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명 : 광복 80주년 기념 특별전 - 우리들의 이순신
장 소 :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시실2
기 간 : 2025.11.28~2026.3.3
글/ 김진녕
임진왜란(1592년, 선조 25년-1598년 선조 31년)은 국왕이 진격하는 왜군을 피해 북방의 변경까지 도망갔을 정도로 조선이라는 나라가 역사에서 사라질 뻔했던 위기였다. 그러나 “신에게는 아직도 전선이 12척이 있습니다. 죽을 힘을 다해 막아 싸운다면 오히려 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는 출사표를 던진 충무공 이순신(李舜臣, 1545-1598)의 활약으로 왜군을 조선에서 몰아낼 수 있었다. 이순신의 해전기록은 세계 해전사에도 최상위권에 올라있을 정도라, 이순신은 요즘 말로 하면 세계 해전사의 ‘GOAT’다. Greatest Of All Time, 한반도 거주자의 입장에서도 이순신은 조선에서 현대 한국으로 이어진 한국인의 정체성을 지켜낸 인물이기에 지금도 불멸의 이순신이라고 불리는 데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광화문 네거리에 이순신 장군의 동상이 서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주최측은 이 전시를 이순신 장군의 탄신 480주년과 광복 80주년을 기념하는 전시라고 밝혔다.
한국의 국공립박물관에서 겸재 정선이나 단원 김홍도 같은 화가를 제외하면 개인의 이름을 앞에 내세워 특정 역사 인물을 단독으로 조명하는 전시는 거의 최초가 아닌가 싶다. 한국 TV 드라마나 영화, 소설에서 이순신이라는 소재가 20세기와 21세기에도 컨텐츠 창작의 화수분 노릇을 하고 있고, 그 결과물이 방송계나 영화계에서 최고 흥행기록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국공립박물관에서 아직까지 이순신을 전면으로 조명하는 전시가 없었다는 것은 신기한 일이기도 하다. 국립진주박물관에서 임란 때의 진주성 전투를 소재로 조선의 화력 무기를 집중 조명한 《화력조선》전 기획이 큰 성공을 하고 국립진주박물관의 대표 브랜드가 된 바 있으나 이순신을 전면에 내세운 전시는 없었다.
박물관 본관 1층 특별전시실에서 열리는 이번 전시에서는 유물과 기록으로 이순신을 조명한다. 이순신의 친필본 『난중일기』, 『임진장초』, 충무공 장검, 『징비록』 등 258건 369점이 등장한다. 여기에는 국보 6건 15점, 보물 39건 43점, 국가등록문화유산 6건 9점이 포함되어 있으며, 이순신 장군의 종가에서 처음으로 외부로 반출한 종가 유물 20건 34점도 들어 있다.
전시는 이순신이 무과에 급제했던 순간, 북방 변경의 여진족을 토벌하는 순간, 왜의 침략을 예상했던 순간, 선조가 파직시켰던 이순신을 다급하게 다시 부르는 순간, 그리고 전사의 순간까지 무장 이순신의 삶에서 고비가 됐던 순간을 보여주는데, 회화 작품이나 재산 분배기 같은 문서, 왕이 내린 교지, 명나라 원군으로 참여한 진린(陳璘, 1543-1607)이 남긴 책, 당시의 무기, 이순신이 일기를 통해 드러낸 복잡한 심경, 그가 사용한 복숭아 모양의 구리 잔과 받침, 그의 글씨가 들어있는 ‘이순신 장검’ 한쌍, 장군의 사후 현재까지 간행된 조선시대의 기록물과 근현대 한국의 문학작품과 초상화, 세계 해전사에 기록된 조선 해군 이순신의 위상 등 다양한 시각자료로 이순신을 조망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전시의 흐름은 이순신의 삶과 그 후의 평가를 네 개의 마디로 엮어낸 것이다. 제 1부 '철저한 대비, 그리고 승리'에서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이순신의 순간을 보여준다. 무과 급제부터 북쪽 변경에서의 여진족 토벌, 전쟁을 예감하고 한산도로 진을 옮긴 이순신의 전쟁 대비가 시각 유물로 펼쳐진다.

