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K는 올해 미술계 결산을 위해 기획자, 학자, 공무원, 작가, 비평가 등 미술 각 분야에서 종사하신 분들을 대상으로 간단한 설문을 드렸습니다. ※ 바쁘신 와중에 설문에 답해주신 30여 분 선생님들께 머리숙여 감사 인사 드립니다. 의견 내 주실 의향이 있으셨는데도 미처 연락 못드려 참여하지 못하신 선생님들께서도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관련된 일을 하고 있는 관계자의 입장에서든 한 사람의 애호가 관람객의 입장에서든 한 해동안 둘러본 전시들을 떠올리며 “좋았거나 의미 있었던” 전시를 몇 개만 꼽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순위의 높고 낮음도 크게 의미가 없을 수 있습니다. ‘기타’로 써 주실 수 있는 란은 만들었으나 제한된 선택지 때문에 규모가 크고 보도가 많았던 전시 위주가 되었던 부분은 참고하여 순위를 보시면 좋겠습니다.
응답자 분들은 선택의 이유에 “작가의 성취나 기획의 결이 느껴졌던 전시”, “참신성”, “미술 전시 영역의 확장”, “연구진들의 피와 땀이 느껴지는 전시”, “탄탄한 기획력”, “생각을 확장시켜준 전시”, “많은 관람객들의 호응을 얻은 전시” 등 다양한 선정 기준을 써 주셨습니다. 전시 기획에 있어서 기획 의도의 참신성, 영역의 확장, 질과 양에서 노력이 비춰지는 컨텐츠, 시의성과 대중성 같은 것들이 중요함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됩니다.
공동 10위
리움미술관 “아니카 이” 《또 다른 진화가 있다, 그러나 이에는》 2024.9.5-12.29
호암미술관 《니콜라스 파티 : DUST》 2024.8.31-2025.01.19
호림박물관 《향香, 푸른 연기靑煙 피어오르니》 2024.8.27.-12.21
서울간송미술관 《위창 오세창: 간송컬렉션의 감식과 근역화휘》 2024.10.16.-12.1
아모레퍼시픽미술관 “엘름그린 & 드라그셋” 《Spaces》 2024.9.3.-2025.2.23
리움미술관은 하반기 한국계 미국인 작가인 아니카 이의 개인전을 열었습니다. 신작 중심으로 과거 작품을 연결해 소개하는 것이었고, 기계, 균류, 해조류 같은 형상의 30여 점의 실험적인 작품이 전시장을 또다른세상으로 만들었습니다. 비슷한 시기 미술사에서 영감을 얻어 작품을 제작하는 독특한 화가 니콜라스 파티가 용인 호암미술관 첫 외국인 개인전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호암이 소장하고 있는 고미술과의 접목이 주목받았고, 지정학적 불리함에도 불구, 전반기 불교 전시 못지않은 관람객이 몰려드는 성공적인 결과를 낳았습니다. 흥미롭게도 공동 10위를 차지한 전시들이 국내 최고의 사립미술관들의 야심찬 기획전이라는 점인데, 10위에 오른 호림박물관과 서울 간송미술관에서 열렸던 고미술 전시 두 건은 알찬 구성에 비해 전시장은 비교적 한산했습니다. 신사동 호림에서는 국보 1건과 보물 11건을 비롯해 향과 관련된 그림, 전적, 도자와 금속 유물 등 다양한 장르의 소장품과 대여 유물 170여 점을 실제 향과 함께 전시해 도심에서 조용하게 생각하고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고, 성북동 보화각에서는 공민왕의 양 그림, 신윤복의 월야밀회 외에도 우리가 알고 있는 것 외에 또다른 근역화휘 책 전체의 면모를 공개하는 중요한 자리가 됐습니다.
