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년 후, 2024년 갑진년을 되돌아본다면 그 해 어떤 일들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할까요?
끝난 건가 싶었던 격동의 정치와 사회는 여전하고, 높아졌나 싶었던 한국의 위상은 다시 추락한 해로 기억될까요?
미술계에서는 다른 이슈를 잡아먹는 큼직한 이슈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미술관은 여전히 지어지고, 미술시장은 여전히 어렵고, 진위 문제는 심심할 만하면 터지고, 지방 도시들은 비엔날레로 넘쳐납니다. 성질 급한 한국 사람으로는 미술계의 발전이 더디기만 한 것 같지만 그래도 꾸준한 변화는 느껴집니다. 조금 여유를 가지고 잘한 부분을 응원하는 데 집중하면 좋겠습니다.
공동 9위
문화재청 명칭 변경 “국가유산청”
세 번째 프리즈-키아프
2024 키아프 전시전경
5월 17일, 국가유산기본법이 새로 시행되면서 문화재청은 ‘국가유산청’이 되었습니다. ‘문화재’는 재화적인 성격을 띠지만 영어의 “heritage”의 개념을 실어 ‘국가유산’으로 지칭하면 우리가 물려받아 잘 이어주어야 할 무언가, 라는 느낌을 줍니다. 이러한 국가유산 개념을 유지관리 정책 등에 반영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국가유산’은 ‘문화유산’, ‘자연유산’, ‘무형유산’으로 나뉘고 그에 따라 국가유산청의 조직도 재구성되었습니다. 이름에는 분명한 힘이 있죠. ‘문화유산’이라고 부르게 되면서 전해 내려오는 보물들의 국외 반출 문제나 관리 정책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줄 것이라 생각됩니다.
프리즈서울과 키아프는 공동 개최 3회를 맞으면서 ‘키아프리즈’라는 귀여운 이름을 얻은 데다가, 이미 미술시장 뿐만 아니라 가을의 한국미술계를 들썩거리게 만드는 중요한 동력이 되어버렸습니다. 작품 판매량이나 매출에는 의심의 눈길을 주는 경우가 있어도, 해외 갤러리들의 한국 진출의 교두보 역할을 한다는 분명한 역할이 있고, 대형 미술관과 지자체마저 그 스케줄을 신경쓰는 등 눈에 보이는 영향력이 꾸준히 증가했다는 것에는 이견이 없는 듯합니다. 한류가 좋은 기세일 때 함께 노를 저어 에너지를 얻을 수는 있겠으나 시장 이벤트에 속없이 휩쓸리지 않도록 내공을 쌓아야 된다는 지적이 많습니다. 어쨌거나 장터인 프리즈 서울. 남은 계약기간인 앞으로의 2년간 미술시장은 알아서 열심히 할 터이고, 작가들, 큐레이터, 비평가, 언론은 자기 앞의 과제를 현명하게 찾아나가야 됩니다. 삼청 나이트의 샴페인은 거품이 적당하길 바랍니다.
8위
아트테크 사기사건 (갤러리 K)
돈이 모이는 곳에는 사기꾼들이 몰려들게 마련이죠. 하지만 미술 시장에는 돈이 없어도 사기꾼들이 좀비처럼 살아남습니다. 작년까지 NFT 관련한 의심스러운 투자 상품들이 우후죽순 늘어나더니 올해는 수그러들었고, 다시금 미술품을 통한 재테크, 이른바 '아트테크'라면서 900억 원 넘게 투자를 받았던 갤러리 사기꾼 일당이 검거됐습니다. 갤러리에서 특정 미술품을 사면 원금은 물론, 월 1% 수익도 보장한다 했으나 새 투자금을 받아 기존 투자자들에게 수익을 주는 전형적인 '폰지 사기'였습니다. 투자한 사람만 천백 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전시회와 PPL 등으로 수익을 낼 수 있다고 하면서 투자를 받았다고 하는데, 한국 미술시장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속을 수 있는지 이해가 잘 가지 않습니다.
공동 6위
한국 내 퐁피두센터 분관, 서울과 부산?
