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미나, ⌜조선 중기의 채색 고사인물도 연구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고사인물도》(덕수1890)를 중심으로⌟, 『강좌미술사』 Vol.no., 62, 한국불교미술사학회, 2024.06., pp.251~279.
필자미상, 《고사인물도》 화첩, 견본채색, 각20.6×21.5㎝, 국립중앙박물관(덕수1890)
예를 들어 1번은 <강상야박도>로, 달이 뜬 밤에 강에 띄운 배 위에서 물을 내려다보다 잠든 듯한 인물이 있는데, 그의 배는 근경의 나무의 의해 가려졌고 강렬한 부벽준을 이용한 절벽이 그 위로 높이 솟았다. 돌아서 흐르는 강 위로 배가 떠 있고 멀리 성벽과 관문이 높게 보인다.
1번. 강상야박도
심사정 <강상야박도> 국립중앙박물관
왕희지 관아도, 도연명을 주제로 하는 동리채국도, 이백의 「망여산폭포」를 주제로 한 <관폭도>, 왕유의 「종남별업」을 주제로 한 <좌간운기도> 등이 있고 <마상행도(馬上行圖)>는 『당시화보』의 「마상작(馬上作)」과 비슷한 도상이며, 그밖에 <기려도>, <고사독서도> 등이 있다.
한 화가의 솜씨라고밖에 볼 수 없는 스타일, 일괄 제작되었으리라 여겨지게 만드는 같은 규격이다. 전체적으로 청·녹색을 주조로 한 산수 배경과 청·홍·백을 배합하여 그려낸 인물이 어우러진 채색화라는 점이 특징인데, 양식적으로는 여러 가지가 섞여 있다.
남송 및 절파의 회화 혹은 이를 수용한 조선 중기의 회화 양식 (ex. 6번, 17번, 7번)
17세기에 조선에 전래된 명말청초의 화보를 수용한 양식 (ex. 4번, 12번, 8번)
그리고 이들 전체를 아우르는 청록산수화 스타일이 겹쳐진다.
전체적으로 채색을 입힌 고사인물도 화첩이니 1720년대에 만들어진 《만고기관첩》과 《예원합진첩》과 비교될 수 있는데(이들은 잘 알려져 있듯 청록산수 배경의 채색화로 구성되어 있다.), 그 두 화첩에 비해 중기 양식이 강하게 남아 있다. 학자들은 이 《고사인물도》화첩이 몇 십년 더 앞선 제작사례라고 여기며, 단언은 어렵지만 왕실 주문일 가능성이 클 것이다.
연구자는 이 서화첩의 장황 형식이나 회화 양식을 명나라 중기 화가 구영(1494-1552)의 《제왕도통만년도(畵帝王道統萬年圖)》와 직접 비교하기도 했다.
구영, <신농씨>, 《帝王道統萬年圖》, 견본채색, 32.5×32.5㎝, 臺北故宮博物院
《고사인물도》 화첩이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17세기말~18세기 초는 숙종 재위기로 숙종은 전란 이후 피폐했던 도화서의 여건과 화원의 열악한 처우를 개선시키고 회화를 권장하는데 힘썼던 왕이다. 금을 비롯 비싼 안료를 풍부하게 쓴 채색, 27점이나 되는 화폭에 절파 화풍의 소환, 시의를 살린 다채로운 산수인물도를 우수한 필력을 갖춘 화가의 솜씨로 보아 왕실에서, 그것도 특별히 의지를 가진 제작이었을 것이다.
17세기 중반 명말청초에는 수석, 장서, 골동 등에 대한 감상과 소유의 욕구가 강한 시대였고, 그 시대는 흔히 ‘원화(院畵)'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위작이 공공연히 돌아다녔다. 그런 유형의 고화첩이 조선에도 전래되었고, 이 화첩 또한 적어도 일부에서 명말청초의 고화첩 그림을 참고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
다소 거친 논리의 전개이지만, 여기서 대개의 한국미술사 논문에서는 보기 힘든 서술이 따라온다. 각 폭을 중국의 유명 고화, 화보집의 그림 등을 일대일 대응시킨 것이다.
<관폭도>(6번)와 비교한《송원명적(宋元名蹟)》 화첩의 <마원관폭도>
<고사독서도>(7번)과 비교한《진도회질(珍圖薈帙)》 화첩의 <원인 송하관천도(元人松下觀泉圖)>
<망산도>(17번)과 비교한 <왕진붕대폭관서도>
<어부도>(12번)과 비교한 《송인집회(宋人集繪)》 화첩 중의 <계방한화도(溪旁閒話圖)>
고화를 전수조사한 것은 아니더라도 아마도 가장 유사하다고 판단되는 것을 고른 듯한데, 인정되는 것과 의아한 것이 모두 있다. 연구자 또한 똑같이 모사했다고 여겨지는 작품은 없다고 결론지었다. 조금 더 섬세한 분석이 가능할까, 궁금해지는 지점이다.
명말청초에 성행했던 송원 명가의 고화첩(위작 or not)이 17세기말~18세기 초에 조선에도 들어왔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니 그리 새로울 것은 없으나 구체적인 수용 양상에 대해서는 연구의 여지가 있다. 저자는 이 화첩이 중국의 고화첩을 염두에 두고 제작된 것이라 할 수 있으나 고화(古畵)에 대한 조선인의 해석이 담긴 작품집이라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고 결론맺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