“주제가 신선하고 열심히 만든 전시가 느껴짐”
9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MMCA 기증작품전: 1960-70년대 구상회화》 2024.5.21.-9.22
최근 5년간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된 작품 가운데 한국 화단의 형성과 성장에 자양분이 된 1960~1970년대 구상회화를 모아 소개했습니다. 이건희 컬렉션 104점도 포함되어 있었으니 2021년 이건희컬렉션 특별전의 예매대란을 생각하면 조용히 감상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어느샌가 한국을 대표하는 현대미술을 추상과 형이상학이 압도해서 최근에는 자주 볼 수 없게 된, 과거에 인기 있었던, 다양한 표현적 구상적 양식들을 스캔하고, 2021년 이후 기증이 늘어난 성과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공동 7위
리움미술관 “필립 파레노” 《VOICES, 보이스》 2024.2.28-7.7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접속하는 몸: 아시아 여성 미술가들》 2024.9.3.-2025.3.3
공동 7위를 차지한 전시는 상반기 프랑스 작가 필립 파레노의 국내 첫 개인전과 아시아 11개국의 여성미술가들의 작품들을 ‘신체성’이라는 화두로 엮은 기획전이 선정됐습니다. 한국의 소설가가 아시아 여성 작가로서 처음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는 것이 알려주듯 지금 현재, 아시아의 잘나가는(?) 국가인 한국에서 아시아 여성 미술을 다루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과제인 것으로 보입니다. 여성, 신체성, 소통, 연대 자체는 그다지 참신한 상상은 아니지만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인도, 인도네시아, 일본, 중국, 타이완, 태국, 필리핀, 한국에서 온 60여 팀의 여성 작가들의 작품을 하나의 주제로 모은 것 자체가 중요한 기록이 될 듯합니다.
6위
국립중앙박물관 2024 한일중 국립박물관 공동특별전 《三國三色-동아시아의 칠기》 2024.7.10.-9.22
한국의 국립중앙박물관, 중국의 국가박물관, 일본의 도쿄국립박물관은 국립박물관관장회의를 열고, 2년에 한번씩 국가별로 돌아가면서 전시를 개최하기로 했는데 그 다섯 번째 전시에 해당합니다. 전시명에 앞에 있는 ‘한일중’은 이후의 전시 순서를 보여주는 것으로 내후년에는 일본 도쿄국립박물관에서 열리게 됩니다. 아시아를 대표하는 공예품 칠기를 각각의 나라에서 어떻게 발전시켰고 그 특징은 무엇인지 볼 수 있도록 했는데, 블록버스터 급으로 계획된 것이 아니어서인지 삼국이 서로를 배려한 것인지 조금 담백한 전시였던 기억이 있습니다.
5위
대구간송미술관 개관기념 국보ㆍ보물전 《여세동보(與世同寶) - 세상 함께 보배 삼아》 2024.9.3.-12.1
개관을 기다려온 사람들이 대구로 몰려들어, 3개월간 22만명이 넘게 방문한 것으로 집계됐습니다. 혜원 신윤복의 미인도, 훈민정음 해례본, 청자상감운학문 매병 같은 대표 유물들을 직관할 수 있는 기회라는 것 덕분에 영남권 관람객들은 놓칠 수 없는 기회였을 것 같습니다. 평일에도 관람을 위해 길게 줄을 서는 사람들을 보면 예전 보화각의 역사가 이곳에서 다시 씌어지는 것인가 싶기도 합니다. 소개되는 유물이나 기획에서의 참신함이 있었으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은 들지만, 일단은 국보와 보물이 가득한 볼거리로 보따리를 풀어 놓았습니다. 서울과 대구에서 두 미술관이 역할을 나누어 상호보완적인 관계를 맺어가기를 바라게 됩니다.
4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정영선: 이 땅에 숨 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 2024.4.5.-9.22
서울올림픽미술관과 조각공원, 대전 엑스포 '93, 여의도샛강생태공원, 선유도공원, 호암미술관 희원 등 공기관과 민간을 가리지 않고 큼직한 프로젝트를 해 온 한국 최초의 여성 조경가 정영선(b.1941)의 대표작들을 소개한 개인전으로, 서울관 전시마당 등에 정영선의 조경을 직접 체험할 수 있는 정원 마련해 좋은 반응을 얻었습니다. 이 전시에 대해서는 “미술 영역 밖을 주목한 전시”로, 전시 영역 확장에서 긍정적인 평가가 많은 듯합니다.
공동 2위
국립중앙박물관 《이건희 컬렉션 순회전》 《국보순회전: 모두의 곁으로》
호암미술관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처럼》 2024.3.27.-6.16
국보와 보물과 해외 명작, 다양한 시대와 장르, 2만 3천여 점이라는 기증 규모는 2021년 문화계 이슈를 집어삼켰습니다. 사회적으로, 그리고 문화적으로 큰 의미를 가진 것이니만큼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고, 많은 사람들이 그 실제를 궁금해하게 만들어 놓고 서울에서만 빼꼼히 보여주어 더욱 더 갈망을 부추켰던 것 같습니다. 2022년부터 박물관과 미술관으로 나뉘어 지역순회전이 있었고, 각 박물관의 브랜드 방향에 맞추어 컬렉션을 골라 새로운 구성으로 전시가 되었으며 올해까지 이어졌습니다. “이건희 컬렉션 순회전은 ’이건희‘라는 이름이 아니더라도 보편적 문화 향수를 실현한 사례로 의미있다고 봄”이라는 평가를 써 주신 분도 계셨습니다.
