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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원 사후 회고전 - 《당신을 슬프게 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전

-한국의 고전을 전거로 하는, 색채가 터져나오는 농원

전시명 : 이대원: 당신을 슬프게 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장 소 :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기 간 : 2026.8.6-11.8
글/ 김진녕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이대원(李大源, 1921–2005) 작가의 작고 후 첫 대규모 회고전 《이대원: 당신을 슬프게 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8.6-11.8)가 열리고 있다. 이대원이 12세 때 처음 그린 정물화 <백일홍>부터 말년의 대형 〈농원〉 연작과 2001년의 가로 7m 대작 <도리화>에 이르기까지 유화 120여 점과 아카이브 100여 점, 이대원이 생전에 수집했던 고미술품과 자료까지 이대원 세계를 이루는 거의 모든 요소가 전시장에 등장했다.


<농원> 1998, 캔버스에 유채, 112x162cm, 서울시립미술관


이대원 작고 뒤 2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한국 경매시장에서 빼놓을 수 없는 근대 작가로 사랑받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한국 미술계에서 그에 대한 조명이 인색했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 이대원의 작품은 서양 인상파를 연상시키는 터져나오는 색의 향연이었고 당대의 대중에게 인기를 얻었다. 근대기 한국 최고의 학력을 갖춘 인물로 미술을 전공한 적이 없지만 미대교수를 지내고 대학 총장까지 맡았던 특이한 경력, 1950-60년대에는 미술계의 후방 업종이라 할 수 있는 반도화랑을 운영하다 한국 미술계 일선인 대학교수로 전직한 그의 특이했던 이력을, 전시는 하나 하나 따라가면서 이대원이 화면에서 표출시켰던 세계의 뿌리가 어디서부터 출발하고 영글었는지 보여주고 있다.

주최측은 이대원의 세계를 연대기순으로 따라가면서 네 부분으로 나눠 소개한다.

1부 “배우되 갇히지 않다”는 193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 이대원이 화가로 형성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청운공립보통학교 때 처음 유화를 접한 그는 경성제2고등보통학교에서 미술교사 사토 구니오(佐藤九二男, 1897-1945)를 만나 서양미술과 조선 공예를 함께 배웠다. 그는 고등학교 재학시절 조선미술전람회 공예부 서양화부에서 모두 입선하며 공예와 회화 양쪽에서 재능을 인정받았다. 유족이 소장하고 있다가 이번에 처음으로 일반에 공개된 <납힐조선문이매병풍(臈纈朝鮮紋二枚屛風)>(1938년, 천에 염색, 88.9×65.4cm)는 선전 공예부 입상작으로 두 번째 섹션에 소개되고 있는 <영빈관 실내장식 디자인 제안서>(1960년대)(이대원 문우식 공동제작)과 함께 이대원이 장식미술에 대한 관심이 뿌리깊은 것임을 보여주는 전시물이다.


<납힐조선문이매병풍> 1938, 천에 염색, 88.9x65.4cm, 개인


눈에 띄는 점은 근대기에 경성제2고보에서 이대원, 장욱진, 유영국 등 근대기의 대표적인 한국 화가를 미술에 입문시킨 일본인 교사 겸 화가 사토 구니오의 작품 세계를 보여주는 코너를 1부 내에 만들었다는 것이다. 국내에 공개된 적 없는 <설정(雪庭)>이라는 작품이 사토 구니오의 한국 민속 공예를 다룬 드로잉과 함께 전시장에 놓여있다.

2부 “이어가되 휩쓸리지 않다”는 해방 뒤 미술이 대학과정에 포함되고 난 뒤인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서양의 최신 유행이던 앵포르멜 풍이 수입 미술잡지를 통해 젊은 대학생 사이에 번지던 시기 이대원의 활동 자취를 쫓아가고 있다. 이 시기의 이대원은 1956년 운영에 참여하기 시작해 1959년부터 약 8년간 반도화랑을 운영했다. 전시장에는 반도화랑 운영과 관련된 자료와 이대원의 구장품으로 알려진 도자나 목기 자수 등 고미술품을 선보여 이대원의 취향과 안목을 짐작하게 하고 있다. 재미있는 점은 나막신이나 강화반닫이장 등 이대원이 작품으로 화면에 옮긴 오브제의 원본도 함께 전시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화가 이화자가 “홍익대 재학시절에 이대원 선생이 소장하던 목기러기와 반닫이장을 스케치해서 그렸다”고 회고한 적이 있는데, 바로 그 원본이 되는 목기가 전시장에 나온 것이다.



<반닫이> 1965, 캔버스에 유채, 92x73cm,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을 전공하지 않았던 이대원이 미대 교수가 될 수 있었던 것은 1957년 경성제2고보 동창인 이도영이 홍익대재단을 인수한 것과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65년부터 홍익대에 출강하던 이대원은 1967년 홍익대 교수로 임용됐고 뒷날에는 홍익대 총장까지 지냈다. 그가 반도화랑에서 손을 떼고 홍익대 교수라는 제도권으로 진입한 시기가 바로 이 시기이기도 하다.

이 섹션에서 또 하나 눈길을 끄는 부분은 동양화가 소정 변관식의 작품과 이대원이 소정에 대해 쓴 글에 공간을 할애하며 이대원과 전통 문인화 세계의 접점을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서화미술회에서 안중식과 조석진에게 그림을 배운 노수현(盧壽鉉, 1899-1978)은 해방 뒤 서울대 미대 교수를 지냈다. 성인이 된 뒤 이대원은 노수현으로부터 사군자 치는 법과 서예를 배웠다고 알려진다. 이대원이 최소한 동양화의 준법과 서양의 붓과는 다른 동양의 둥근 붓을 다루는 법을 알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전시장에는 동양화의 준법을 연상시키는 붓질과 문인화 계보에 속하는 대나무와 괴석을 그린 작품이 걸려있고 그 한 켠에 이대원이 변관식(卞寬植, 1899-1976)의 세계를 상찬하는 글이 걸려있다.

