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진성, 「〈파초야우도(芭蕉夜雨圖)〉의 작자 문제」, 『미술사와 시각문화』 Vol.33, pp.132~147, 2024.05.
2015년 크리스티 경매에서 중국 명대 전기의 것으로 출품되었던 산수화 한 점이 있다. 곽희 <조춘도>와 흡사한 면이 있어 그런 추정을 한 것이었지만, 2016년 야마토분카칸(大和文華館) 특별전에서는 조선 초기 작품으로 재평가해 소개했다. 이 작품은 작년 가을, 후쿠오카시미술관의 《조선왕조의 회화―산수‧인물‧화조》 특별전에서 <방곽희추경산수도>로 이름을 바꿔 달고 다시 공개됐다.
‘文清’ 인장이 찍혀 있는 <방곽희추경산수도倣郭煕秋景山水圖>
이 그림에는 ‘분세이(文淸)’ 인장이 있다. 현재 분세이라는 인물의 (국적을 포함한) 실체는 모호하지만 그래도 다이토쿠지(大德寺) 스님들과 교유하고 후원받은 기록, 인장이 찍힌 그림들이 남아있다. 일본으로 건너가 활동한 조선인일까? 일본인일까? 일본인이라면 조선 초기 화풍의 영향을 받은 것일까? 조선 전기 그림으로 확정되는 분위기인 듯한 위의 <방곽희추경산수도>에 분세이 인장이 찍혀있는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베일에 싸여 있는 조선 초기의 회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국적 문제가 명확하지 않은 몇 가지 그림들을 자세히 살펴보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 논문에서는 그런 모호한 그림 중에서 도쿄국립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파초야우도(芭蕉夜雨圖)>를 깊이 있게 다루면서 조선 초기 산수화의 본질적인 특성을 밝혀내려고 한다.
<파초야우도> 1410년, 종이에 먹, 95.9x31.0cm, 도쿄국립박물관 (일본 중요문화재)
<파초야우도> 그림 부분
<파초야우도> 그림 위에 적혀 있는 제찬은 모두 14인의 것으로, 12명의 선승들, 무장 1사람, 그리고 집현전 학사 양수(梁需)라는 인물이다. 그는 아시카가의 쇼군 취임을 축하하기 위해 1410년 봉례사라는 이름으로 일본에 파견됐다. 1410년 8월 난젠지(南禪寺)에서 열린 선승들의 시회에 초청받아 참석하고 칠언절구를 남기기도 했다.
이 그림에서 우리는 마하파 화풍의 소나무와 파초, 모옥 등을 발견할 수 있다. 인물은 없고 중앙 낮은 산의 표면에는 굵은 태점이 찍혀있다. 중경에는 안개 낀 개울가에 버드나무, 잡목, 갈대 등이 보인다. 이러한 화면 구성은 당시 일본(무로마치 시대) 초기 수묵화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양식이기 때문에 조선의 화풍이라고 여긴 연구자들이 많았다. 몇몇 일본 연구자들은 양수가 데리고 온 조선 화가일 가능성이 크다고 하기도 했다. 경물 표현에 짙은 먹이 사용된 것이 조선 회화로부터의 영향이라는 주장도 있다.
하단의 제찬.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양수가 쓴 부분이다.
논문에서는 일본으로 건너 갔던 조선 화가가 그렸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지만 제찬 내용 등을 고려해 보면 비록 조선화풍이 보인다고 해도 양수가 대동한 조선 화가가 그린 그림은 아닐 것이라고 추정한다. 이 그림은 난젠지의 젊은 승려인 잇카 켄푸가 시를 짓고 시의를 표현하기 위해 그림으로 제작한 것으로, 주변인들에게 제시를 요청해 받아 제찬과 그림을 합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한데, 어떤 이는 1410년 6월에 제찬을 지었고, 양수의 것은 두 달 후인 8월에 난젠시 시회에서 쓴 것이다. 양수의 제시 내용 또한 “공은 멀리 어디에서 왔는가 묻는 사람 없으니” 등의 구절이 포함되어 자신이 데리고 간 화가가 그린 그림에 넣을 제시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연구자는 이 그림의 국적 문제를 판가름할 또 하나의 수단으로 이 그림에 사용된 취묵(吹墨, 후키즈미) 기법을 들었다. 취묵 기법은 먹을 뭍힌 붓 끝에 입김을 불어 작은 묵점을 화면에 흩뿌리는 것인데 조선시대 전체 회화 작품들 중 취묵 기법이 사용된 예는 알지 못한다고 하였다. <파초야우도>보다 연대가 앞선 일본 수묵화 중에서는 예를 발견할 수 있다.
결국 <파초야우도>를 그린 것은 잇카 켄푸가 시를 들고 그림을 의뢰한 어떤 일본 화가였을 것이라는 결론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그림에서 지울 수 없는 조선 화풍은 조선 초기 산수화 양식을 정의하는 데에도 중요하며 한국 회화사 연구에서 중요한 작품임을 강조했다.
연구자는 작년(2023년) 또다른 논문에서 원나라 이곽파 그림들의 특징을 고려했을 때 조선 전기의 안견파 화풍이 금대 이곽파 산수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주장했다. <방곽희추경산수도>의 모델, 원형이 되었던 중국의 산수화 작품이 있었다는 가정하에, 그 모델은 원대 이곽파의 산수화가 아니라 금대의 산수화라는 것이다. 이 논문은 그 후속편에 해당하며, 조선 초기 산수화로 거론되는 그림들이 어떤 국적의 화가가 언제 그린 것이고 어떤 그림과 화풍의 영향력 아래 있었는가를 판단하고, 조선 초기 그림의 본질과 특성을 알기 위해 증거를 모아나가는 작업의 시작이 아닌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