나누었던 시점이 그때쯤이다. 공동기획자로 최금수(네오룩 운영), 공동 진행에는 당시 작가로 더 알려졌었던 김노암(김기용)이 참여했다. 


《화화 畵畵》전(1998) 브로슈어.


90년대는 세계적으로도 개혁개방, 인터넷 도입 등 변화의 시기였고, 한국화의 정체성에 대한 청년작가들의 고민과 방황이 어느때 보다 깊었던 때였다. 전통의 단절과 서구문화 유입의 급격한 변화는 대학에서 지, 필, 묵과 사군자, 문인화, 산수화를 배운 젊은 작가들이 미술현장에 적응하는 데 많은 노력을 필요로 했다. 전통회화 교육의 특성 중 하나가 스승과 제자라는 관계성과 앞선 시대에 대한 극복과 혁신이 아닌 전통의 ‘계승과 발전’ 이었다. 전통의 계승은 오랜 시간 한국화 작가들을 어렵게 하는 묵직한 화두였다. 

당시에 《화화 畵畵》전은 억지로 한국화의 어떤 형식을 규정하기 보다는 동시대 회화로서 현대미술로서의 한국화 작업을 해나가는 20대 후반~ 30대 초반의 작가 10명, 권기수, 김덕기, 김정욱, 김희선, 박은영, 박일현, 이김천, 주홍, 최은옥, 허진이 참여했다.

권기수 역시 전통회화에 대한 고민과 20대 작가가 표현하고자 했던 현대미술에 대한 갈등과 고민이 깊었다. 당시 작품은 익명의 현대인, 일상 속 인물들을 화선지에 먹으로 그리고, 실사 크기로 벽면에 붙이는 설치 작업이었다. 짙은 먹과 흰 여백, 담묵 표현은 특정되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교복을 입은 여학생 군집과 넥타이를 맨 바쁜 직장인들이 걸어오는, 걸어가는 듯한 느낌을 주는 작품이었다.


《화화 畵畵》전 전시 모습.


계단에 설치된 더부룩한 머리의 소녀 모습을 지금 보니 약간 동구리의 시조쯤으로 여겨진다. 이 작업은 한국화로는 드물게 야외에 설치되기도 했다. 세종문화회관의 야외전시 《81-3 문화공원》 전시의 일환으로 대극장 남쪽 면의 큰 기둥에 확대 그림 시트지를 부착해 설치한 적이 있다. 한국화의 존재감에 대한 고민, 대중과 함께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지는 이후에도 다양한 방법으로 시도되었다. 동구리의 탄생 역시 이러한 맥락인 것으로 보인다. 


세종문화회관 야외전시 모습.


‘동구리’는 단순한 캐릭터이기도 하고 익명의 어떤 인물과도 같은 존재이다. 이번에 전시된 작품 <강산무진도(江山無盡圖)>는 조선시대 이인문(1745-1821)의 강산무진도(江山無盡圖)에서 나온 것으로 전통적인 산수화의 주제인 끝이 없는 강과 산, 즉 대자연의 사계절을 담은 관념산수를 재 해석하였다. 동양미학에서 자연은 삶의 철학 그 자체이다. 동구리라고 하는 단순하고 귀여운 캐릭터가 존재하는 배경은 단순한 배경으로서만 끝나지 않고 동양철학, 동양의 삶을 대하는 철학을 담고 있다. 


 <강산무진江山無盡> 2013, Acrylic on canvas on board, 462x145cm

<총석(叢石)-귀거래사(歸去來辭)> 2018, acrylic on canvas on board, 200x100cm

사군자와 동구리가 있는 화면은 다분히 장식적인 느낌을 준다. 사군자는 옛 선비들이 매화, 난초, 대나무, 국화를 선비가 갖추어야 할 덕목과 비교하여 좋아하고 그림에서 자주 다루던 주제이다. 선비들이 좋아하고 자주 그림의 소재로 다루어 왔던 사군자를 현대화시켰다. 캐릭터화 한 인물과 금박 바탕에 원색의 간략화한 표현으로 작가 권기수를 팝아트 작가로 분류하기도 하지만 작가가 추구하는 것은 고도의 관념적 호사와 특정 계층이랄 수 있는 선비들이 누리던 문인화와 같은 고급 예술을  배경으로 한다. 

《색죽(色竹)-비선(飛線)》에서 비선(飛線)은 버티컬로 재탄생한 공간이다. 권기수가 늘 대중과 소통하고자 해왔던 맥락에서 비선은 동구리와 공간을 과감하게 결합시킨 실험 공간이라 할 수 있다.


한국화에 대한 고민, 전통에 대한 고민, 겸재와 단원을 보고 흠모한 작가는 전통에서 지, 필, 묵을 뺀 개념의 골격만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전한다. 이번 전시에서 사유하는 동구리를 통해 한층 더 다각화된 이미지의 차용에 접근하였다. 
업데이트 2025.11.28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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