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화, 「식민지 시기 정선 회화의 담론 형성과 수집」, 『미술자료』 103호, 국립중앙박물관, 2023.6
18세기 당대에 명성을 떨쳤던 정선이 그 이후에 부침 없이 계속해서 그 명성을 유지했던 것은 아니다. 현재의 위상이 완성된 시점은 일제강점기, 그 시기에 한국의 초기 미술사 연구자들, 조선으로 건너와 나름대로의 기준으로 식민지의 유산을 조사하고 보고했던 일본인들, 막 설립된 미술관 박물관의 소장품 입수 기록, 경매나 거래 장부 등 매매 기록 등을 바탕으로 한국의 회화 가운데서 정선의 작품 또는 진경산수 작품이 당시에 어떤 평가를 받고 있었는지를 알아보고자 한 논문이다.
한국에 회화사가 생긴 이래 그의 진경산수는 한국 문화의 독자성과 정체성의 설명에 큰 부분이 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그의 명성을 시간을 x축으로 해서 그래프로 그린다면, 그 그래프는 정선의 사후에 줄어들었다가(그의 영향력이 조선말기의 회화에 그다지 크게 보이지는 않으니) 어느 시기 올라오는 굴곡이 있을 것이다. 연구자는 근대적인 미술 개념과 제도가 등장한 식민지 시기를 주목해서 1) 정선 회화에 대한 근대 지식인들의 서술과 담론 2) 대규모 고서화 수집에서 수집 대상으로서의 정선 회화의 양상, 이렇게 두 가지 축을 살펴서 겸재 정선의 위상이 성립되는 과정을 재구성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식민지 시기 정선 회화의 담론은 20세기 초 한국 지식인의 정선에 대한 평가나 서술, 그리고 이들보다 한발 앞서 조선미술사를 서술하기 시작한 총독부 중심으로 활동했던 일본의 관학자들의 기록을 비교해 살펴본다. 한국의 지식인들은 오세창의 근역서화징에서의 시각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데, 다른 화가들에 비해 특별한 강조가 된 부분은 국가적 위기가 심화되던 시기 민족의 예술적 역량에 대한 자부심을 고취하는데 정선의 작품세계가 적절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았다. 오세창, 문일평, 고유섭, 김용준의 논고 등은 조금씩 차이가 있으나 종래의 화보풍의 모방이 아니라 ‘내 나라의 자연을 묘사하고 내 민족의 정신을 그대로 응결하여 독창적으로 표현’한 데에 주목한 것이다.
이에 반해 일본인들이 편찬했던 『조선미술대관』(1910), 『이왕가박물관소장품사진첩』(1912) 등에는 고대부터의 역대 회화사를 개관하고자 했으나 지식과 이해의 수준이 낮았고, 정선과 조선의 실경산수화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사진첩 중에는 정선 그림이 한 점 있는데 그 선택의 기준도 의아하고, 그림의 설명에는 “조선인은 작은 작품은 잘 그리지만 큰 작품에는 서투른 공통의 폐단을 지녔는데 겸재에 있어서 더욱 그러한 점을 볼 수 있는데 이 그림가 같이 포치와 결구가 마땅한 것은 아마 드물 것이다”라고 되어 있다. 이보다 조금 발전된 저작인 요시다 히데사부로의 『조선서화가열전』(1914)에는 정선의 기본적인 사항이 쓰여 있으나 큰 의미부여는 없다. 고적조사사업을 별였던 세키노 타다시는 1931년 동경에서 《조선명화전람회》를 개최하여 255건 이상의 명화를 소개했으며, 조선의 회화에 대한 요구가 커져 이에 부응해 『조선미술사』(1932)를 발간했다. 여기에서 정선에 대한 서술은 다음과 같이 발전했다.
1912년, 1933년의 『이왕가박물관소장품사진첩』에 실린 정선의 그림들.
“영정조조에는 문화의 부흥과 더불어 거장명가가 배출되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정선(겸재), 조영석(관아재), 심사정(현재)으로서 세상에는 사인명화인 삼재라 불렀다. … 정선은 산수가 가장 뛰어났으며 조선의 진경을 그려 스스로 일가를 이루었다.”
이왕가박물관의 <여산폭포>나 박재표 소장의 <여산초당도>를 예로 들며 결구가 웅대하고 묵색이 윤택하다고 설명했으며, 총독부박물관의 <입암도>에는 굳센 기운이 나타난다고 했다. 세키노 타다시는 고적조사와 전람회 진행 과정에서 오세창을 비롯 조선의 인사들과 종종 접촉해서 오세창의 근역서화징의 표현이 감지된다.
