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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백자의 붐이 일어나기 직전, 1920년대 후반의 상황

정은진, 「근대기 일본인의 조선백자 수집과 연구: 1920년대 후반을 중심으로」, 『미술사학연구』 제319호, 2023.09., pp.145-172.

지금이야 달항아리나 조선시대 청화백자가 귀하게 여겨지지만 100여 년 전에는 그렇지 않아서 예술품으로 인정되지 못했다. 그러다 1930년대 일본에서 조선공예 붐이 엄청나게 일게 되면서 위상이 급변한다. 1920년대에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한국도자 담당 학예사가 당시의 잡지, 신문기사에 남겨진 흔적으로 경위를 추적하는 논문이다. 

1910년대의 한국 도자 컬렉션 상황
1920년대 후반의 일을 다루기 전에 1910년대 초에 한국 도자와 관련된 외국인들을 소개한다. 프리어 갤러리에 고려청자 컬렉션의 주인공인 의료선교사 호레이스 알렌(Horace N. Allen, 1858-1932)은 1884년 한국에 온 해부터 고려청자 수집했고, 초대 영국 영사 칼즈(William Richard Carles, 1848~1929)는 자신의 저서에 개성 출토 고려청자 언급하고 삽화도 넣었다. 당시 최대 규모의 고려청자 컬렉션을 가졌던 일본공사관 야마요시 모리요시(山吉盛義 1859~?) 등이 있다. 청화백자를 언급한 논문을 썼던 학자 야기 쇼자부로(八木奘三郎 1866~1942)는 1904년 논문에서 한국 도자 중 ‘미술품의 부류에 들어가는 것’으로 “고려시대 청자, 고려시대 백자, 상감이 들어간 것” 이 3 종류뿐이라고 말한다. 조선 청화백자는 계통적 연구에 유익하지만 미술품으로서의 가치는 결정하기 어렵다고 했으며 분청사기(미시마)를 언급하지만 고려로 편년하고 있어서 당시의 인식을 알게 해 준다. 

갑신정변 이전에는 고려청자 조차도 가전/소장되고 있던 것이 없다가 어지러운 세상에서 도굴이 횡행하고 철도건설, 러일전쟁 등을 배경으로 토목공사가 많아지면서 땅에서 많은 양이 발견되면서 미술시장에 등장하게 된 것이다. 주목을 받으며 도굴을 다시 조장하는 악순환이 되면서 고려청자 광(狂) 시대가 먼저 도래해 1911-12년 절정을 이룬다. 그때까지는 (고려 청자에 비해)조선 백자의 경우엔 평가도 낮고 수집하려는 사람이 없었다. 

무엇보다 한국의 도자(공예 포함)를 널리 알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세 사람이 있다. 아사카와 노리타카(1884-1964)는 1913년, 아사카와 타쿠미(1891-1931)는 1914년에 한국으로 왔다. 형인 노리타카는 임진왜란 때 전소됐던 경복궁터에서 발견된 분청사기 둥을 조사하면서 분청사기가 조선 초의 것이라는 추정을 했고, 이후 각 시대의 옛터(경희궁 등)를 조사해 도자기의 대체적 변청 과정을 알게 된다. 1914년 야나기 무네요시(1889-1961)를 방문할 때 조선 청화백자 지참해 그에게 깊은 인상을 준다.

1916년 이후 야나기는 아사카와 형제와 함께 도자기를 포함한 각종 골동품, 공예품을 수집하는데, 이들이 이후 벌어지는 수집 붐의 시초라 할 수 있다. 그가 본격적으로 조선 미의 특질을 본격적으로 분석하고자 한 바는 잘 알려져 있다. 


야나기는 아사카와 다쿠미의 집에서 이 <백자청화동화연화문호>를 보고 감탄했다.  



1920년대 활약하는 세 사람
야나기는 곧 백자도 논하게 된다. (일본)사학자들이 조선에서 인정할 만한 예술이 없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고 자신이 위대한 작품들을 발견했으며, 조선의 것이 독립의 기풍을 보인다고 주장했다(1921년). 오히려 민족의 특색이 조선의 작품에 잘 나타난다는 것이다. 분위기를 보여주는 것이 조선 백자 특집의 『시라카바白樺』지 1922년 9월호에서 아사카와 노리타가는 조선 도자의 시기를 구분해 1) 초기:분청사기(미시마三島) 전성시대(100년), 2) 중기:경질백자시대(150년), 3) 후기:청화백자 전성시대(200년), 4) 말기(50년), 이렇게 총 4기로 나눴다. 