<수군조련도병> 8폭 병풍 부분, 조선 후기, 종이에 채색, 152.5x464.4cm(화면), 국립중앙박물관

조선 수군의 무기 운용을 시각화한 영상
제 2부 '시련과 좌절의 바다를 넘어'에서는 최전방의 전투에서는 이겼지만 후방의 정치에서 밀린 이순신의 좌절과 그럼에도 백의종군했던 명량대첩과 노량해전으로 이어지는 기적같은 순간의 기록이 등장한다. 노량해역 출수 유물, 일본과 스웨덴의 박물관에서 출품한 전쟁기록화 등을 통해 그때의 상황을 머리 속에서 재구성하게 만든다.
제 3부 '바다의 끝에서 나를 돌아본다'는 이순신 장군이 남긴 전쟁 일기인 『난중일기』를 통해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고 제 4부 <시대가 부른 이름>에서는 이순신 장군의 사후 조선 조정에서 그에게 부여한 예우와 기록을 보여준다. 명나라 원군으로 참여한 진린 제독이 남긴 “이순신은 경천위지(經天緯地)의 능력과 보천욕일(補天浴日)의 공훈이 있는 분”이라는 글이 적힌 고서 <진도독게(陳都督揭)>(1619, 진주박물관 소장)가 등장한다. ‘경천위지 보천욕일’은 “천하를 다스릴 수 있는 능력과 찢어진 하늘을 꿰매고 흐린 태양을 목욕시킨 공로가 있는 분”이라는 뜻으로 전시장 들머리와 끄트머리에 걸려 있기도 하다. 이 섹션에서는 일제 강점기에 일어났던 현충사 중건 사업, 이순신 장군 현양 사업을 국책으로 밀던 제3공화국 시절 생산된 다양한 시각 유물 등 조선에서 현대 한국으로 이어지는 이순신에 대한 기억과 평가, 일본과 유럽에서 발행한 출판물과 우표 등에서 보여지는 이순신에 대한 세계의 평가 등을 볼 수 있다.
칼집과 칼자루를 포함해 2미터가 넘는 이순신 장검 한 쌍과 섬세한 복숭아 잔은 무관 이순신과 인간 이순신의 대조적인 면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이순신 종가에서 보관하고 있던 의장용 칼인 이순신 장검(국보 제 326호)은 두 자루의 칼에 모두 “갑오년(1594년) 4월 태귀련과 이무생이 만들었다”라는 명문이 있어 제작 연대와 제작자가 확실한 유물이다. 장검의 칼날에는 이순신이 직접 쓴 ‘석자 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하가 두려워하고’(장검1), ‘한 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산하를 물들이도다’(장검2)라는 의미의 글귀가 써있다.

이순신 장검 부분, 1594년, 칼날 길이 137.3cm(왼), 137.8cm, 현충사(이순신 종가 기탁품), 국보
三尺誓天 山河動色(석 자 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하가 두려워 떨고)
一揮掃蕩 血染山河(한 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산하를 물들이도다)

복숭아 모양 잔과 받침, 중국 16세기, 금동, 잔둘레 24cm, 현충사(종가 기탁품), 보물
이번 전시에서 눈길을 끄는 또다른 대목은 전통회화에서 보기 힘든 실제 ‘전쟁의 장면’이 다수 등장한다는 점이다.
전시에 등장하는 전쟁화 중 시기적으로 가장 앞선 전쟁을 다룬 것은 <장양공정토시전부호도(壯襄公征討時錢部胡圖)>이다. 임란 이전인 1588년(선조 21) 함경도 병마절도사 이일(李鎰)이 함경도 지역을 침략하던 여진족 시전부락을 정벌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1587년 녹둔도 사건으로 백의종군하고 있던 이순신은 이 전투에 참전하여 공을 세워 사면을 받았다. 그림 아래 좌목(座目)에 “우화열장 급제 이순신(右火烈將 及第 李舜臣)“이라고 적혀있다. 이 그림의 제작 주체는 이일의 손자인 이견(1618- ?)이고 1849년에 원본을 따라 다시 그린 이모본이다.
임진왜란을 다룬 조선 쪽의 전쟁 기록화는 임란의 첫번째 전투, 즉 1592년 음력 4월 14일에 벌어진 부산진성의 전투를 다룬 <부산진순절도>(1760년, 보물 제391호, 육군박물관 소장)이다. 1709년(숙종 35년)에 최초로 그려진 원본은 전하지 않고 1760년(영조 36년) 동래부사 홍명한이 화가 변박에게 시켜 원본을 모사한 그림이 현재 전해지고 있다. 제작 주체는 조선이고, ‘순절도’라는 이름에서 보듯 역대 동래부사가 임진왜란을 기억하고 일본에 대한 경계심을 깨우치며 순절자를 기리기 위해 제작한 것이다.

