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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농의 그림은 평가절하되었을까

박수홍, 「남농 허건(1908~1987)의 실경산수화 연구-1960년대 이전 작품을 중심으로」, 『한국근현대미술사학』 47, 2024.7, pp.119-147.

1980년대 대한민국예술원 원로회원이 되고, 고향 목포의 명소 갓바위 근처에 남농기념관을 건립해 허씨 가문의 작품을 전시하고, 운림산방을 다시 일으켜 세운 남농 허건. 할아버지 허련(許鍊, 1808~1893)에서 이어진 전통, 일본을 통해 익힌 근대적 미감, 서울과 일본 화단의 경향을 체크하며 끊임없이 노력했던 화가. 허건은 근대미술사에서 호남화단을 이끈 대표적인 작가로 알려져 있지만 현재 그에 대한 평가는 뜨뜨미지근하다. 

이렇게 위상이 축소된 이유는 지금 볼 수 있는 그의 작품들이 대부분 단조롭고 정형화된 것들이기 때문이다. 이 논문은 다양했던 허건 작품 세계의 전반적인 모습이 있음을 보여주고 특히 다양한 화풍으로 실경을 제작했던 업적을 끌어올리고 이들이 가려지게 된 이유를 추정해서 그를 지방작가로만 남기게 되는 오류를 범하지 말자는 주장을 펴고 있다. 



허건, <부여소견>, 1938, 종이에 수묵담채, 101×225㎝, 부국문화재단



허건, <금강산보덕굴>, 1940, 종이에 채색, 151×128㎝, 목포성옥기념관

허건은 1930년대 무렵 배운대로 전통적인 화풍(화보식)을 그렸고, 조선미술전람회를 통해 입신을 모색했다. 관전을 통해 성공하기 위해 전통에서 다소 벗어난 사경산수, 채색풍경화 스타일을 시도했고, 청전화숙을 다니며 중앙의 미술계에 진입하고자 했고, 청전의 사경산수화풍이 관전에서 주요 양식이 되며 이를 따랐다. 자신의 화풍을 구축해나가기 위해 전국을 여행다니며 조선의 풍경을 담기 위해 노력했다. 수묵에 채색을 가미한 <부여소견> 등이 이 때의 그림이다. 하나의 소재를 반복적으로 그리면서 대상을 탐구하기도 했다. 

일본에서 들여온 개량 채색안료가 인기를 끌면서 서양화의 풍경화처럼 그리는 작가들이 많았고 허건 또한 이를 시도했다. 짙은 안료를 가지고 사실적인 표현을 하니 청전의 양식과는 차별화가 됐다. 그의 채색 작품은 1940년 본격화되는데, 이는 가와바타미술학교 출신의 동생 허림(1917~1942)의 역할이 커 보인다. 요절하여 그 재능을 펼치지 못한 동생에게 허건은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다. 


허건 <운문암> 1943, 종이에 채색, 148×179㎝, 개인
일본 관전인 《신문전》(1943)에서 입선한 작품. 동생 허림의 영향이 강하다.


해방 후 일본화 재료 사용한 그림들을 왜색으로 싸잡고 이를 친일로 인식하는 사회적 경향을 두려워해 일본산 안료의 사용을 자제하고 이전에 작업한 채색화들을 내놓기를 꺼렸다. 이것이 근현대 미술사의 왜곡을 일으킨다는 혐의를 받는다. 

해방 후 허건 또한 짙은 채색의 서양화적인 풍경화에서 수묵담채의 실경산수화로 화풍을 바꾸었다. 허건은 신남화를 주창했는데 이 ‘신남화’는 중국의 화본을 본뜨지 않고 조선의 풍경을 사생하고 그 정서를 작품 속에 그리는 것을 말했다. 저자는 이를 왜색을 탈피하고자 하는 자기 반성의 모습으로 보았다.

해방 후부터 1960년대 이전까지의 원숙기에 허건은 갈필과 담채를 중심으로 남도의 풍경을 담았고, 동양화 붐에 따라 대중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미점, 피마준 같은 전통화법을 다시 사용하기도 했다. 진도의 명승지, 다도해의 풍경, 목포근교의 어촌 마을 등 남도의 모습들을 엄청나게 많이 그려 호남의 향토적 서정의 공감대를 자극했다. 호남의 작가로 머물지 않기 위해 백양회에 참여하고, 그 덕분에 백양회의 첫 지방 전시는 1959년 봄, 목포에서 개최되었다. 


허건 <서귀포칠십리> 1947, 종이에 수묵담채, 30×150㎝, 개인


허건 <금강산만폭동> 1948, 종이에 수묵담채, 63×167㎝, 목포성옥기념관


60년대 후반, 그림에 ‘남농’이라는 글자만 있어도 높은 가격에 매매됐다. 후반기의 작품들이 가장 많이 전해졌고, 허건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반복된 양식으로 그려진 다수의 작품이 호남화단에 발전과 변화보다는 오히려 답습으로 인한 침체를 초래했다고 보았다. 말년의 다작이 아닌, 그 앞쪽으로 시선을 옮겨 그가 실경을 어떻게 탐구하고 그려냈었는지에 초점을 두면 (지방 화가로서만이 아닌) 수묵의 근대화를 이루고자 했던 그를 재평가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많은 사람이 좋아하여 작품이 잘 팔리는 작가가 미술사에서 혁신적이라고 할 만한 성취를 얻기는 오히려 어렵다. 어떤 이유로 사람들의 유행과 스타일이 자신과 잘 맞게 된 이후, 자신은 그렇게 하지 않으려 해도 뭔가 새로운 것을 시도하기 위해 필요한 노력과 시간이 주어지기 힘들다. 사람들이 계속 그 시그니처 그림을 요청한다. 작품이 정형화되고, 그런 그림이 시중에 넘쳐난다. 다른 사람들(특히 제자들)도 그 그림을 많이 따라하게 된다. 위작도 많고 흔해진다. 자신은 풍요롭게 살게 되지만 원하는 작가로서의 성공은 그런 것이 아닐 수도 있다...이렇게 되면 시간이 흐른 뒤에는 원래 가지고 있었던 대중적인 성공과 인기도 유지하기 어렵다. 작가에 대한 평가를 떠나 당시의 화가들의 조건, 선택지, 노력, 돌파구, 그리고 성과에 대한 구체적인 모습을 조명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업데이트 2024.12.26 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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