아사카와 노리타가 <李朝陶器時代表>


당시 일본 역사학자들의 한국에 대한 시각과는 완전히 다른 사관을 반영한 것이고, 미시마라고 불리던 분청사기를 고려가 아닌 조선 초기로 편년한 것, 출토 도편을 가지고 고고학적 방법을 한국도자 연구에 최초로 도입한 공적도 크다. 이 특집호에서 야나기는 조선 도자의 외견적 특징 즉 문양, 기법, 유약의 종류, 기형, 기종을 분류했다. 

당시의 몇 가지 기록들을 보면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아사카와 다쿠미의 1921년 1월 일기 중에는 “야나기의 조선민족미술관을 위해 사둔 수집품 ‘스무 지게와 짐수레 한 대’에 나의 4-5년간의 수집품을 보탰다.”고 되어 있고, 다쿠미의 수집품 규모는 1922년 9월 연적만 300여 종이었다. 1922년 10월 경성에서 조선 도자만을 모은 ‘이조도자기전람회’를 열었을 때 출품작 400여 점 중 100점은 도미타 기사쿠, 오바 즈네키치, 오이시 요시키, 아유카이 후사노신 등 일본인 컬렉터의 것이었다고 해서 일본인 컬렉터가 증가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민족미술전람회> 1921년


<이조도자기전람회> 1922년


야나기는 특집호의 글에서 ‘나는 아직까지 조선 사람들 중 자국의 도자기를 사랑하고 수집하고 연구하고 이해하고 있는 사람을 만난 적이 없다’고 하여 아직 한국인 컬렉터는 등장하기 이전임을 알 수 있다. 

조선백자 주요 연구자 오쿠다 세이치(奥田誠一)는 야나기의 이론을 비판하고 조선시대라도 중국의 영향을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지만 야나기 무네요시와 아사카와 노리타가에 의해 이조 자기의 예술적 가치가 증가하고 세인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고 쓰기도 했다(1923년 1월) 
1925년 2월 7일자 경성일보에서는 “조선 청화백자 연구는 거의 이뤄지지 않았고, 야나기 무네요시의 한 두편 연구 발표는 충분히 꿰뚫어보지 않는 감이 있다”고 기록했는데 몇 달 만에 이 평가는 완전히 다르게 바뀐다. 중요한 것은 1920년대 후반의 상황으로 1930년의 조선도자 붐의 전조가 된다.

1920년 후반의 양상
1925년 12월 5일자 경성일보는 “최근 조선에서 고도자기에 대한 취미성이 향상”됐다고 보도한다. 10개월 만에 다른 양상이 된 계기로 짚은 사건은 11월 9일 일본에서 열린 이노우에 후작 가문 소장품 매각에서 조선에서 만들어진 고려다완인 ‘고쇼마루(御所丸)’가 10만 9500엔이라는 고가에 낙찰됐던 것이다. 

또 하나의 유명한 사건은 ‘계룡산소동’ 사건(1926년말~1927년 전반). 원래 계룡산에 고려자기 가마터가 많다는 이야기가 전해 오고 있었고, 1924년 동학사 부근에서 가마터가 십여 군데 발견됐다. 일본에서 옛날부터 귀하게 여겨왔던 계룡산 분청사기 “미시마”의 생산지가 발견된 것이 점차 알려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매입에 열중했다. 땅값이 오르고, 주민들은 농사일을 제쳐두고 발굴해서 파는 돈벌이에 취했다. 조선총독부가 개입해 1927년 9월~10월까지 계룡산의 도요지를 조사한 보고서를 간행했다(『계룡산록도요지조사보고』 1929년). 

1928년 경성에서 <이조도자전>이 열리고, 여러 소장가들이 출품했던 것으로 뛰어난 조선 백자를 소유한 수집가가 많아졌음을 알 수 있다. 오쿠다 세이지는 자신의 생각을 수정해 한국 도자사 시기를 원시기, 청자기, 분청사기기, 청화백자기로 나누고 분청사기(미시마하케메)기야말로 조선 도기의 독자적인 양식을 형성한 황금시대라고 평가했다. 

