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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화승, 의겸의 유파 형성과정과 특징

김다영, 「18세기 의겸파의 형성 과정 및 영향 관계」, 『미술사학』 vol.49, 2025, pp.7-40.

조선 후기에는 어떤 주문자가 발원한 것인지와 관계 없이 승려가 불화를 전담했다. 전란 이후 불화를 봉안해야 할 곳들이 많아지고 화승의 위상과 역할이 커졌다. 또 조선 후기의 불화들을 보면 발원자의 명단과 함께 빼곡하게 참여한 화승들의 명단이 들어 있고, 제작의 배경에 대한 기록이 꼼꼼해서 동시대의 다른 서화에 비해 미술사적 연구에 있어 기초자료가 든든하다고 할 수 있다. 현재 불교중앙박물관에서 개인전(?)이 열리고 있기도 한 의겸(義謙)이라는 인물은 가장 널리 알려진 조선 후기 화승 중 한 사람으로, 이 논문은 조선 후기 불화 제작의 특수한 성격 중 일면으로 18세기에 활동한 수화승 의겸을 중심으로 한 의겸파에 주목한 것이다. 

의겸은 1713년부터 1757년까지 40여 년 간 호남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다양한 작품을 남겼다. 남긴 작품의 화기를 바탕으로 그와 함께 작업했던 화승들의 이름을 분석해, 언제 수화승으로 자리매김하고 의겸파가 구성되는지, 또 제자들이 화파를 만들어 독립하게 되는 시기와 양상 등을 살피고, 의겸과 제자들의 불화 도상을 비교해 그 영향 관계를 짐작해 보고 있다. 작품으로는 초본이 현전하는 부안 개암사 〈영산회괘불도〉와 의겸파의 영산회괘불도 등이 주로 다뤄진다. 


복구의 시기 17세기를 지나 18세기 그들이 맡은 불사는 대개 전각 내, 본존상 뒤쪽의 후불도를 제작하는 것이었다. 공간과 본존에 맞는 주제와 도상을 선정하고 잘 어울리도록 후불도의 구도를 설정하는 것, 초본을 그리고 채색 계획을 세우는 것, 화승들에게 역할을 분담해 주고 질을 담보하는 것, 다른 승려들이나 발원자들과의 의사소통 등 불사를 안정적으로 진행하기 위한 모든 과정이 우두머리 화승, 수화승의 능력에 달려 있었을 것이다. 

의겸이 참여한 것으로 기록된 불화제작 목록, 즉 1713년에 제작한 장흥 보림사 <후불도>를 시작으로 1757 구례 화엄사 <삼신불회도> 이후까지 의겸과 이름을 함께한 화승들을 살펴보면 총 80여 명이 되는데 일부를 제외하고는 반복적으로 의겸과 함께 작업을 했음을 볼 수 있다. 1722년 청곡사 <영산회괘불도>를 조성할 무렵 의겸을 중심으로 몇몇 화승이 뭉쳐져 다니면서 불사를 진행한 상황을 파악할 수 있다(의겸도 그 이전에는 보조 화승으로 활동했었다). 청곡사 <영산회괘불도>에 참여한 이들이 1730년대까지 계속 의겸과 함께 불화를 조성하며, 저자는 1730년대까지를 의겸파 1기라고 구분했다. 1기의 대표작은 1724년부터 1725년까지 진행한 순천 송광사의 6건 25폭의 대규모 불사이다. 

고성 운흥사, 공주 갑사 불사가 진행되는 1730년에 화승 구성에 변화가 생긴다. 그간 의겸을 따랐던 채인, 긍척, 왈민 등이 수화승이 되거나 해서 떠나고, 색민, 정인, 회밀 등이 참여해 세대 교체가 이뤄졌다. 1740년대에 한번 더 멤버가 교체되며 이들이 1757년 마지막 불사까지 함께 한다. 

이 연구에서 해결되어야 할 중심 가설은 아마도 “유파에 따라 불화 양식에 차이점이 있다”가 될 것이다. 기대한 바와는 다르게 의겸파들은 같은 주제라도 도상 구성 배치가 차이가 있고 특정한 양식의 흐름을 보기 어렵다. 송광사 <영산회상도>(1725) 해인사 <영산회상도>(1729)가 그 예. 그런데 부안 개암사의 <영산회괘불도>의 칠존(석가모니불, 다보불, 아미타불, 문수보살, 보현보살, 관음보살, 대세지보살) 구성은 의겸파 영산회괘불도에서 비교적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구성이라 할 수 있다. 


의겸 등, 부안 개암사 <영산회괘불도> 조선 1749년, 마본채색, 1,209×870cm, 부안 개암사



작가미상, 부안 개암사 <영산회괘불도 초본>, 조선 1749년, 지본묵서, 1,214×845.2cm, 부안 개암사


비전공자의 입장에서는 주요 작품에서 의겸과 의겸파의 특징적인 면을 알아보기 어렵다. 문양에서 나타나는 특징이나 석가모니불의 얼굴 비교표 등이 조금은 도움이 된다. 


수화승으로 성장한 대표적 의겸파 화승으로는 채인(彩仁), 긍척(亘陟), 색민(色敏)을 꼽는다. 이들은 의겸으로부터 배운 뒤 수화승으로서 불화를 조성했는데, 필치, 문양, 도상 구성 등에서 의겸의 영향을 받아 다양한 양상으로 계승했다. 그러나 스승을 뛰어넘지는 못한 듯하다. 의겸은 『오종범음집』, 『천지명양수륙재의범음산보집』 같은 자료를 바탕으로 도상을 나름대로 구성했지만, 후대 의겸파 화승들은 의겸이 만들어낸 도상을 변용하거나 간략화했다. 


채인 등, 곡성 도림사 <아미타불회도>, 조선 1730년, 마본채색, 287×284cm, 곡성 도림사



의겸이 수화사로 참여한 남원 실상사 <지장시왕도>(1726)와 채인 등의 <지장보살도>(1730년대), 동국대학교박물관


화승들은 스스로를 창작자로 인식했을까. 불교 도량을 만들어내는 수많은 비구 중 하나로 생각했을까. 그들의 생각이 궁금하다. 논문을 읽고 《호선 의겸》 전을 다시 보는 것도 좋겠다. 

업데이트 2025.05.14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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