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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묵의 나라 조선? 17세기 채색 고사인물도 화첩이 말해주는 것

유미나, ⌜조선 중기의 채색 고사인물도 연구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고사인물도》(덕수1890)를 중심으로⌟, 『강좌미술사』 Vol.no., 62, 한국불교미술사학회, 2024.06., pp.251~279.

“우리나라의 그림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은 채색하는 방법을 깨우치지 못하고 있다. 예컨대 김명국의 신일한 솜씨라던가 허주 이징의 정공한 솜씨, 윤두서의 교묘한 솜씨라도 오히려 설채법을 알지 못하여 도리어 중국의 평범한 화공과 같지 못하다.” - 남태응(1687-1740)

조선 중기에서 후기로 넘어가던 시절, 채색 그림은 어떤 위상이었고 이후는 어떤 변화를 겪었을까. 그 당시 유행하던 그림,  추구미는 무엇이었을까.
연구자는17세기말쯤에 제작된 한 고사인물도 화첩 안에 들어 있는 수십 점의 그림들이, 형태는 중기의 절파 고사인물도 형식을 따랐으되 채색화로 제작된 것에 주목해 그 화첩 안에 포함된 그림들을 들여다보았다.

생생하게 색이 살아 있고 잘 정돈된 그림들이 담긴 이 화첩은 1909년 일본인 스즈키 게지로(鈴木銈次郞)가 덕수궁 때의 박물관에 판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필자미상, 《고사인물도》 화첩, 견본채색, 각20.6×21.5㎝, 국립중앙박물관(덕수1890)



이 그림들은『조선고적도보』(1934년 간)에 작품 일부가 수록되어 있으니 공개가 되지 않은 건 아닌데 그간 크게 주목받지 못하다가 최근 그중 일부 그림(사녀도)에 대한 연구가 발표되기도 했다.  이 논문에서는 그중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산수인물도를 대상으로 놓고, 주제, 화풍을 살펴보아서 그 회화사적 의의를 짚고자 했다.

이들은 산수 경관을 배경으로 은일자의 다양한 모습을 담았는데, 산과 언덕에 석청·석록의 채색을 가했다. 제목과 관지가 없어서 연구자가 내용을 바탕으로 그림제목을 달았다.

예를 들어 1번은 <강상야박도>로, 달이 뜬 밤에 강에 띄운 배 위에서 물을 내려다보다 잠든 듯한 인물이 있는데, 그의 배는 근경의 나무의 의해 가려졌고 강렬한 부벽준을 이용한 절벽이 그 위로 높이 솟았다. 돌아서 흐르는 강 위로 배가 떠 있고 멀리 성벽과 관문이 높게 보인다. 


1번. 강상야박도


당나라 시인 두보(杜甫, 720~770)의 오언시,「봄밤에 내린 기쁜 비[春夜喜雨]」 중의 ‘들녘 길은 온통 구름이라 어두운데, 강에 뜬 배 등불 밝구나[野徑雲俱黑 江船火燭明]’를 화제로 삼은 것이다. 조선후기 심사정이 그린 전혀 다른 <강상야박도>가 잘 알려져 있는데, 이 그림은 이에 선행했던 절파화풍의 강상야박도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부벽준의 주산과 원산, 근경의 언덕, 그리고 수면에 담록의 선염이 연하게 가해졌으며, 건물과 배, 인물, 단풍이 든 나뭇잎, 그리고 달무리와 원경의 실루엣 처리된 원산 등에 청·홍·백 등의 채색이 사용되었다.


심사정 <강상야박도> 국립중앙박물관


왕희지 관아도, 도연명을 주제로 하는 동리채국도, 이백의 「망여산폭포」를 주제로 한 <관폭도>, 왕유의 「종남별업」을 주제로 한 <좌간운기도> 등이 있고 <마상행도(馬上行圖)>는 『당시화보』의 「마상작(馬上作)」과 비슷한 도상이며, 그밖에 <기려도>, <고사독서도> 등이 있다. 