세키노 타다시는 1934년 『조선고적도보』 14권 회화편을 발간했다. 이 기념비적인 책에 실린 6점의 정선 회화는 <금강산도> 등 모두 뛰어난 작품들이다.
차이는 있으나 20세기 초반 한국의 지식인과 일본인들 모두 한국의 회화사에 대해 이해도가 늘어난 것으로 파악되지만, 논의 속에서는 조선 지식인은 정선에 대한 독창성을 강조한 반면 일본인 학자들은 정선과 진경산수의 가치 제고 노력은 크게 보이지 않는 차이가 있다.
박물관 컬렉션의 성립과 정선 회화의 수집
논문에서는 이왕가박물관, 조선총독부박물관, 총독부도서관의 전체 회화 소장 대비 소장 정선 회화 수와 매입 시기 등을 조사하고 주요 작품의 경향을 살폈다. 이 공적 컬렉션에 포함된 정선 회화는 38건 107점이며 이중 실경산수화는 12건 39점으로 40%에 이른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의 대표적 회화 작품 다수가 이왕가박물관에서 온 ‘덕수’품인 것으로 알 수 있듯이 이왕가박물관과 조선총독부박물관의 소장품은 양과 질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총독부박물관이 정선 회화를 구입한 일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사사업을 통해 입수된 유물을 관리하고 전시하는 데 목표가 있었던 기관이니 당연한 결과다.
공공박물관들이 서화 컬렉션들을 소유하던 시기가 조금 지나서 1920~30년대 고미술시장이 급격히 확대되고 조선인 개인수장가들이 대거 등장한다. 박영철의 컬렉션은 경성제대에 기증해 서울대박물관에, 전형필의 컬렉션은 간송 재단에 남아 현재까지도 당시의 형태가 거의 유지되고 있다. 서울대박물관의 대표 소장품 중 하나가 된 『겸현신품첩』에 정선의 회화가 남아 있고, 오세창의 지도를 받은 간송 전형필은 『해악전신첩』, <통천문암> 등의 대표 작품을 매입했다. 이들은 사대부가에서 흘러나온 작품이나 일찌감치 일본인들이 입수했던 것을 다시 경매 등을 통해 사들였다. 경매도록을 통해서도 이러한 매매 기록을 알 수 있다. 과거에서 현재까지 역시 정선 회화의 최대 수장처는 간송미술관이며, 내용면에서도 실경산수화의 명작을 다수 보유하고 있다. 이왕가박물관은 그에 비해서는 관념적 산수의 걸작이 많이 포함된 편이다.
『겸현신품첩』에 실린 정선의 그림들. <만폭동>, <혈망봉>. 서울대학교박물관.
간송미술관 소장의 『해악전신첩』 표지, 그 안에 실린 <금강내산>(1747).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유리건판사진들. <해문조범> <관악청람> <용정반조>
정선의 가치평가의 양상을 볼 수 있는 당시의 매매/거래 가격도 약간이지만 짚어주고 있다. 1930년대 서화거래장부에서 133점의 서화 거래 내역 중 정선 회화는 6점이 확인되는데, 사진이 없어 정확한 작품을 파악하기 어렵지만 매입가는 3,000원 대, 매도가는 15,000원으로 전체 고미술품 중 가장 고가에 해당한다. 참고로 김홍도의 <해상군선도>는 매입가 1,500원 매도가 9,000원으로 기록되고 있다. 다른 화가의 그림들은 대체로 100~300원 사이를 오간다.
추가적으로 국립박물관에 있는 유리건판으로 남은 정선의 작품 사진 중에 와다 타츠라는 사람 소장의 정선 산수화 3점이 있는데, 와다 타츠가 19세기 말 조선에 들어와 크게 사업을 벌이고 중요 석조문화재를 소장하거나 거래에 관여했던 와다 츠네이치의 부인임을 찾아냈다. 세키노 타다시의 전람회 목록에 있는 <제가필화첩> 속 그림 설명 등을 근거로 와다 타츠의 소장품은 석농화원 2권의 일부였을 것임을 추정해내기도 했다. 사진의 그림 중 <관악청람>은 선문대박물관에 소장된 그림임을 확인했다.
담론 쪽에서는 일제에 의해 서술된 조선미술사는 한계가 많았고 이것은 오히려 조선인들이 자국의 고미술을 학술적으로 인식한 계기가 되기도 하며 정선의 진경산수화에서 민족의 정체성을 확인하고자 했고, 시장에서는 1930년대 이후 조선 회화에 대한 인식이 높아진 조선인 수장가들이 활약해 진경산수의 명품 컬렉션들로 현재에 남았다는 결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