변박(1742-?) <부산진순절도> 1760, 비단에 채색, 145.0x96.0cm, 육군박물관, 보물

변박 <동래부순절도> 1760, 비단에 채색, 145.0x96.0cm, 육군박물관, 보물
임란을 일으킨 왜쪽에서 그린 전쟁화도 나와 있다. 임진왜란에 참전한 사가 지역의 다이묘,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 1538-1618) 가문에 전해 내려오는 <울산왜성전투도>(1886)가 이번 전시에 출품됐다. 1597년 12월 2일부터 1598년 1월 4일까지 울산 왜성에서 벌어진 전투를 다룬 이 그림은 조명연합군이 울산 왜성을 둘러싸고 공격하는 장면부터 조명연합군이 왜군에게 쫓겨 경주 방면으로 퇴각하는 장면까지 세 틀의 병풍화로 기록했다. 전시장에 걸린 장면은 첫 번째 병풍화인 조명연합군이 왜성을 둘러싸고 공격하는 장면이다. 나베시마 나오시게가 귀국한 뒤 제작한 원본은 1874년 소실됐고 현전하는 그림은 가문에 전하는 다른 사본을 토대로 1886년에 모사한 것이라고 한다.

<울산왜성전투도> 일본 1886, 종이에 채색, 168.7x368.5cm, 일본 나베시마보효회 징고관
중국 명나라쪽의 시각이 반영된 임란 기록화도 있다. 무려 스웨덴 동아시아박물관에서 건너온 틀을 포함해 <정왜기공도병(征倭紀功圖屛)>(일본, 19세기)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완전체로 볼 수 있는 기회다. <정왜기공도병>은 6폭 병풍 두 틀(전반부, 후반부)로 명나라 원군의 출전부터 남해안에서 벌어진 전투와 승리, 귀국까지, 임진왜란의 전 과정을 명나라 원군(장수)의 시각에서 다룬 기록화이다.

<정왜기공도> 전반부 6폭 병풍, 일본 19세기 추정, 종이에 채색, 156.5x256.6cm(화면), 스웨덴 동아시아박물관

<정왜기공도> 후반부 6폭 병풍, 일본 19세기 추정, 종이에 채색, 156.5x256.6cm(화면), 국립중앙박물관
스웨덴 발렌베리 가문에서 소장하던 전반부는 출정부터 압록강을 건너 순천 왜성 공략 준비를 하는 장면에서 끝나고, 2011년 국립박물관이 런던에서 열렸던 경매를 통해 입수한 후반부는 순천왜성을 들이치는 장면, 노량대첩, 남해왜성에서 왜의 잔당을 소탕하는 장면, 한양의 궁에서 열린 승전 축하연, 마지막에는 명으로 귀환하는 모습까지인데, 명나라 장군이 기억하고 자랑하고 싶은 임란의 순간들이 묘사돼 있다. 그림을 제작한 주인공은 명나라 원군을 총괄한 형개(邢玠, 1540-1612)일 것이라고 추정된다. 명나라 장군이 임진왜란을 바라보는 ‘시선(주장)’이란 점에서 조선쪽의 사료와는 차이가 나는 일방적이고 부풀려진 승리담을 담은 측면이 있다는 얘기다.
재미있는 점은 임진왜란을 기록한 명나라의 여러 족자 그림이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일본에서 일종의 장식적인 병풍화로 제작했던 것이 지금 전시장에 나온 유물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이 병풍에서는 세부적인 디테일을 파고 들었을 때 어느 쪽이 아군인지 적군인지 판별하기 어려운 형상이 등장하는 등, 19세기경 일본에서 영웅담을 시각화한 장식용 병풍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전쟁도, 시간이 흘러가면 호사 관심을 충족시키는 소재가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들의 이순신》전은 이순신을 박물관에서 유물과 고서, 고화로 입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전시라는 점 외에도 임진왜란 7년 전쟁에 참여했던 조선과 명, 왜의 입장에서 그린 동아시아의 전쟁기록화를 볼 수 있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몰입형 전시를 위해 전시장 앞 뒤로 (그래픽으로 추정되는) 물결치는 판타스틱한 파도 영상이 투사되고 있으나, 정작 이순신 장군이 명량해전을 벌였을 당시나 지금이나 매일 매순간 거센 물살이 회오리치는 울돌목(진도와 해남 화원반도 사이) 등 한산도나 남해쪽 실사 영상이 있었다면 하는 아쉬움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