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수진, 「‘한국적 구상’으로서의 1960-70년대 반(半)추상 회화」, 『미술사학보』 vol., no.62, 2024, pp. 61-91.
형상을 갖춘 그림을 구상 회화라고 부르지만, 추상화가 등장하기 전의 형상이 있는 그림들을 구상화라 부르지는 않는다. 추상이 있기에 구상이 비로소 정의될 수 있었던 것이다. 한국에서는 현대적 회화가 뿌리내리면서 1960년대 구상과 추상이 대립하는 시기가 있었고 그 이후 추상이 대세를 이루며 현대 한국 회화사를 만들어 나갔다. 그런데 1970년 전후의 한국 서양화로 쉽게 떠올리게 되는 서정적인 분위기의 반(半)추상화(Semi-abstract Paintings)들의 위상은 어떠할까.
반추상회화는 1960년대 구상과 추상이 대립하는, 이후 추상이 우위를 점해 나가는 과정에서 과도기적으로 존재했던 회화 정도로 인식되는 경향이 있었다. 온건하고 서정적인, 중후한 감이 있는 이 그림들은 전위성, 혁신성이 조금 부족한 예술이라 여겨지며 미술사적으로 높게 평가되지는 않았고, 앵포르멜 추상, 기하학적 추상, 단색화 등이 이어져 나오면서 더욱 그 존재감이 가려진 감이 있다.
이 논문은 몇몇 단체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반추상 화가들의 작품이 지닌 독자적 양식 특성을 찾고, 전개 과정과 그 이후 겪은 운명을 살펴보는 글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이는 미술사에서 ‘한국적 구상(Korean Figurative)’을 정의하는 데 필요한 작업임을 보이고 있다.
한묵 〈화어(花魚)〉 1957, 캔버스에 유채, 64x49cm
연구는 1961년 10회 국전 때 서양화 부분 심사위원 겸 운영위원을 구상, 반(半)추상, 추상 계열 작가 각 3명씩으로 분류하고 수상작도 그에 비례해 나왔다는 점을 주목했다(이어서 1969년에는 구상과 비구상이 분리됐다). 1961년 제2회 파리비엔날레에 김창열, 정창섭, 장성순, 조용익 등이 최초로 국제전 참가하게 되면서 앵포르멜 추상회화가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1962년엔 신상회(유영국, 장욱진, 이봉상, 손동진, 박창돈, 박항섭 등) 현대미술가협회+60년미술가협회 연합 악뛰엘(박서보 등) 본격적 추상회화 탐구 단체들이 생겨난다. 이에 모던아트협회, 창작미술협회에 참여하던 다수의 반추상 회화 작가들이 모여 1962년 신상회를 만들게 됐다(그 연장선에서 1967년 《구상전》이 창립된다).
이들 반추상 작가들은 이후 어떻게 정의 되었나. 2000년 국립현대미술관의 전시 《한국현대미술의 시원》에서는 “서정적 양식주의 계열”(창작미협 작가들)로, 서성록은 사실주의 양식의 구상회화와 차별되는 “목가적 사실화”로(류경채, 박창돈, 박항섭, 손동진, 이대원, 이봉상, 최영림, 홍종명, 황유엽), 2007년 서울시립미술관 전시 《추상미술, 그 경계에서의 유희》에서는 “원시적 그리움의 서정적 추상”으로 정의했다. 여기에서는 김환기, 장욱진 등과 후배 세대 작가들을 향토성 서정성으로 연결했다.
1960년대 신상회, 창작미술협회
한국의 앵포르멜로 불리던 뜨거운 추상회화의 전성기,
반추상 양식을 활용한 나름의 독자적 추상 세계를 꾸준히 추구해 나갔던 화가들
반추상 양식을 활용한 나름의 독자적 추상 세계를 꾸준히 추구해 나갔던 화가들
문학진 〈자전거에 부딪힌 운전수〉 1958, 캔버스에 유채, 162x112cm
《제2회 신상전》 브로슈어, 1963
1963년 상파울루 비엔날레와 파리 비엔날레에 참가할 한국 대표로 추상화가들만 선정되자, 소외된 108인의 작가들이 반추상연대를 결성하고 편파적 구성에 반발하는 연판장 사건이 터지기도 한다. 목우회 중심의 반(反)추상연대가 결성될 당시(1963) 반(半)추상 회화는 존재감이 있었다. 하지만 평론가들은 추상과 사실주의 아카데미즘의 대결 문제에만 몰두했고 반추상에 대한 담론은 부족했다. 애매한 스탠스를 취하다 추상화될 것이라는 예측(실제로도)이 많았고, 이들은 과도기적인 것으로 간주됐다. 구상 옹호 자체가 보기 드물었던 때 였다. 오히려 구상 양식에 대해 열정적으로 탐구한 것은 당대 추상 계열 화단의 인물들.(ex 박서보)이었는데, 그것은 새로운 프레임으로 추상 이후를 노리는 사실주의 양식의 기성 회화를 공격하기 위해서였다.