"조선조의 겸재가 쌓아 올렸다가 그 다음 세대에 지속되지 못했던 한국화의 전형이 소정에 와서야 비로소 그 하나의 결실을 맞게 되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특히 중묵법에 의한 굳센 선의 힘과 중후감이 압도적이며 풍우에 시달린 한국 산하가 지니는 표피와 암준을 누구보다도 가장 적절히 표현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것은 그의 오랫동안의 자연에 대한 통찰력과 부단한 기법연마에서 연유된 것이다."(이대원, 「소정변관식필 촉석루춘색」, 『한국경제신문』, 1985.4.4.)

그렇게 한국의 고전과 전통을 통해 쌓이고 다듬어진 이대원의 세계는 전시 3부 “쌓아 올리니 자유롭다”에서 이대원 스타일의 농원으로 피어났음을 알 수 있다.

이대원이 197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색점과 색선, 색면을 거듭 쌓아 올리며 독자적인 회화 언어를 완성해 가는 과정을 작품으로 확인할 수 있다. 터져나오는 노랑 빨강의 색채적 환희의 농원 시리즈가 얼핏 서양의 인상주의 화풍을 연상시키지만, 사실은 서양 유화의 유산 뿐 아니라 동양화의 태점과 적묵법의 변용, 전통 자수의 짧게 끊어치는 선이 색점과 색선으로 이어지는 복잡한 숙성과정을 거친 세계임을 주최측은 강조하고 있다.

4부 “사람을 슬프게 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평생 축적한 색과 빛의 언어를 대형 캔버스에 남긴 이대원의 말년 세계를 선보이고 있다.

이번 전시에는 미술관 입구 로비에 걸린 커다란 작품을 처음부터 마주봐야 한다. 통상 덕수궁관 전시에 전시 로고와 설명문이 차지하던 자리에 작품이 걸리는 것은 이례적이다. 때문에 이번 전시의 상징과도 같은 작품이 된, 가로 5미터가 넘는 <담(秘園)>(1986)은 주미한국대사관에 걸려있던 작품으로 이번 전시를 위해 고국을 찾았다. 이 작품을 비롯해 전시 마지막 파트에는 인생 말년에 대형 작품을 쏟아냈던 행복한 작가 인생을 살았던 이대원의 대작이 집중적으로 소개되고 있다. 이 전시장에선 가로 2미터가 안되면 소품으로 취급된다.

이 섹션에 걸린 대표작 리스트에는 <인왕산>(2000)(200x500cm, 개인 소장), <과수원> (1996-1997)(175x360cm, 가나문화재단 소장), <농원>(1994)(112x324cm, 개인소장), <도리화>(2001)(160x700cm, 개인소장), <사과나무>(2000)(200x700cm, 서울미술관 소장), <농원> (1995)(130x500cm, 한솔문화재단 소장)가 포함돼 있다. 이 작품의 특징이라면 길이에 비해 높이는 소박한 휴먼 스케일이라는 점이다. 때문에 층고가 높지않은 한국의 상업용 건물에도 충분히 걸 수 있다. 또 관람자의 감정의 요동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요소를 간직한 인물이나 인공 구조물은 거의 등장하지 않고 있다는 점도 공통적이다.


<사과나무> 2000, 캔버스에 유채, 200x500cm, 서울미술관


<농원> 1994, 캔버스에 유채, 112x324cm, 개인


이는 섹션 4의 특징이 아니라 이대원의 작품을 다룬 네 개의 전시장에서 모두 확인되는 특성이기도 하다. 전시장 1에 걸린 이대원의 자화상이나 가족을 그린 몇 점의 인물화를 빼고는 이번 전시에서 인물을 다룬 그림이 없다. 사람의 손에 지어진 인공구조물도 궁궐 담이나 담쟁이가 그려진 양옥집 담벼락 등 극히 제한적으로 다룰 뿐이다. 이대원은 찐득찐득한 인간의 희로애락이 직접적으로 묻어나는 것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던 것 같다. 나무와 먼 산이 있는 공간이 빛이 터져 나올 듯 묘사된 화면 속에 대자연에 잠시 스치듯 지나가는 인간의 작위(作爲)는 자수 기법으로 표현된 나무 줄기에 간접적으로 드러날 뿐이다. 이 색면을 꼬아놓은 듯한 자수기법이 90년대 이후 이대원의 말년에 등장한 점 또한 흥미롭다.

전시 제목인 ‘당신을 슬프게 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고고미술사학자 김원룡(1922-1993)이 이대원의 그림을 평가한 글에 등장하는 문구 “사람을 슬프게 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를 변용한 것이라고 한다. 부자집 아들로 태어나 말년까지 당대의 인기 화가로 시장 수요에 응하며 큰 그림을 그리며 평생을 살다간 그에게도 삶이 어렵게 느껴진 순간이나 좌절이 있었을 것이다. 그것이 학도병으로 끌려갔었던 순간이나 미술 전공을 반대한 부모의 뜻에 따라 경성제대 법학과에 입학한 것일 수도, 평생 남에게 말할 수 없었던 그 무엇일 수도 있다. 다만 그는 사람들 사이의 일을 작품에 그대로 드러내 직접적으로 되새김하는 것에 대해서는 거부감을 보였던 것으로 보인다. 대신 사람들 사이를 벗어나서 사람을 가장 깊숙히 들여다보는 법을 모색한 것 같다.



업데이트 2026.08.10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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