글로벌 기업과 미술 후원(국현, 구겐하임, 휘트니)
퐁피두센터의 부산 분관이 가시화되는 상황이 주목받았습니다. 작년에 한화에서 퐁피두센터를 들여온다는 소식을 들었고, 이 퐁피두 서울 분관은 2025년 63빌딩 내부에 설립해 개관 예정이라는 기사 직후여서 조금 당황스러웠습니다. 부산시에 따르면 퐁피두센터 부산 건립사업이 행정절차 중이고, 2031년 10월부터 5년 동안 운영하는 내용을 포함한 업무협약을 체결했다고 합니다. 부산이 글로벌 문화도시로 성장하기 위해 극한 경쟁을 거쳐 따낸 성과로 홍보하지만, 아마도 많은 시민들은 걱정이 앞설 것입니다. 한화가 전액을 부담하는 서울 분관과 달리 많은 비용이 예상되니까요(설립에 1천억원 이상 예산, 연간운영비 제외 브랜드 로열티만 연간 30억원 예상). 서울이 계약 연장 된다면 어쩌면 한국이 퐁피두 분관 두 개를 가지는 나라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5위
LA카운티미술관 이중섭, 박수근 위작 사건
라크마라는 크고 권위있는 미술관에서도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다는 데서 놀랐던 사건이었습니다. 2월 LACMA에서 오픈한 재미동포 기증 컬렉션 《한국의 보물》전에 출품된 이중섭·박수근 작가의 작품이 위작인 것 같다는 제보가 나오고, 기자들의 취재, 한국내 전문가들의 파견-실견 감정을 거쳐 ‘확정된 진작으로 볼 수 없다’는 공식 감정 평가를 받았던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었는지를 조사하겠다는 확답을 받았다는 기사를 마지막으로 이후의 소식이나 별다른 해명을 전해듣지 못했습니다만, 준비과정에서 지속적으로 제기됐던 문제를 무시한 한 기획자의 무리한 결정이 원인이 됐던 만큼, 기증과 전시 계획 단계에서 뭔가 적절치 못한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4위
전시 키워드 “여성”
격변의 시대, 여성 삶 예술 _ 전시장 전경
2023년 베니스 비엔날레 키워드 중 하나가 '여성'이었던 것을 기억하시는지요. 전 세계적인 분위기에선 다소 늦은 감이 있지만 올해 열린 여러 분야의 미술전시, 즉 불교, 근현대미술, 아시아현대미술, 공예 등 다양한 분야의 전시에서 여성을 키워드로 잡아 좋은 반응을 얻었습니다([2024 결산] 올해의 미술 전람회 TOP 10 참조). 이 외에도 서울시립미술관의 《격변의 시대, 여성 삶 예술》, 국립세계문자박물관의 《문자와 여성》, 여성 키워드의 전시는 손으로 다 꼽지 못할 정도로 많았습니다. 단순히 그동안 조명받지 못한 여성 작가의 작품을 꺼내놓는 것이 아닌, 새로운 시각으로 예술을 바라보고자 한 것들이었습니다. 어떤 것들은 조금은 식상하고, 어떤 것들은 그 와중에도 흥미로운 제안을 포함합니다. 내년에는 어떤 키워드가 유행하게 될까요? 전시 업계도 브랜딩/마케팅의 혈투가 치열합니다.
3위
미술진흥법 첫 시행, 물납제 시작
많은 소장품을 남기고 한 소장가 어르신이 돌아가시고 나면 후손은 그 소장품을 상속하게 되는데, 상속세와 유지관리 비용의 부담을 이겨낼 수 없습니다. 급히 팔아서 돈을 마련해 미술품 상속에 대한 세금을 내게 하느니, 미술품 현물로 국가에 납부해 국가는 좋은 작품을 적정 가격에 소장하게 되고 유족들은 급히 처분하는 번거로움을 덜게 됩니다. 합리적인 이 과정이 그동안은 법 마련의 어려움으로 불가하다가 지속적 논의 끝에 부분적 물납제가 도입, 첫 사례가 보도됐습니다. 10점 신청된 작품 중 심의를 통과해 국립현대미술관으로 들어오게 된 작품은 이만익, 전광영, 쩡판쯔 2점 총 넉 점입니다. 앞으로는 미술품 외의 자산에 대해서도 물납이 가능할까요?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작품 가치 평가의 공정성을 담보할 수 있어야 됩니다.
2위
대구 간송미술관 오픈
2016년 대구시와의 계약 체결, 그 후 지난한 과정을 거쳐 올해에서야 완공 후 첫 전시를 가졌습니다(소장품 상설전시공간이 될 것이라는 말도 있었지만 현재는 전시를 쉬고 있는 듯합니다). 입장료는 1만 원이었는데, 이것 가지고는 운영비로 모자랄 겁니다. 국비 160억 원, 시비 240억 원 등 400억 원의 예산을 투입해서 건설했는데, 모자란 운영비도 매년 공적 자금으로 지원한다는 계약조건이 있습니다. 국민 모두가 자신들의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개인 소장품을 전시하는 개인 미술관을, 시가 시 땅에 건물을 지어주고, 운영은 개인에게 위탁하고, 부족한 운영비는 시에서 지원하는 양상. 너무 저자세가 아닌가 하는 의견도 있습니다. 시에서 문화 관광을 위한 투자라고 여기는데, 성공적 사례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위
근대 미술관 건립 논의
서울 종로구 송현동 부지 국립근대미술관 건축안. ⓒ홍재승 국립 20C미술관 건립을 원하는 사람들의 모임 제공
현재 한국의 전통(고전) 미술은 국립중앙박물관, 근현대미술은 국립현대미술관이 담당하고 있고, 그중 근대 미술은 대개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전시되지만 규모나 인력은 소소한 편입니다. 두루뭉술하게 엮였던 한국의 근대미술이 한 해 두 해 지나면서 빠르게 현대-동시대미술에서 분화하고 있으니 이 부분의 취약성을 생각한다고 했을 때 오히려 국립근대미술관의 필요성이 더 크다고 주장하는 분들의 활동이 두드러진 한 해였습니다. 우리나라 근대미술이 볼 게 그리 많은가 하는 무관심, 미술관을 자꾸 짓기만 하는 거 아니냐는 우려, 이건희 기증관과의 경쟁 같은 여러 난관들이 앞에 있고, 설립 장소도 아직 논란이 많습니다. 몇 십 년 전의 과거도 금세 잊곤 하는 우리에게는 근대를 어떻게 기억하고 남겨야 할지, 미술관 설립을 떠나 반성적으로 생각해야겠습니다.
기타 답변으로 “전반적인 미술시장의 극심한 침체”를 강조해 주셨습니다. 경제가 살아나길 간절히 빌어봅니다.