연구자는 당시의 구상 대 추상 논의에서 상정됐던 ‘구상’은 국전의 아카데미즘 미술로서의 사실주의 구상 양식이 아니라 그 이전부터 존재해 온 반(半)추상 양식에 가깝다고 주장한다. ‘구상’의 개념, 양식 규정에 치열한 경합이 있었고, 그 과정에서 반추상회화가 당대의 구상회화로 정체가 탈바꿈되는 기회를 얻었다는 것이다. 반추상의 구상이 앵포르멜 추상 쪽과 연대해 국전의 사실주의에 대응하는 시도가 있기도 했다.(1963)
이런 논의들이 오래가지는 못했는데, 앵포르멜 추상 계열 작가들은 1967년 일제히 기하학적 추상 양식으로 변모했고(유영국) 팝, 키네틱, 옵 등 다양한 미술경향들이 유입되면서 1960년대 후반에는 실험적 미술 양식에 경도되는 화가들이 많았다.
반면 반추상 화가들은 끝까지 밀고 나가는 길을 선택했다. 1967년의 ‘구상전(具象展)’이 중요한데, “추상대 사실이라는 이분법적 논리를 극복하고 현대적 구상미술을 지향”하기 위해 전시명을 그대로 단체명으로 해 그룹을 만들었다(김흥수, 권옥연, 최영림, 류경채, 이봉상, 박고석, 홍종명, 박영선, 정규 등) 취지는 추상회화가 이제 아카데미즘 미술이 되어가는 현실에서 현대적 구상회화를 통해 화면 내에서 사물과 자연, 인간상의 지위를 다시 회복시키겠다는 것(이봉상)이었다.
이봉상 〈아침〉 1964, 캔버스에 유채, 45.5x37.9cm
최영림 〈경사(慶事)〉 1975, 캔버스에 유채, 75x170cm
구상전도 비판을 받았는데 아카데미즘과 전위의 중간, 애매함, 서양의 표현주의, 환상주의, 상징주의를 재생한 것 등등이다. 그들은 구상회화가 무엇인가에 대해 숙고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다.
구상전에 대한 당시의 반응은 대체로 긍정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구상전 작가들이 지닌, 문학적이자 설화적인 발상을 기본으로 한국 특유의 자연적 요소를 농후하게 깔아가는 체질은 곧 구상전이 지향하고자 하는 이념”(오광수)
“구상(이라는 말)은 비구상(의 작품들이 생겨나자) 상대적인 개념으로서 형성된 것이다” “새로운 구상은 추상 개념에 상대적일 뿐만 아니라 전통적 사실주의에 대해서도 반(反)개념적이다” (이일)
구상전 작가들은 당대의 특수한 조건 아래 새로운 구상 양식을 구현해 낸 존재로 인정받았다. 구상전의 반추상 회화들은 대체로 향토적 제목과 소재를 주로 사용하고, 서정적 분위기의 화면을 보였다. 그 결과 산업화 도시화의 1970년대 시점에서 향수를 충족시켜 미술시장에서도 큰 호응을 얻는다.
홍종명 〈군조도(群鳥圖)〉 1975, 캔버스에 유채, 35x45cm
박성환 〈고대(古代)〉 1974, 캔버스에 유채, 56x38cm
홍종명, 박성환. 최영림 등의 화가는 대상을 토속적 색감을 동원해 환상적으로 재현해 이전 시기의 향토색과 차별화된 화면을 보여줬다. 구상전 소속 작가들 대부분 실향민인 것도 연관이 있을 것이다. 이들이 추상 양식 도래 이후 생긴 ‘현대적’ 구상인 동시에 ‘한국적’ 구상임을 표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구상회화 개념을 한국 미술계 고유 조건에서 특수하게 구현했다고도 볼 수 있다.
서구에서 일어났던 치열한 구상과 추상 논쟁이 제대로 체화되지 못한, 리얼리즘도 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구상’ ‘형상’ 용어들이 한국에서 사용되면서 의미가 모호해졌다는 주장도 일리가 있어 보인다. 추상의 반대 개념으로 등장한 구상이라는 용어가 모호해지자 개선하려는 의도로 ‘형상’을 사용하기도 했다.(동아미술제 등)
방향성이 중요하다. 이들 반추상은 추상화에서 시작해 현대적 구상으로 나아간 것이다. 이는 전후 한국 회화의 역사적 전개 과정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단서가 된다. 다시 말하면 추상이 한국에서 한국적으로 정착되는 과정의 특수한 면을 설명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오랜 시간동안 향토성 서정성을 잃지 않고 당대적으로 변용하는 데 충실했던 존재들. 이들 반추상 회화에서 한국 회화의 양식적 다양성과 역사의 다면성을 발견할 수 있다.
방향성이 중요하다. 이들 반추상은 추상화에서 시작해 현대적 구상으로 나아간 것이다. 이는 전후 한국 회화의 역사적 전개 과정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단서가 된다. 다시 말하면 추상이 한국에서 한국적으로 정착되는 과정의 특수한 면을 설명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오랜 시간동안 향토성 서정성을 잃지 않고 당대적으로 변용하는 데 충실했던 존재들. 이들 반추상 회화에서 한국 회화의 양식적 다양성과 역사의 다면성을 발견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