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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색 안료와 기법이 현대 한국 채색화에 미친 영향

허나영, 「안료의 사용에 따른 현대채색화의 표현 연구」, 『한국근현대미술사학』 48집, 2024.12.,pp.65-99.

전통 회화 중 수묵에 비해 그다지 깊게 연구되지 못한 채색화 분야에서, 안료의 사용법과 표현 기법을 중심으로 살펴보면서 전통 및 근현대 채색화에서 어떤 방식으로 계승 및 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지를 소개한 논문이다. 과거와 현재의 채색 화가들은 어떤 안료를 가지고 어떤 방식으로 그림을 그렸을까. 어쩔 수 없이 단절된 부분, 그리고 안료 제작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달라진 상황, 천연 안료와 인공 안료의 차이와 그것 때문에 달라진 방식은 그림을 어떻게 변화시켰을까에 대한 궁금증을 다소 풀어주고자 했다. 

글에서는 먼저 기본적인 용어와 지식을 정리하고, 전통 채색화의 재료에 관한 연구 성과를 정리한다. 
채색화의 기본 3요소인 바탕재, 안료, 전색제(展色劑, 결합하는 역할) 각각의 종류와 역할을 설명한다. 예를 들어 아교 같은 전색제의 경우 색이 바탕재를 타고 올라가다가 너무 번지지 않게 적절하게 멈춰서 잘 붙어있어야 하고, 표면 보호 등의 부가적 기능도 필요하다. 자연이나 인공에서 생겨나는 색을 내는 재료들은 입자의 크기나 성질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이에 따른 사용 방법이 요구된다. 

석채, 토채, 식물성 안료, 호분 등 천연 안료의 종류, 그리고 19세기말 일본에서 개발되기 시작한 합성 안료의 차이에 대해서도 설명하고 있다. 대략 천연 석채는 150㎛, 신석채는 100㎛, 분채와 토채는 30㎛ 이하이고, 서양에서 만들어진 울트라마린블루나 코발트블루 같은 드라이 피그먼트도 아교에 섞어 쓸 수 있는데 이들의 입자 크기는 1㎛ 정도로 매우 작다. 소립자 안료의 경우는 물감을 섞어서 쓰는 혼색 기법으로 색을 만들어 쓰지만 칠하고 나서 마른 후 다른 색을 칠하는 중색 기법은 어렵다. 중색 기법은 상대적으로 채도가 높다. 천연 석채를 수십번 중색으로 써도 색이 합쳐지면서도 탁해지지 않지만 합성안료를 쓸 때 아래면을 가리거나 탁해진다. 

소립자의 안료를 화선지처럼 구멍이 비교적 큰 종이에 사용하면, 안료의 입자가 종이 틈으로 들어가면서 먹처럼 담채의 효과를 낸다. 대신 화선지는 조직이 질기지 못해서 입자가 큰 안료를 얹으면 종이가 힘을 받지 못한다. 반면 닥나무로 만든 한지의 경우 그 기공이 선지보다 작고 질기기 때문에, 그 위에 입자가 큰 안료를 선지보다 여러 겹 올릴 수 있다. 중색기법으로 안료를 쌓으면 그 구조가 탄탄해지는 동시에, 다양한 색의 효과를 만들어내는 진채(眞彩)가 가능해진다.

20세기 초반 일본화의 역할로 전통 채색화의 영역이 줄어들고 명맥이 약해졌고, 당시의 채색화가들은 일본과 다른 우리의 채색전통을 찾아야 함과 동시에 현대미술로서 채색화의 현대화도 이루는 이중의 노력을 해야 했다. 

