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진, 「1980년대 중‧후반 한국 채색화 경향」, 『미술사연구』 제 45호, 2023.12.,pp.179-203.
1980년대 한국화는 서양화에 밀려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이 침체기를 극복하기 위해 문제점을 진단하고 돌파구를 찾아나가려고 애쓰던 한국화단, 특히 채색화단의 노력과 영향, 의미를 짚는 글이다.
1980년대 중후반이 되면, 수묵 중심이었던 한국화단에서 채색화가 (다소) 활성화되는 현상이 나타났는데 그 양상은 어떤 것들이었는지와, 이, 삼십대 청년 세대 채색계열 작가들이 그 채색화운동의 중심에 있었는데 그들의 작품은 어떤 특징들을 보이고 있는지가 논문의 주요 내용이다.
서정태 <오시(午時)>, 1979년, 종이에 채색, 220×160cm, 제2회 《중앙미술대전》 특선
곽정명 <거리 2>, 1983년, 종이에 수묵채색, 147×220cm,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연구센터
바로 직전 시기, 1960~70년대 천경자(1924-2015), 오태학(1938-) 등의 채색화가의 노력에도 불구, 채색화는 왜색 논란을 짊어지고 있었다. 식민잔재의 청산이 해결되지 않는 한 채색화가 앞으로 발전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일본의 미술교육을 받은 화가들이 교육과 작품 심사를 맡아 기법과 감각 측면 모두에서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것, 즉 반성 없는 맹목적 추종과 후세에 전수하는 일을 청산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었다. 여기에 1980년대 초반까지도 수묵이 편중되고 있어 수묵만을 전통으로 여기는 일반의 시선도 채색화를 위축시키는 요소가 되고 있었다.
수묵의 조형성을 새로이 실험하는 수묵화운동은 화단에 자성의 계기가 되었는데, 이것은 수묵만이 아닌 다채로운 변주 시도의 필요성도 증가시켰다. 작가들에게 전통과 현대성을 의식하고 독자적인 표현을 추구하는 자연스러운 분위기가 조성된다. ‘채색화’라는 용어를 사용한 전시가 열리고 상업화랑에서 채색화가를 띄우기도 하며 새로운 활력소가 된다. 1987년 최병식의 인터뷰에서는 ‘3~4년 전부터 일기 시작한 채색화 운동은 오랜 전통 단절을 경험한 동양화단의 새로운 각성’이라고 표현한다. 유지원(1935-), 이영수(1944-), 이숙자(1942-), 김보희(1952-) 등의 개인전, 박생광 등 16명이 참여한 동산방의 그룹전 등 다양한 전시가 열렸다. 1985년 파리 그랑팔레의 《한국미술전》의 전시 포스터는 박생광의 작품이 선택됐고, 박생광 특별 코너가 포함되기도 했다.
김진관 <가도(街道)>, 1985년, 종이에 채색, 120×135cm
전통 채색화가 고분벽화, 불화, 민화 등 과거의 여러 형식에서 우리의 정서를 찾아내려는 노력을 하고 활발한 활동을 전개해 나간 데에는 당시 젊은 채색화가들의 역할이 컸다. 저자는 미술대학 졸업생들이 배출되어 미술인구가 늘어나면서 구조 변혁의 동인이 될 수 있었다고 분석하고 있다. 국전 외에 신문사 등 다양한 민전이 나온 것 또한 다양화에 도움이 되었다는 것이다.
당시 미술대학을 졸업한 30대 전후, 그러니까 1950년대생들이 ‘청년세대’로 불리며 새로운 다양한 화풍을 전개시키는 주체가 되었는데, 수묵과 채색계의 대립을 줄이고 기류를 변화시키려했다. 젊은 작가들을 통해 전환점을 모색하려는 움직임으로 몇 가지 주요 전시가 있다. 《오늘과 하제를 위한 모색전》(동덕미술관, 1985년)에서 서정태, 김진관, 김선두 등 중앙대 동양화과 출신 젊은 화가들의 그룹전은 도시민의 삶을 소재로 다루며 연민과 비판의식을 보여주었다. 최병식에 의해 기획된 《채색의 표정전》(동산방화랑, 1986)에서는 김보희, 서정태, 김천영, 김진관, 김선두, 곽정명, 김성은 등이 자연이나 현대 도시문명, 인간의 모습 등을 소재로 채색의 경향을 보여주었다.
김선두 <도시>, 1985년, 종이에 수묵채색, 120×135cm
이 청년세대들의 작품 특징은 우선 소재적으로 도시에 투영된 소외된 인간상이 주된 제재가 됐다는 점이다. 도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을 소위 ‘70년대 실경산수’로 보여주었다. 표현에 있어서는 구상적, 사실적 경향이 강하게 나타났으며, 본인들이 대학 등에서 체득한 서구적 묘사 방식, 채색 방식이 어우러졌다. 매체의 한계에서 오는 기법과 표현방식을 극복하려는 경향도 보이는데, 수묵의 번짐이나 명암대비도 사용하면서 진한 채색을 중요 부분에 쓰고 수묵을 배경에 이용한다든가, 채색에서의 중채 기법을 수묵에서도 쓴다든가 하는 융합의 시도를 보인다. 사실적 표현 외에도 현대 회화로 나아가기 위한 반추상화도 여럿 찾아볼 수 있다.
김천영 <양광(陽光)>, 1986년, 종이에 수묵채색, 78×108cm
김보희 <을숙도>, 1986년, 종이에 채색, 114×147cm,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연구센터
80년대 청년이었던 이들은 원로가 된 오늘날까지도 채색화의 경향을 이끌며 현대적 조형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을 젊은이들과 함께 모색하고 있다. 왜색 배척 기류에 밀려 소외되지 않기 위한 노력에서 이제 벗어나 재도약과 새로운 전환점이 요구되는 시기, 과거의 노력과 시도에 대한 공부가 더욱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