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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간의 모색과 성과,《사유공간: 원문자의 작품세계》

- 1960년대 부터 2025년까지 60여 년의 모색과 축적

전시명 : 사유공간: 원문자의 작품세계
장 소 : 이천시립월전미술관
기 간 : 2025.10.16~12.14
글/ 김진녕

한국화가 원문자(元文子, b.1944)의 회고전 《사유공간: 원문자의 작품세계》가 이천시립월전미술관에서 열렸다. 이번 전시에는 국전시대로 불리는 1960년대부터 2025년대까지 60여 년의 시간동안 '오늘의 한국화'를 모색해온  원문자의  작품 50여 점이 전시장에 나왔다. 


전시장 들머리에 걸린 <음조>(1965)는 그 시절 한국화단을 설명하기에 충분해 보였다. 화면 뒷쪽에는 편종이 걸려있고 관모에 흉배가 달린 전통 복식을 입은 악사는 거문고나 대금을 쥐고 있어 궁중음악(정악)을 연주하는 중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피부톤과 옷색은 모두 먹을 섞어서 원색을 '톤다운'시키는, 해방 뒤 정립된 한국화의 관습을 보여준다. 또 작품의 소재 역시 식민통치의 유산을 지우고 '조국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려야한다'는 3공화국 시절의 국시를 반영하는 것이다. 실제로 이 무렵 국전에서는 서양화나 동양화나 전통적인 소재를 다루는 것이 유행하기도 했다. 


<음조> 1965, 한지에 수묵채색, 246x183cm


대학 4학년 시절 <음조>를 그린 원문자는 이화여자대학 회화과 재학시절 이유태(1916-1999)와 안동숙(1922-2016)의 가르침을 받았다. 이유태는 해방 전 선전에서 채색인물화로 큰 상을 받은 뒤 해방직후 대학 시스템에 편입된 미술대학 체제에서 교수를 지낸 인물이다. 해방 뒤 이유태는 수묵담채풍의 풍경화를 주로 그렸고 안동숙은 수묵쪽 화가로 분류된다. 

해방 뒤 건국한 신생공화국 대한민국의 미술은 미술대학과 대한민국미술전람회(1949-1981) 두 축으로 움직였다. 원문자는 국전에서 국회의장상(1970)과 대통령상(1976)을 받았다. 특히 수묵채색화가 대통령상을 받은 것은 1949년 국전이 생긴 이래 처음이었다. 이는 국전과 대학 시스템으로 재편된 한국미술계에서 전통 한국화(동양화)가 어떤 위치였는지 짐작하게 만드는 방증이다. 


<원숭이> 1986, 한지에 수묵채색, 192.3x391cm


야단스럽지 않은 한국적 색채감을 익혀 꽃과 새, 전통예술의 악사와 무희를 그리던 원문자의 세계는 1980년대 중반 이후, 작가가 마흔이 넘어가면서 큰 변화가 등장한다. 스승을 통해 익힌 전통의 세계에서 변주하던 것을 넘어서 자신만의 것을 모색하기 시작한 것이다. 화본이 아닌 현장 데생을 통해 동식물의 외형을 그리는 대학교육을 받은 원문자는 1980년대 후반 한지의 질감이 도드라지게 부각된 화면에 과감하게 변형된 꽃이나 동물을 그린 선보인 작품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일종의 종이부조라고 불릴 수 있는 새로운 시도는 1990년대-2010년대 초반까지 이어진 한지 추상으로 이어진다. 


무제, 1989, 한지조형에 수묵채색, 170x132cm


전시장에는 "화조화를 그리면서 대상에 얽매이는 것이 답답하게 느껴져 대상을 생략하거나 단순화시키는 작업을 시도해 보았지만 만족할 수 없어서 결국 추상적 표현을 선택하게 되었다"라는 작가의 말이 걸려있었다.  


이 시기 그의 작품은 한지를 물에 풀어 만든 종이죽을 부은 뒤, 다시 이를 굳히고 다듬어 작품의 표면을 종이죽의 질감으로 채우거나 먹의 농담을 풀어놓는 무채색의 시대를 선보였다. 화면을 채우던 다양한 색채 대신 오돌도돌한 한지찰흙의 질감, 구김과 콜라주, 절단, 한지 노끈 같은 시각을 통해 전해지는 다양한 촉각정보로 화면 전체를 채웠다.


그리고 2000년대 이후 이런 작품에 '사유공간'이라는 이름을 붙이기 시작했다. 그의 머리 속에 들어있는 비물질적인 조형성에 대한 탐구를 세상에 보여주는 방식으로 '사유공간'이란 이름으로 풀어놓은 것이다. 이 사유공간 시리즈는 2020년을 전후해 한지의 물성까지 버리고 더욱 단순해진 2차원 이미지로 옮아갔다. 한지 죽을 이용해 우연성을 포함시켰던 그의 한지부조 스타일(만들기) 작업이 컴퓨터 그래픽을 이용하는 포토아트를 통해 다시 '그리기' 작업으로 전환한 것이다. 물론 1990년 이전의 그리기 스타일로의 복귀는 아니다. 


<사유공간> 2005, 한지조형에 채색, 110x185cm


그는 2020년을 전후해 직접 찍은 사진 이미지를 컴퓨터로 편집하여 한지에 출력한 뒤 다시 여기에 채색을 가미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일상에서 바라본 인상 깊은 풍경 혹은 대상이 작가 본인의 컴퓨터 편집을 통해 현실의 구체적인 이미지를 색면 덩어리로 변화시킨다. 원문자는 이 과정에서 기계적인 우연성에만 화면을 맡기지 않는다. 포토아트를 통한 화면은 한지나 사진인화지, 수입지에 출력된 뒤 그의 손에서 붓과 전통 채색재료로 리터치를 통해 최종 완성된다. 이 과정에 대해 그는 "나의 의도를 살리려면 이런 개입이 꼭 필요하다"고 밝혔다. 


<사유공간> 2025, 한지에 수묵채색, 130x210cm


이렇게 완성된 최근작은 묵의 농담이 아닌 같은 색 계열의 농담 변주를 통해 색면을 구현하거나 채색화 재료 특유의 깊고 부드러운 색감이 포토아트의 우연성과 결합된 것을 볼 수 있다.  화면에 구현된 조형성은 꽃을, 화조를 그대로 그렸다면 얻을 수 없었을, 자유롭고 무르익은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사유공간思惟空間: 원문자의 작품세계》전은 해방 이후 대학 교육 시스템이 배출한 원문자라는 작가가 전통 채색의 세계에서 모색하던 시절의 경험과 성과, 먹과 한지라는 물성 자체를 탐색하던 모색과 성과, 포토아트라는 새로운 기계어를 도입한 21세기의 모색까지 원문자가 60여 년간 한국미술계에 쌓아온 시간을 보여준다. 거긴에 원경으로 깔려있는 60년대 국전 시스템과 한국 미술계의 역학 구도, 근대의 경험이 쌓이기도 전에 식민과 해방, 전쟁, 산업화를 통해 강제로 현대에 편입된 현대 한국의 정체성 찾기 강박 등 사회적, 시대적 변화를 찾아볼 수 있는 전시다. 

업데이트 2025.12.29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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