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예진, 「20세기 초 일본 ‘살롱문화’의 한국 유입과 화조·화훼화의 변화 : 안중식·김응원·오세창의 방일과 새로운 창작 관습의 수용」, 『미술사연구』 Vol.49, 2025, pp.91-120.
19세기 말 20세기 초, 안중식, 김응원, 오세창 등 한국 서화계 인사들은 다른 많은 이들처럼 일본을 드나들었다. 이 세 사람이 일본에서 성행한 ‘살롱문화’를 접하게 되면서 한국에 새로운 회화 스타일을 이입시켰다는 주장의 논문이다.
일본은 과거제도가 없었기에 문인들이 다양한 지식인의 형태로 존재했는데, 에도시대 중기에 이르면 중국 문인상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지식인층이 활발한 문예활동을 하게 된다. 유학자, 의사, 승려, 서화가들이 모이는 문인모임-살롱이 확산되고 출판 문화에 고급 취미 유행 등으로 이에 불을 지폈다. 아마추어 문인들로부터 게재료를 받고 작품을 소개하는 저널이 수익을 낼 정도였다.
일본 살롱의 목적은 다양해서 한시 짓기, 차, 난, 고서, 고화, 골동 등 다양한 목적으로 운영됐는데 그중 서화회의 경우 문인들이 자신의 작품이나 소장 서화를 가지고 와서 전시하거나 술을 마시며 즉흥적으로 시를 짓고 글씨를 쓰는 휘호회 형태가 18세기 말에 출현했다.
가와나베 교사이(河鍋暁斎) <서화회> 1876, 비단에 담채, 131.5×65.5cm, 일본 河鍋暁斎記念美術館
근대기 일본 살롱문화의 바탕에는 18세기부터 급속도로 유입된 중국 문화의 영향이 다분해서, 다회에 서화, 골동, 분재, 문방구 등이 진열되고 중국 음악이 공연되기도 했다.
갑신정변 전후 일본 망명 생활을 한 한국인 정치가들은 유교 지식, 시서화 소양, 중국문화에 대한 폭넓은 이해 등이 있었으니 일본 서화회, 센차카이 같은 사교의 장에서 쉽게 일본의 지식인들과 어울릴 수 있었다.
안중식, 김응원, 오세창이 일본에 가서 활동한 내용들이 이 논문의 논거로 기능하는데, 이는 일본 외무성이 당시 요시찰 대상인 한인의 활동을 꼼꼼히 기록해 남겨두었기 덕분이다. 10개월 정도 교토, 기후, 아이치현 등을 방문했던 안중식, 12년 넘게 일본에 체류했던 김응원, 도합 5년 정도 일본에 있었던 오세창은 각각 일본인들과 다양한 방법으로 교유한 기록이 있다.
이들이 돌아 온 이후 한국의 화단에 일어난 변화는 어떤 것이기에 일본 살롱 문화의 유입이 일어났다고 보는 것일까. 몇 가지 예를 들었다.
장승업처럼 호방한 필법의 화조화를 그리던 안중식의 화풍이 1900년 1년간 일본에 다녀온 후로는 단정하고 온화하게 변했다. 주로 화조화에서 나타나는 변화. 연구자는 특히 두 사람의 회화를 주목해서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 1894년 타계했지만 ‘메이지 오쿄’로 불릴 정도로 명성이 높았던 모리 간사이
- 당시 노대가로 교토화단에서 명성을 떨치고 있던 이마오 케이넨
(좌) 모리 간사이(森寛斎), <고백후록지도(古柏猴鹿之図)>, 1880, 비단에 채색, 232.4×143.2cm, 일본 三の丸尚蔵館
(우) 이마오 케이넨(今尾景年), <월하부용원앙도(月下芙蓉鴛鴦図)>, 1897, 비단에 채색, 128.6×56.2cm, 일본 京都国立近代美術館
이들의 화조화는 주제가 되는 화조는 정교하게 묘사하는 반면 배경은 농담의 변화가 있는 붓질로 문아한 정취를 풍기는 특징을 보인다. 안중식 또한 사실성은 강화하면서도 담채를 위주로 필의를 살린 문아한 분위기의 화풍으로 변화한다는 것이다.