한 화가의 솜씨라고밖에 볼 수 없는 스타일, 일괄 제작되었으리라 여겨지게 만드는 같은 규격이다. 전체적으로 청·녹색을 주조로 한 산수 배경과 청·홍·백을 배합하여 그려낸 인물이 어우러진 채색화라는 점이 특징인데, 양식적으로는 여러 가지가 섞여 있다. 


남송 및 절파의 회화 혹은 이를 수용한 조선 중기의 회화 양식  (ex. 6번, 17번, 7번)

17세기에 조선에 전래된 명말청초의 화보를 수용한 양식 (ex. 4번, 12번, 8번)

그리고 이들 전체를 아우르는 청록산수화 스타일이 겹쳐진다. 

전체적으로 채색을 입힌 고사인물도 화첩이니 1720년대에 만들어진 《만고기관첩》과 《예원합진첩》과 비교될 수 있는데(이들은 잘 알려져 있듯 청록산수 배경의 채색화로 구성되어 있다.), 그 두 화첩에 비해 중기 양식이 강하게 남아 있다. 학자들은 이 《고사인물도》화첩이 몇 십년 더 앞선 제작사례라고 여기며, 단언은 어렵지만 왕실 주문일 가능성이 클 것이다. 


연구자는 이 서화첩의 장황 형식이나 회화 양식을 명나라 중기 화가 구영(1494-1552)의 《제왕도통만년도(畵帝王道統萬年圖)》와 직접 비교하기도 했다. 


구영, <신농씨>, 《帝王道統萬年圖》, 견본채색, 32.5×32.5㎝, 臺北故宮博物院


《고사인물도》 화첩이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17세기말~18세기 초는 숙종 재위기로 숙종은 전란 이후 피폐했던 도화서의 여건과 화원의 열악한 처우를 개선시키고 회화를 권장하는데 힘썼던 왕이다. 금을 비롯 비싼 안료를 풍부하게 쓴 채색, 27점이나 되는 화폭에 절파 화풍의 소환, 시의를 살린 다채로운 산수인물도를 우수한 필력을 갖춘 화가의 솜씨로 보아 왕실에서, 그것도 특별히 의지를 가진 제작이었을 것이다. 


17세기 중반 명말청초에는 수석, 장서, 골동 등에 대한 감상과 소유의 욕구가 강한 시대였고, 그 시대는 흔히 ‘원화(院畵)'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위작이 공공연히 돌아다녔다. 그런 유형의 고화첩이 조선에도 전래되었고, 이 화첩 또한 적어도 일부에서 명말청초의 고화첩 그림을 참고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 
 

다소 거친 논리의 전개이지만, 여기서 대개의 한국미술사 논문에서는 보기 힘든 서술이 따라온다. 각 폭을 중국의 유명 고화, 화보집의 그림 등을 일대일 대응시킨 것이다. 





<관폭도>(6번)와 비교한《송원명적(宋元名蹟)》 화첩의 <마원관폭도>


<고사독서도>(7번)과 비교한《진도회질(珍圖薈帙)》 화첩의 <원인 송하관천도(元人松下觀泉圖)>


<망산도>(17번)과 비교한  <왕진붕대폭관서도>


 <어부도>(12번)과 비교한 《송인집회(宋人集繪)》 화첩 중의 <계방한화도(溪旁閒話圖)>


고화를 전수조사한 것은 아니더라도 아마도 가장 유사하다고 판단되는 것을 고른 듯한데, 인정되는 것과 의아한 것이 모두 있다. 연구자 또한 똑같이 모사했다고 여겨지는 작품은 없다고 결론지었다. 조금 더 섬세한 분석이 가능할까, 궁금해지는 지점이다.

명말청초에 성행했던 송원 명가의 고화첩(위작 or not)이 17세기말~18세기 초에 조선에도 들어왔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니 그리 새로울 것은 없으나 구체적인 수용 양상에 대해서는 연구의 여지가 있다. 저자는 이 화첩이 중국의 고화첩을 염두에 두고 제작된 것이라 할 수 있으나 고화(古畵)에 대한 조선인의 해석이 담긴 작품집이라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고 결론맺고 있다. 



업데이트 2025.08.12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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