이 때 일본에서 다도가 신흥 기업가들에게 다시 번성하면서 아사카와 노리타가 등이 그런 기업인들로부터 연구비를 지원받아 전국 가마터 조사에 본격적으로 착수했다. 

1930년대 – 조선시대 공예품의 일본 유입과 한국인 컬렉터 부상
1930년대는 조선시대 공예품 외에도 미술품 전반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고 있었다는 배경이 중요하다. 1930년 2월 <진장품 전시회>는 한반도에 거주하던 개인들의 다양한 동서고금의 미술 소장품을 전시한 것인데, 한국인 컬렉터의 서화가 많았다. 700점 이상 출품되어 주목받았다. 이 외에도 1931년 2월 오사카 골동상 무라카미 슌쵸도가 도쿄에서 <조선도자 목공전관>을 열었고, 1932년 10월 도쿄에서 조선민족미술관 소장품과 도쿄 개인 소장품 중심으로 <이조도자기전>이, 같은 해 요정 반스이켄에서 <조선공예품전람회> 2차례(한반도에서 사들인 도자기가 화물열차 한 대분), 1933년 오사카에서 <조선고도기전람회>, 같은 해 11월 도쿄에서 <동양고미술전>이 열리는 등 ‘조선’을 내건 각종 전시회와 즉석 판매회를 많이 확인할 수 있다. 교토와 오사카의 골동품 가게에 조선시대 청화백자가 진열되고, 나고야에서 가짜 동화백자가 경성으로 역유입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근본적인 배경은 1920년대 중반부터 1930년대 중반까지 일본에서 도자사 연구가 한창이었다는 점이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학문 연구와 취미의 세계가 결합되면서 『도자』, 『차완』 등의 도자기 전문잡지가 창간(1927년, 1937년)되는 등 도자기 취미가 대중화됐다. 아사카와 노리타가가 자신의 조사를 집대성해 <조선고도사과대전람회>를 열고, 아사카와 다쿠미의 『조선도자명고』 도 나왔다.  

1930년대 말에 이르면 이조 도자기의 감상이 정점에 달하고 가치도 최고조에 이른다. 1942년에는 야나기 무네요시조차 조선 것이 병적으로 비싼 값을 부른다고 감회를 표현할 정도가 됐다. 

1930년대 신문에는 치과의사 함석태, 이한복, 김용진 등 한국인 수집가의 이름이 자주 등장하고 1933년 이조도기 수집가로 알려진 화가 도상봉이 300점 출품한 전시회가 열렸으며, 같은 해 이태준도 도쿄에서 자신의 수집품을 전시했다. 경성의 고미술상 문명상회 이희섭이 1934년부터 41년까지 도쿄와 오사카에서 조선 고미술판매회를 7차례 열어 일본으로 고미술을 가져갔다. 


이희섭의 1941년 일본 전시판매회에 등장했던 <백자청화초화문각호>


이제는 한반도에서 미술품이 해외로 유출되는 것에 대한 경각심을 가지자는 의견들이 나온다. ‘한반도인’ 수집가가 미술구락부 매출의 절반에 이르고, 부호인 전형필이 미술관 건립 계획임이 알려지기도 한다.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청화백자 기사 검토, 청화백자의 민간 사용, 분청사기에 새겨진 명문 연구 같은 개별적 연구들이 등장한다. 꾸준히 활동하던 아사카와 형제와 야나기 무네요시 등의 활동이 널리 인정받게 된다. 

결국 글의 결론은 1) 수집, 2) 연구, 3) 일반인의 미술-고도자취미 세 가지 분야에서의 상호작용으로, 서로 관계를 맺으면서 전개된 양상이라는 것. 한국인의 수집과 연구가 등장하는 배경이나 1930년대부터 40년대 전반에 자산가들이 나타나 ‘취미 교양’을 추구하기 시작한 것 등을 보여주면서 널리 인식되고 있는 것처럼 일본인이 큰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하지만 광복 이후에 갑자기 한국인에게 넘겨진 것이 아니라 1930년대 후반에는 이행 조짐이 있었음을 짚고 있다. 



업데이트 2024.02.14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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