안중식 화조도 변화. 1894년, 1898이전, 1901년
안중식의 화조화가 중국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냐, 일본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냐는 문제는 아니다. 굳이 이야기하면 중국의 문인문화와 회화에 대한 한국과 일본 서화가들의 (동경에 가까운) 공감대가 있었고, 이것이 서화회나 휘호회를 통해 폭넓게 확산되었고, 일본의 제도와 문화가 한국에 유입되는 과정에서 한국 회화에 점진적인 변화를 일으켰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두 번째로는 제재의 변화를 들었다.
“19세기 말 장승업이 유행시킨 기명절지도는 20세기 초 화단에서 사실적으로 묘사된 기명과 문방구에 사계절의 꽃과 화훼를 곁들인 공필채색화, 그리고 비교적 분방한 필치에 수묵과 담채를 위주로 하는 문인화 계열의 그림으로 양분되어 발전했다.”
안중식 <기명절지도 대련> 1914, 비단에 수묵채색, 각 211.4x46.2cm(족자) 국립중앙박물관 동원2538
이도영·김응원, <서창청공도(書窓淸供圖)>, 1910, 종이에 수묵담채, 97.0×44.4cm, 간송미술관
두 그림이 그 양쪽의 예가 될 텐데, <서창청공도>를 보면 기명절지도에서 즐겨 다뤄지던 길상적인 기물과 화훼 대신 사군자를 내세워 문기(文氣)를 강조하고, 분란과 매병을 넣어 제재 구성에 변화를 주었다. 그런데 이러한 예를 통해 “다양한 화훼 문화와 문인 취미를 유행시킨 일본 살롱문화에서 자극받아 이루어졌을 것이다”라고 단정짓기에는 조금 저어되는 면이 있다.
세 번째, 즉석 휘호회나 사군자 합작의 유행을 들었다. 1910년대의 기명절지는 각종 휘호회, 사적인 주연에서 즉석으로 제작되는 그림으로 즐겨 제작됐다. 특히 사군자가 자주 등장하는 것은 문인화의 필의가 강조되면서도 아마추어 서화가도 그리기 쉬운 화목임이 큰 요인이라고 짚었다.
김용준, 장지연은 기명절지도를 장승업이 창안한 분야로 주장했지만, 최근에는 중국 역대 박고도와 청공도, 청대 해상화파의 화훼도, 일본 메이지 시대 화훼도 등과의 연관성이 다양하게 논의되는 분위기이다. 1910년대 김응원과 이도영이 합작으로 제작한 기명절지도나 1920년대 이도영이 발전시킨 한국적이고 문아한 기명절지도들을 살펴보면, 1910년대 이후 한국에서 기명절지도가 갑자기 폭증하고 문인 취미가 강조된 데는 중국문화를 매개로 한 한일 서화가들의 교유, 혹은 일본 망명객을 통한 일본 살롱문화의 유입도 자극제가 된 것이라는 주장이다.
지금까지 선행연구에서는 일제강점기 유행한 서화회의 출현 배경을 조선 말기 여항 문인들의 시사 활동에서 찾았다. 그런데 이 논문은 단발성으로 열린 각종 서화회가 20세기 초 새롭게 유행한 문화행사의 성격이 강했다는 사실, 그리고 매개체가 된 것이 ‘새로운 형식의 시서화합작도와 사군자합작도’라는 사실에 주목하고 있다.
(좌) 다노무라 초코뉴(田能村直入) 외, <산시스이메이쇼 서화합작(山紫水明処書画会合作)>, 1878, 종이에 수묵, 136.3×66.2cm, 일본 成田山書道美術館
(우) 김응원·안중식·김윤식 등, <사군자 합작도>, 1919 이전, 종이에 수묵, 95.0×38.8cm, 호림박물관
20세기 초에 한국에는 왜 갑자기 기명절지 합작도와 사군자 합작도가 폭증했을까. 20세기 한·중·일 서화가들의 월경과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새롭게 공유된 서화 형식이라고 볼 수 있으며, 특히 1900년 전후 일본을 방문한 안중식, 김응원, 오세창이 미술가 단체를 주도한 영향력 있는 사람들이어서 빠르게 뿌리내릴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일본 살롱문화의 유입’의 결과라 단정짓기는 어려워도 당시의 분위기에 대해 이런 저런 영향관계를 따져 볼 수 있다는 것은 긍정적인 학계의 변화로 느껴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