올해 국립중앙박물관은 또하나의 순회전을 열었습니다. 《국보순회전: 모두의 곁으로》는 국립중앙박물관의 국보급 문화유산을 6종, 22건 29점을 묶어 12개 지역 공립박물관, 미술관 12곳에서 순회한 전시입니다. 당진, 보령, 합천, 상주, 강진, 남원, 증평, 장수, 고령, 해남, 함안, 양구가 그 해당지역이었습니다. 교과서에 나온 명품을 중심으로 한 작은 전시인데, 지역 미술관, 박물관에서는 예년보다 2~4배 이상의 관람객이 왔다고 합니다. 연구와 전시 부분에서의 성과 보다는 지역간 문화격차 해소, 지역의 문화향유권 증진 사업에서의 성과라고 보여지는데, 앞으로 어떤 식으로 이어져갈지 지켜봐야 할 부분인 것 같습니다.
호암미술관의 상반기 여성과 불교 전시는 큰 주목을 받았죠. 젠더라는 관점에서 동아시아 불교미술을 조망하는 최초의 대규모 기획전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처럼》은 92건의 동아시아 불교미술품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의미있는 전시였습니다. 불교미술품을 통해 ‘불교미술 속 여성’과 ‘제작과 후원의 주체로서 여성’이라는 두 주제를 조명해 흥미롭게 전통을 읽을 수 있는 계기를 제공했습니다.
1위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한국 근현대 자수: 태양을 잡으려는 새들》 2024.5.1.-8.4
독보적 1위를 차지한 전시는 놀랍게도 ‘자수’였습니다. 많은 표차로 2위를 따돌렸습니다. 한국 자수는 무려 2천 년의 역사를 가진 문화이고 시대마다 시각예술로서의 특징을 보이며 발전해 왔습니다. 자수라는 분야가 주로 여성들의 무대라서 그 시대 여성들의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생활을 들여다보게 해 주는 반면, 메이저 예술로는 잘 대우받지 못했습니다. 더구나 현전하는 유물이 대개 19세기 말~20세기 초에 제작된 것이니 규방공예로만 취급되었습니다. 다른 박물관이 아니라 국립현대미술관이, 근대기 이후의 자수의 역사를 격변의 시기를 거치며 변화한 흐름을 짚으려는 노력으로 다뤘던 것이 성공의 요소였다고 보여집니다.
자수 작가의 이름은 낯설고, 또 순수미술과의 연결은 쉽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엉켜있는 실을 풀 듯 조금씩 풀어낸 구성에서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전시였습니다.
“평소에 그냥 무심코 보던 물질들을 전시에서 제시한 특정 주제와 시각 덕분에 더 넓게 보고 읽을 수 있었던 기회가 된 전시” “미술관에서 제대로 다루지 않았던 분야를 재조명하는 의미” “오랜 시간의 리서치와 짜임새있는 큐레이팅, 그리고 방대한 컬렉션까지, 좋은 전시였고 한국 여성에 관한 생각을 하게 했다.” “감탄을 연발하며 봤다. 규방공예이자 기술이라고만 생각했던 자수에 대한 인식을 바꿔줬으며 예술로서의 가치를 느낄 수 있었던…생각을 확장시켜준 전시” “규모와 컨텐츠 면에서 압도적” 등의 평을 해주셨습니다.
주어진 예시 외에 경기도자비엔날레 주제전 《투게더_몽테뉴의 고양이》, 예술의전당 한가람디자인미술관 《성파 선예-COSMOS》(“말로만 전통 아닌 현대미술 미래를 禪×옻漆로 제시”), 강릉자수박물관 《전통자수 보자기》, 《서용선》 전(“아트션재의 서용선 개인전은 비축기지에서 진행된 서용선의 ‘암태도’ 전시와 함께 들여다 봤으면 함”), DDP 《미나 페르호넨》 전, 부산현대미술관 《백남준, 백남준, 그리고 백남준》 (“새로운 시선”) 등을 의미 있는 전시로 짚어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