김은호는 일본의 스승에게서 배우면서 바탕에 호분을 두껍게 바른 후 그 위에 색을 얹었다. 호분이 두터운 만큼 색이 탁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김은호나 공필채색화를 그렸던 정찬영 등은 일본화나 서양화의 유입 속에서 그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새로운 방식으로 보다 간편하고 다양해진 일본과 중국의 종이, 그리고 일본에서 새롭게 개발한 분채와 신석채와 같은 안료가 수입이 되면서 이전에 쓰던 재료만을 사용할 수는 없었던 것이 당연하다. 
당시 사용되기 시작한 분채는 일본에서 19세기 말에 서양화에 대적할 일본화를 제작하고자 개발된 현대안료로, 새로 개발된 신암채가 천연 석채보다 더 강한 발색을 내 이를 보완하기 위하여 분채가 다양한 색채로 만들어졌다. 
이후 박래현, 천경자, 장우성 등이 전통성과 현대성을 찾으려는 노력을 했으나 너무나 강렬했던 ‘일본화’에 대한 비판으로 ‘채색이 있는 그림’들을 일본화로 여겨 전통 채색화에 대한 고찰 없이 채색이 금기처럼 되어 버린다. 

신문인화를 제시한 김용준, 김용준과 장우성을 배우고 윤곽의 먹과 함께 정갈하고 서정적인 색채를 사용한 박노수 등은 일정한 면에 색을 채우고 사실적인 묘사를 하는 일본화와 차별화되고자 했고 적은 양의 안료를 아교수에 개어서 맑게 칠한 담채는 현대한국화의 특징 중 하나로 자리잡기도 했다. 


박노수 <수변> 1992, 화선지에 수묵담채, 95×180cm, 개인


담채와 대비되는, 중색기법을 기반으로 한 진채를 쓴 작가로 천경자, 박생광이 있다. 천경자의 회화는 ‘유화’ 혹은 ‘파스텔화’와 같은 ‘서양화’로 오인받기도 했는데, 그가 사용한 분채는 질감 표현도 되고 중색이 가능하며 유화보다 입자가 커서 밑의 색과 미묘하게 섞인다. 박생광은 먹의 윤곽선 대신 굵은 주색의 선을 윤곽으로 삼고 그 안에 강렬한 색면을 칠했다. 붉은 색에 사용되는 주사, 석간주, 산호분, 홍화, 천초, 연지 중 경면주사를 많이 사용했다. 박생광의 작품 중 균열과 박리가 생긴 것들이 많은데 그가 중국의 당채, 일본의 석채, 단청작업에 쓰이는 합성안료 등을 함께 사용하는 등의 다양한 시도 때문이다. 


박생광 <무당 6> 1984, 종이에 채색, 90×138cm, 개인


천경자의 제자 이숙자의 경우 암채(巖彩)를 주된 재료로 사용하며, 중색기법으로 색을 쌓아올린다. 암채는 그 입자의 크기가 다양하므로, 소립자에서 대립자의 순으로 크기 순서대로 쌓아 올리면 자연스럽게 화면에 공간감이 드러나게 된다. 암채의 입자가 크고 무겁기 때문에 이숙자는 일반아교보다 접착력이 강력한 아교에 온도를 조정하여 점도를 높여 사용한다.



이숙자, <청보리-초록빛 안개>, 2012(2022년 개작), 순지 5배접, 암채, 1621×130.3cm


이밖에 안료를 깊이 연구하고 새롭게 사용한 이후의 사례들로 송수련, 정종미, 성민우 등의 회화에서 안료가 어떻게 구체적으로 사용되었는지도 살핀다. 또, 아교에 섞은 안료가 물에 섞이므로 아크릴물감이나 수채, 과슈 물감을 함께 사용하는 경우도 있으며, 아교의 점착성을 활용해 광목, 모시, 캔버스, 나무판 등에 채색화를 그리는 시도도 있었다. 즉, 다양한 종류의 재료와 그에 따른 기법으로 제작하려는 시도들이 계속되었고, 폭넓고 깊이 탐구하면서 표현이 가능한 범위도 커지므로 이 재료 연구와 활용 노력이 지속될 필요가 있다는 어쩌면 당연한 결론이 도출된다. 


성민우 <풀의 초상> 2023, 비단에 수묵과 금분, 금박, 162.2×130.3cm, 개인


문화의 교류가 일어날 때, 새로이 유입된 재료나 기법이 여러 가지 장점-참신함, 편리함-으로 기존의 것을 압도할 때, 기존의 것이 고사되지 않도록 하고 더 발전시키는 방법에 몰두하는 일은 중요하다. 새로운 것을 배척하는 것과는 다른 일이다. 
업데이트 2025.02.26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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